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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30화 (92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30화

젠 (9)

피드백은 빠르다. 교국은, 교황청은 무능하지 않으니까.

내가 남겨놓은 쪽지가 교황청을 한바탕 뒤집어놓은 것은 당연지사.

지난번부터 이어져 온 파벌 싸움이 민망할 정도로 요한 추기경을 비롯한 적폐 놈들은 이단 심문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관계자라고 판단되는 이들 역시 전부 다 조사를 받으니 템플러들의 일에 가담하고 있었던 사제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

베니고어 님의 성스러운 메이스가 놈들의 머리통에 내리꽂힌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아아아악!! 아악!!!

-명예추기경….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 신성력을 사용하는 몬스터들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파악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템플러들에게 관심이 쏠린다.

무거운 진실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던 명예추기경이 남긴 쪽지도 쪽지지만 그가 바젤 교황에게만 털어놨던 베니고어 님의 이야기도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어두운 공간에 베니고어 님이 갇혀 있다는 것, 악마들이 그 성스러운 피를 받아 마시고 있다는 이야기.

그 어둡고 기분 나쁜 진실. 수면 속에서 영원히 묻혀 드러내지 않았던 그 역겨운 계시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명예추기경이 내게 말한 이야기일세….

-그럴 수가… 그럴 수가 있다니요. 베니고어시여… 베니고어시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추측에 힘을 싣는 것은 빛의 성자와 남긴 쪽지와 바젤 교황의 말뿐만이 아니다.

‘우리 열심히 조사했었잖아. 그렇지?’

성검용사 라파엘과 그의 파티가 조사하고 있던 내용.

외신 꼬맹이들이 그간 조사하고 있던 내용까지 낱낱이 공개되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한 납치 사건이 아니라 더욱더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생겨난다.

아니, 이제는 진실이지.

-라파엘 님께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몬스터들은… 베니고어 님의 성스러운 피의 영향으로 발현된 것으로….

-템플러들 역시 비슷한….

-던전이 생성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파란 길드의 조혜진 님께서는 이번 사건이 공략되지 않은 던전의 영향일 수도 있다고… 라파엘 님의 파티와 명예추기경님께서 함께 조사한 자료를 넘겨받았습니다. 그분의 아기 천사님들께서… 직접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 던전이 당최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명예추기경님은… 명예추기경님께서는 그 던전에 계신 게 확실하신 겁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정황상 템플러 젠이 명예추기경님을 납치한 것으로 판단이 되어….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명예추기경님이 어디 있는지 먼저 알아야지요!

명예추기경을 데려간 것은 템플러 젠이란 사실도 드러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비밀 같은 건 없으니까.

야심한 시각마다 템플러 젠이 명예추기경을 데리고 외출을 나갔었던 정황이 드러났거든.

그들의 만남을 눈감아줬던 요한 추기경 측의 사제와 성기사들, 일부 매수된 녀석들의 입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소식들이 쏟아지고 있는 중.

명예추기경이 템플러 젠을 끝까지 믿고 싶어 했고, 템플러 젠에게 많은 사랑을 내렸다는 훈훈한 이야기.

그 믿음을 범죄 행위로 보답한 천하의 죽일 놈 템플러 젠은 곧바로 대륙의 공적으로 낙인찍힌다.

-이번 일 역시 연관되지 않은 일은 아닙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이 뭔지 생각해 보십시오. 베니고어 님의 성스러운 피를 마시며 그릇된 힘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빛의 성자의 피를 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끔찍한 일이… 베니고어시여….

-이번 일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납치의 동기가 자연스럽게 재조명되고, 여론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지혜 누나가 탄탄히 작업한 내용을 바탕으로 선과 악이 더욱더 명확해지고 선이 행하는 심판에 힘이 생기고 명분이 생긴다.

이것저것 따지며 시간을 질질 끌기보다는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일은 진행된다.

-나머지 템플러들은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어요.

-어쩌면 그들은 교황청 내부에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던전 역시 교황청 내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황청부터 수색을 해야 합니다. 외부에 도움을 받아서라도 샅샅이 찾아내야 합니다.

-템플러는 그동안… 너무나 비밀스럽고 독립적인 기관이었습니다. 뿌리부터 썩어 있는 교황청의 적폐세력들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례없는 위기에 모든 이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하자너.

교황청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해 성기사들과 교국의 감사팀이 교황청에 드나들기 시작하고, 새로워진 교단은 유례없는 대변화의 바람에 몸을 싣는다.

아마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교황청이 넓다지만 그래 봤자 작은 소도시 정도고, 템플러의 행동반경을 잘 조사해 보면 답이 금방 나올 테니까.

아! 요한 추기경한테 얻을 수 있는 게 더 있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소. 헬레나 이단심문관장.

-…….

-나는 정말로 아는 게 없단 말이오.

-…….

-모든 게 템플러 시몬의 잘못이오. 그, 그가 이 모든 일을 꾸몄단 말이오. 자신들이 베니고어 님에게 새로운 뜻과 빛을 전, 전달받았다고 그… 간교한 혓바닥으로 나를, 우리들을 속여 넘긴 것이오. 내게 잘못이 있다면 베니고어 님을 사랑한 잘못밖에… 아아아아아아아악!

-명예추기경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더러운 이단.

-나는 이단이… 아니야… 나는….

-그분께 해를 끼친 그대는 베니고어 님께 결코 사랑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가 눈을 감은 뒤에 볼 수 있는 것은 베니고어 님이 아니라 그분이 직접 만든 시험대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헬레나 이단심문관장이 무섭기는 해.

아무래도 요한 추기경 쪽에게는 뽑아먹을 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녀석이 템플러 시몬을 움직이고 있다기보다는 템플러 시몬 쪽에서 녀석을 움직이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여러 가지 일들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교황청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다 편해진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모아온 퍼즐들이 딱딱 들어맞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조금씩 모아놓은 정보들을 토대로 진실에 접근하는 우리 친구들의 모습은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명예추기경님께서는 혹시 자신이 잘못되더라도 대륙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특히나 정하얀 님과 김현성 님에게는 각별히 주의를… 해달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타인을 우선으로 생각하실 줄은….

-필히 대륙인들이 흔들리는 것을 걱정하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해결해야지요. 주변국에는 모두 연락을 해두었습니다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교국에서도 레인저들과 파란 길드원들, 또 우리 성기사들이 추적하고 있으니, 꼭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템플러 젠의 수배서를 방금 배포했습니다.

-현재 라이오스와 연합경계선을 기점으로 대륙 보호 관리위원회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폰 부대들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고 검은백조의 도움을 받아 정보 길드를 통합 운용하고 있습니다.

-저희 본부에서는 템플러 젠이 지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감시 수정구로 근처 지역을 24시간 감시하고 있으며….

-현재 특정 지역에서 비슷한 이들을 봤다는 사례를 바탕으로 레인저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체계적이기까지 해.

일단 이런 이벤트에서 하얀이와 김현성이 끼면 골치 아파지니까. 대륙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웬만하면 지양하고 싶다. 언제 걔네 귀에 들어갈지 모르니까.

실제로 우리 교국과 성기사단은 힘을 합쳐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는 중, 그리폰 부대가 먼발치에서 날아오거나 곳곳에 떠다니는 눈을 피하기 위해 꽤 심혈을 기울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문제는 없다. 아니, 딱 하나 있다. 내가 더욱더 힘들어진다는 게 문제지.

“소도시에는 들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네? 그럼 식량 보급은….”

‘샤워는?’

호텔은?

“소도시의 사람들과는 만날 수 없는 건가요?”

이 거지 같은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건가요? 시발로마?

“일단은 가지고 나온 식량이 있고… 또 자체 보급을 할 수도 있으니….”

자체 보급이라니, 햄비어나 처먹자 이 말인가요?

“어, 어째서 소도시에 들를 수가 없는 거죠?”

“아무래도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수색하고 있는 것 같아… 며칠간 이곳에서 은둔한 이후에 감시가 소홀해지면 길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 혹시나 제가 젠 님을 곤란하게 만든 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기영 님. 잠깐….”

“젠 님께서는 예상하고 계셨군요. 차, 차라리… 이대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발 돌아가는 게 어때? 대책 없으면 더 시간 끌지 말고 깔끔하게 자수하자.

“만약 젠 님께서 저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면….”

“괜찮습니다.”

“저는 견딜 수가….”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이기영 님. 더 나은 세상을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더 나은 세상이 아니야. 여기서 어떻게 며칠을 살아.

다 쓰러져 가는 폐가에서… 꿀꿀이죽 먹으면서 얼마나 버티려고.

보급도 못 하고, 아무것도 없잖아. 풀죽이라도 먹일 거야? 아니, 그전에 씻을 수는 있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아니. 절대로 못 견디는데요? 유대감이랑 우정만으로 견디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자본과 능력의 시대야.

이기영 가라사대 무능력한 새끼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보니까 네가 딱 그 짝이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힘들지만… 젠 님과 함께라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젠 님, 저는 당신이 이런 것 때문에 상처 입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수하자.

“근처에 호수가 있었습니다.”

말 돌리지 마.

“물을 길어오겠습니다.”

물 길어와야 해? 이미 그 수준까지 떨어진 거야? 뜨거운 물은? 폼클렌징은 있나? 샴푸는?

“따뜻한 물을 준비할 테니 쉬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젠 님. 하지만….”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기영 님.”

난 시바 못 이겨내겠어요.

이 여행은 잘못됐다.

‘새 신분을 구할 때까지 이렇게 지내려고 했던 건가.’

몬스터를 사냥해도 팔 수 있는 루트가 없는데?

소도시들은 전부 다 봉쇄되고, 지금 이쪽 지역을 조지고 있으니까 며칠은 여기서 더 은둔해야 한다는 소린데.

도시까지 가서 보급해 올 여력도 없고, 식량은 얼마나 있지?

괜스레 녀석의 짐을 뒤져본다.

‘가져온 게 없어.’

너무 충동적으로 빠져나와 제대로 준비할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급자족으로 뭐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일까.

‘삼 일?’

더럽게 맛없던 꿀꿀이죽에 넣을 육포 쪼가리마저 삼 일치밖에 남지 않았다.

‘커피가 없어.’

심지어 커피는 내일부터 먹을 수가 없다. 양심이 있으면 이거 다 내 거겠지?

‘곧 발견될 거야….’

따뜻한 우유도 못 먹어.

와인도 없어.

다과랑 차도 없다구 시바.

진짜로 가지고 있는 건 60골드가 전부, 이 돈을 쓸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걸 제외하면….

한숨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하지만.

교국은 결코 무능하지 않다. 굳이 정하얀을 소환하거나 이지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견되어 구출될 확률이 높다. 작위적인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거야.’

길어야 일주일이다.

교국은 결코 무능하지 않으니, 일주일 안에 모든 일이 해결되리라.

악독한 범죄자 새끼는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명예추기경은 다시 한번 사랑하는 대륙인의 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렇게,

그렇게, 시바 2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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