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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33화 (92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33화

젠 (12)

“괜찮으십니까? 이기영 님. 이기영 님….”

‘괜찮을 리가 있겠어?’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너 같으면 괜찮겠냐고. 그리고 기다리기는 뭘 기다려. 기다리면 네가 뭘 어쩔 건데. 이거 치료라도 해주게?’

“제길… 어째서….”

‘어째서긴 뭐가 어째서야. 이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운명 같은 이야기였어. 이 동화의 엔딩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배드엔딩이었다구. 정말로 그런 꿈같은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어?’

안 그래도 약하디약한 몸을 가지고 있는 명예추기경. 그에게 이런 불운이 닥친 것은 이미 정해진 이야기였다.

평상시처럼 생활하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가녀린 몸은 부활의 날 이후로 더욱더 망가진 상태였고, 일상생활마저 힘겨워할 정도로 컨디션이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으니까.

단지 괜찮은 척했을 뿐이다. 교국의 명예추기경은, 대륙의 빛의 성자는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타인이 자신을 걱정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누군가가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대륙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고, 주변인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젠이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몸으로 명예추기경은 자유를 찾고 싶어 했다. 자신의 몸이 버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는 대륙의 아름다움을 두 눈에 직접 담고 싶어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젠의 손을 잡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몸이 견디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빛의 성자에게….

‘꿀꿀이죽을 처먹이셨어요?’

“제길… 제기랄!”

‘그런데 5평 남짓한 꿉꿉한 공간에 처박아 두셨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래요. 당신은 시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나는 대체… 무슨 짓을….”

‘내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들면 네 눈에서는 시바 피눈물 나오는 거예요.’

명예추기경의 몸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나뭇잎처럼 극단적인 상태였다.

파란 길드의 선희영이나 엘레나, 그리고 교국의 사제단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빛의 성자의 몸을 돌보고 있었다고 봐야지.

햄비어 고기나 꿀꿀이죽 같은 건 독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오랜 시간 동안 가죽을 벗겨내고 비가 오는 날 그 무거운 가죽을 들고 장시간 이동했다 이거야.

안 아픈 게 이상한 거야. 아주 작은 것도 무척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이거예요.

게다가 밤까지 샜어. 그래도 이 못난 양반 밥 한 끼 따뜻하게 먹이겠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음식이 식지 않게 해줬다니까.

보통사람도 앓아누울 텐데. 연약하디연약한 빛의 성자는 어떻겠어? 한계까지 버텨봤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거지.

“어째서 신성력이….”

신성력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리고 넌 사제도 아니잖아. 신성력 가지고 있다고 전부 다 치유능력이 선희영이나 엘레나급인 줄 아나 봐.

“…….”

“하아… 하아….”

녀석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아니, 할 수 있는 게 없다.

교황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이 보인다.

때마침 내려주고 있는 폭포수 같은 비를 헤치며 빛의 성자를 업은 채로 정신없이 뛰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마치 드라마 속에 한 장면 같은 극단적인 상황, 언제 슬픈 음악이 깔려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다.

아니, 벌써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어디로 가게.’

이 새끼도 아마 모를 거야.

자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를 거라고. 길을 잃었어.

“젠 님….”

하고 중얼거리는 것은 당연지사.

깜짝 놀란 녀석이 곧바로 말을 이어온다.

“정신이… 정신이 드시는 겁니까?”

“네… 젠 님….”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잠깐만 기다리시면… 한숨 자고 일어나시면 모든 일이 끝나 있을 겁니다.”

“공화국… 공화국으로 가는 건가요?”

“…….”

“지금 우리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화국으로 가고 있는 건가요?”

“…….”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건가요. 새 신분을 얻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건… 가… 요?”

“…….”

“매일 다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건가… 요?”

잠깐 너무 집중했더니 눈물 나올 뻔했자너. 감정선이 너무 절절해.

“젠 님이 말씀해 주신 곳들에… 직접 가 볼 수 있는 거군요. 정말로… 새 삶을….”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녀석은 자수하는 방향을 최우선으로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빛의 성자의 상태는 위독해 보였으니까.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현재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

“네… 공화국으로… 공화국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그렇군요.”

선의의 거짓말.

오금이 저릴 것 같은 백색의 거짓말.

“이제 조금만 있으면 도시에 도착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주셨으면 합니다.”

“…….”

달리고 있는 장소가 공화국이 아니자너. 왜 반대쪽으로 달리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고 있어.

“아주 약간만… 더 기다려 주시면… 금방… 금방 원하시는 삶을 즐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녀석이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기영 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자유로운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실 겁니다.”

“…….”

“새로운 하늘도, 새로운 경험도… 새로운 것들을 눈에 담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여행을 다닐 거고, 항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많은 이들을 돕고 하고 싶으신 일들을 하며 그렇게 삶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아프지 않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은… 이제 더 이상 겪지 않으실 겁니다. 매일 웃음 지으면서….”

“거짓말….”

“…….”

“하아… 하아… 거짓말… 이군요.”

어디서 빛의 성자를 속이려고 들어. 이 새끼는.

“지금… 거짓말하고 계시고 있군요.”

자수하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알아?

교황청에 투신하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알았어?

“그거… 알고 계신가요.”

“…….”

“젠 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아… 하실 때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신답니다. 표정도 불안해 보이고… 지금 저는 볼 수 없지만… 분명히… 분명히 불안하신 표정을 하고 계실 것 같네요. 조금 톤도… 높아지시고… 전부 다 행동으로 드러난답니다.”

“…….”

“착한 사람.”

이 범죄자 새끼.

“…….”

“따뜻한 사람.”

이 구역질 나는 새끼.

“제가… 쓰러졌었… 나요? 제가 또… 쓰러졌었나요?”

정신이 혼미한 상태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다.

진짜로 머리가 불덩이가 된 것 같은 느낌. 속은 울렁거리고 눈알이 빠질 듯이 아프다.

온몸이 죽어가고 있는 감각이 이러할까. 마치 꿈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빛의 성자는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정신은 온전하지 않지만 원하는 것은 확실하다. 다른 것 따위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내 눈에는 이제 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구요.

“공화국으로 가주세… 요.”

“…….”

“공화국으로 가고 싶어요. 가서… 젠 님과 함께… 새로운 모험을….”

“죄송합니다. 이기영 님.”

“교국으로… 돌아가지 말아주세요.”

“죄… 송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교국은 싫어요. 이제… 더 이상….”

“죄송합니다. 이기영 님. 저는….”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

“다시 돌아간다고 한들, 다시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된다고 한들, 저는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분명히… 불행할 겁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젠 님을 원망하게 될 거예요.”

“…….”

“다시 병상에서 일어난다고 한들, 분명히… 후회할 거예요. 저는… 저는 차라리 이대로… 이대로 끝내고 싶어요. 제가 죽더라도, 제 끝이 조금 더 가까워지더라도, 조금 더 인간답게, 조금 더,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눈을 감고 싶어요.”

갑작스러운 시한부 설정.

하지만 이 감정의 폭포수 아래에서 위화감 따위는 없다.

개연성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시바 입에 담는 말이 진실이다.

“꼭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만…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닐 뿐입니다.”

“아니요. 두 번 다시는 없을 거예요. 분명히.”

“…….”

“하아… 하아….”

“…….”

“돌아가지 마세요. 마지막 부탁입니다.”

녀석은 눈을 질끈 감는다. 이런 건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한쪽 팔로 얼굴을 훔친다.

폭포수처럼 내리는 비 때문일까. 아니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 때문일까.

정신없이 달리던 녀석의 발을 조금 더 빨라진 만큼 흐느낌 소리도 빗속에 파묻힌다.

어째서 이 성인은 이런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어째서 이 빛의 성자는 자신이 응당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릴 수 없는 것일까.

어째서 세상은 이 사람에게만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

어째서 베니고어는 이 성자에게만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내리는 것일까.

“베니고어시여….”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베니고어를 위해 내뱉는 목소리라기보다는 그녀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분을 원망하지… 마세요.”

“…….”

“그분의… 잘못이 아니랍니다.”

움직이기 힘든 몸으로 힘겹게 꿈틀거리며 녀석의 손에 로자리오를 쥐여준다.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로자리오가 없다는 사실을 들켰기 때문일까. 녀석은 깜짝 놀란 듯 몸을 떨었지만 이내 로자리오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마지막만큼은… 평범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

“대륙의 모든 하늘을… 눈에 담고 싶어.”

“…….”

“젠 님과 함께… 모험을… 즐기고… 싶어.”

녀석이 우뚝 멈춰 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흐윽… 최소한….”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춘다.

“잠깐이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 흐윽… 흐으윽….”

연기력 진짜 죽인다. 내가 놀라울 정도의 몰입력에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흐윽… 끄윽… 마지막에는… 스스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말, 빛의 성자가 그동안 내지르지 못했던 목소리, 그 진심을 듣고 어떻게 섣불리 교황청으로 향할 수 있을까.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놈의 괴로움이 전해져 온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민하고 여러 가지 가치의 충돌을 받아들이고 있는 등이 보인다.

“다시는… 새장 속으로… 들어가기… 싫어….”

물론 시바 빨리 새장으로 들어가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안락하고 따뜻한 새장 속으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와인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반신욕 하면서 시원한 음료도 마시고 싶고. 하지만 이 새끼 눈에서 즙 좀 더 뽑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 저렇게 선택지 사이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한 느낌.

지금 당장 돌아가도 상관은 없지만… 3일 정도는 더 빼도 되겠지 뭐.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군사님.

-…….

-나 좀 구하러 와.

-…….

-지금 공화국 쪽으로 가고 있거든요? 새 프로젝트 이야기도 들었으니까. 이번에 한 번 도와주면 예산 더 크게 잡아드릴게.

-…….

-병력도 많이 끌고 오고. 조금 위험한 분위기 팍팍 풍기는 애들루. 나 지금 납치 당했자너. 알지? 많이 힘든 상태야.

-…….

-알아서 대기하고 있어요. 알겠지? 참고로 부탁 아니야. 진 군사 프로젝트가 걸려 있으니까. 성심성의껏 알아서 잘하세요. 알겠죠?

이 새끼가 정말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

-…….

-제기랄. 이기영 이 개자식. 제길! 제기랄!!! 제기랄!!!! 이 구역질 나는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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