회귀자 사용설명서 928화
젠 (7)
템플러 젠과 내가 쌓았던 유대감들이 하나둘 떠오르는 것은 당연지사.
짧은 시간에 많은 서사들을 쌓았던 만큼 배신당했을 때의 충격은 배가 된다.
주변에… 주변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빛의 성자에게 다가선 유일한 사람.
희생과 빛의 신이 아니라, 명예추기경이 아니라 이기영이라는 사람을 그대로 봐준 존재. 지치고 힘들었을 때 기댈 수 있었던 등대.
템플러 젠과 빛의 성자의 관계는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의미하고 있었다.
설정상 템플러 젠은 고통스러운 일상을 견디게 해준 탈출구였으며 힘든 하루를 견디게 해준 은인이었다.
우린 닮았을지도 모른다. 고독한 명예추기경은 속으로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신앙을 소중히 여기며, 모험을 즐기며, 인간을, 대륙을 사랑한다.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야 하는 비극을 숨긴 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태어날 때부터 템플러로 자란 젠이었기에 빛의 성자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설정이었어.’
아니, 우리는 이미… 서로를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연한 경로로 입수한 이 문서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교황청의 파벌 문제와 명예추기경을 이용하라는 지령이 담겨 있는 문서.
물론 눈앞에 있는 어벙한 새끼는 이 문서를 보지도 못했겠지만 어차피 녀석이 볼일은 없다. 내가 다 찢을 거니까.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러내리며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집어 던지는 것은 순식간.
믿음이 컸던 만큼 배신감도 컸던 것일까. 아니면 녀석의 앞에서만 감정을 드러냈던 것이 습관이 되었던 걸까.
빛의 성자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감정적인 모습은 뭐라고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슬퍼 보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이익!”
하는 정하얀 같은 소리와 함께 문서를 구긴 이후에 땅바닥에 내팽개친다.
‘시바. 이건 감정선이 중요하다구.’
“말씀해 보시라고요!”
아직도 널 믿고 싶다. 템플러 젠을 잃고 싶지 않다는 눈빛을 한번 쏴줘야지. 이미 배신당했지만 배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슬픈 모습이 어디 있을까. 처절하고, 추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제발 변명해 줘.
“…….”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이야기해 줘. 우리가 함께 쌓아왔던 유대감이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하라고.
“정말로… 정말로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뭐라도 좋으니까. 아무 말이나 하라고 이 시발럼아. 시바. 어리바리한 놈아.
하지만 이 어벙한 놈이 그럴듯한 변명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녀석은 안 좋은 거라도 씹어 넘긴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당연히 이쪽은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새끼가 진짜로 넘어왔다는 걸 말해주는 신호였으니까.
물론 처음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이 정체불명의 문서처럼 단순히 명예추기경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며 녀석 역시 달라졌다. 본래의 목적보다는 가여운 빛의 성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워져 버렸다.
‘시바 절절하다. 절절해.’
다른 머리 아픈 문제들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이 별것 아닌 작은 모험이 행복해져 버렸다.
명예추기경이 아닌 이기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템플러가 아닌 일반인 젠의 모습도 함께 찾을 수 있었다.
계획에 없었던 유대감을 갖게 되어버렸다.
‘눈물 나오자너.’
예비 범죄자의 얼굴은 내 표정만큼이나 참혹했고,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뭐라고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변명할 자격이 없는 거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자신의 침묵이 대답이 되었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일그러진 얼굴이 도드라진다.
“정말… 이었군요.”
“…….”
“하… 하하… 정말 그랬던 거군요. 이 파벌 싸움에 저를 이용하는 게 목적이었군요.”
“죄송합니다.”
너무 신나서 집중하기 어렵다.
“뭘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겁니까? 템플러 젠.”
“…….”
“이 교황청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 겁니까. 제가… 제가… 도대체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할 만도 하다.
“나…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배신감과 절망에 머릿속이 뒤죽박죽될 만도 하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머리가 어지럽다는 듯이 비틀거려 주고 호흡곤란이라도 온 것처럼 숨을 헐떡여 주자.
“명예추기경….”
“가까이 오지 마세요.”
“…….”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은 모릅니다.”
크으.
명대사 오졌다.
“이, 이것도 보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정의 단계.
“우… 우리는 처음부터 만난 적이 없었던 겁니다.”
“괜찮….”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
“더 이상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 주세요. 저, 저는 기도를 드리러… 가야겠습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저를….”
“…….”
차라리 없었던 일로 하자. 해적왕 골 P 로저와 만난 일, 몬스터와 마주친 일, 캠프에서 술을 마신 일, 차라리 전부 다 없었던 일로 해버리자.
함께 유대감을 쌓았던 모든 일들을 이제는 그냥 뒤로 넘겨버리자.
다시 한번 이기영을 가두고, 명예추기경으로, 빛의 성자로 돌아가자.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모든 것들을 위해 희생하는 성인으로 되돌아가자. 평소처럼 그렇게 살아가자.
그래. 애초에 사치였던 거야. 진짜 이기영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 리가 없지. 정말로 나를 빛의 성자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봐주는 사람이… 있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걸로 정말 괜찮은 걸까?
정말로 이 모든 것들을 없었던 일로 취급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저는….”
“나가십시오. 나가지 않으시겠다면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이기영을 정말로 버려도 괜찮은 걸까. 그게 정말로 옳은 선택일까?
‘이 새끼 뭐 하고 있어.’
빨리 아무 소리라도 지껄여야지.
‘정말로 이대로 끝낼 거야? 나가란다고 진짜 나가는 거 아니지?’
하… 이 답답한 새끼. 진짜.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템플러 젠!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겁니까?”
제발 아무 소리라도, 시바, 지껄이라고 좀. 나는 다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니까?
“이익!”
하얀이 추임새!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명예추기경님.”
“…….”
“처음에는… 맨 처음에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정말로…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런 일들을 벌인 게 아닙니다.”
‘정말로? 정말?’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는 처음부터 명예추기경님에게서 제 모습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잃어버린, 아니 애초에 가지지 못했던 모습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어? 그랬던 거였어?’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가짜 유대감이 가짜가 아니었던 거야? 내가 만든 가짜 유대감을 진짜라고 느끼고 있었던 고야?’
“그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야. 변명 될 거야. 네가 잘 선택하기만 하면 나는 충분히 변명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어요.’
하지만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지껄여 줘야지. 원하는 건 얻어야 하니까.
“저를 모욕할 생각입니까? 템플러 젠! 당신이 한 행동을 그런 말로 정당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저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즐거우셨습니까? 멍청한 놈이라고… 순진하고 속여 넘기기 좋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기분 좋으셨겠군요.”
“그… 그게 아닙니다!”
‘이 멍청한 새뀌… 순진하고, 속여 넘기기 쉬운 새뀌.’
“정말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베니고어 님께 맹세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저는 명예추기경님을 존경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존경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대륙과 신앙을 위해 일하시는 모습은 언제나 존경스럽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기영 님이 존경스럽습니다. 빛의 성자로서 명예추기경으로서의 삶을, 진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희생과 빛의 신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기영 님이 더욱더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제가 당신을 멍청하다고… 속여 넘기기 쉽다고 생각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 새끼 동요하는 거 봐. 어리바리… 해 가지고.’
“함께 쌓아 올린 추억과 유대감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제 의도가 불순했을지언정, 그 시간들은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흔들리는 모습 한번 보여주고. 반말 한번 딱 치고 나가줘야지. 이건 이기영으로서 저 말을 받아들였다는 신호니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함께 럼주를 마시고, 대륙을 떠돌아다닌 그 시간은 결코…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웃…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템플러 젠!”
키야… 이 새끼. 제법이야. 하지만. 범죄자가 되기는 그렇게 쉽지 않을 거야. 아직 완고하다고. 명예추기경은 절대로 설득되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의미 없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
녀석은 담담히 자신의 범행 계획을 발표했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추악한 범행 계획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모습으로 지껄여댄다.
마치 사이코패스 같은 얼굴.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비주얼이다.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이미 많은 것들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대륙은… 교국은… 베니고어 님께서도 명예추기경님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하실 겁니다. 저는 제가 이런 축복을 받은 것이, 저의 적과 싸우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멍청하게도… 제가 날개를 받은 이유가… 그런 것 때문이라고 착각했었습니다.”
이 추악한 괴물 새끼.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분명히 더 많은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서, 이기영 님에게 새로운 대륙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래서 제게 날개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범죄자 새끼.
“이제 진짜 자신을 드러내셔도 됩니다. 더 이상 희생하실 필요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계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냄새나는 더러운 모포로 빛의 성자를 포박하시겠다?
“모험을.”
“…….”
“길고 긴 모험을 떠날 시간입니다. 이기영 님.”
저절로 몸이 떨린다. 마치 공포에 질린 것처럼 말이다.
‘살려주세요… 누가… 누군가. 현성아… 하얀아… 덕구야….’
거절한다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
나는… 나는 놈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