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39화
젠 (18)
선즙은 항상 방향성을 제시한다.
일단 눈물을 흘리다 보면 해석은 알아서 하게 마련이니까. 김현성이 답을 찾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울자를 시전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바 도대체 뭐야.’
진 군사 이 무능한 새끼는 애 안 잡아두고 뭐 했어. 그 신입들이 연락한 건가.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건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진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스토리텔링에 사고가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정황상 녀석들이 김현성에게 직접 연락을 한 것 같은 느낌, 아마 확실할 것이다. 젠의 행동을 길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면, 어찌어찌 녀석에게 연락이 갈 만하니까.
파란 길드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만큼 김현성은 길드의 명예의 중요성에 대해서 수없이 설명했을 것이고, 오늘 일어난 사건이 길드의 명예에 흠집을 낼 만하다고 판단했다면….
녀석들이 직통번호를 누를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지들 얼굴에 똥칠하는 것도 모르고… 베니고어넷에 퍼진 영상으로 알아본 건가?’
김현성 얘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야?
동영상을 확인한 이후에 곧바로 진청에게 달려가 진상을 피우고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것이 설득력 있다.
조용히 빠져나가려고 했다면 김현성의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온 도시가 떠나가도록 여기 있다고 소리를 치고 있는 마당에 놈이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
진 군사가 꾸며놓은 무대를 아주 뭉개 버리는 것으로 모자라 주연 자리를 꿰차 버렸다.
‘진 군사 아쉬워서 어떻게 해.’
얘 명대사 못 날려서 어떻게 하냐구.
현실 도피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젓는다. 이윽고 김현성의 생각이 이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뭐야. 이 가는 팔은… 뼈와 가죽만 남아서….]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도대체 뭐야. 이 참혹한 모습은… 제대로 움직일 수는 있는 거야?]
그렇게 참혹해 보여?
실시간으로 김현성의 생각들이 전해져 온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안겨 있는 이쪽을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진 모양.
객관적으로 현재 내 모습을 살필 경황은 없어서일까. 아니면 이미 무뎌졌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더 엉망인 모양이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는 게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살이 많이 빠지기는 했을 것이다.
제대로 음식을 먹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으니까. 새 모이만큼 먹고 수저를 내려놓는 일이 일상다반사. 최근에는 조금 상황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통의 흔적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다.
험한 가사노동으로 인해 손가락을 불어터진 지 오래.
열심히 하는 모습을 연출하려고 하다 보니 바느질이나 요리를 할 때 생긴 많은 상처도 포인트, 신성력으로 치료해 별 이상은 없지만 기분상 붕대는 감아 줘야 한다.
바느질을 하다가 콕콕 찔렸다든가, 요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베였다는 건 기본이니까.
설정상 명예추기경은 이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거든.
‘그래 현성아. 피부도 많이 푸석푸석해졌지.’
이지혜가 보내준 제품을 사용했던 지난날과는 완전히 다른 피부, 탱탱하고 탄력 넘치고 건강해 보였던 새하얀 피부 대신 자리한 것은 수분이 전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피부다.
사실 그렇게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
‘그래. 입술도 터졌어. 시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서 촉촉함이라고는 시바 눈을 뜨고 찾아볼 수도 없자너.
동공 역시 텅 비어 있는 모습.
마치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처럼, 모든 걸 내려놓은 그 표정은 납치되었던 시간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동안 어떤 일을 당했는지, 어떤 수모와 치욕과 고통을 견뎌냈던 것인지.
감히 김현성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 새끼가 감히 그걸 추측할 수나 있을까.
‘아니야. 그런 짓까지는 안 당했어. 이 새끼는 이럴 때는 상상력이 풍부하더라.’
모든 경우의 수를 곱씹고 있는 김현성이 느껴진다. 이미 입술을 꽉 깨문 상태, 힘을 조절할 겨를이 없는 모양인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비단도 울고 갈 정도로 결이 좋았던 옷감 대신 자리한 것은 거렁뱅이도 거를 것 같은 더러운 모포. 그 위로 계속해서 녀석의 피가 떨어진다.
김현성은 그 모포를 벗어내려다 흠칫거리며 멈춘다.
얼굴을 한 번 확인한 이후에는 인상을 찡그리며 황급히 내 모습을 감춰준다.
이기영의 참혹한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언제나 대륙인들의 우상이자 동경의 대상의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저주받은 거렁뱅이 모포로 상처 입은 친우의 모습을 가려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게 저주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당연히 김현성은 모포 안에 있는 이기영의 모습 역시 확인한 지 오래.
‘이 개새끼들.’
그래. 맞아. 그 새끼들이 때렸어.
온몸에 멍이 든 것으로 모자라 뼈까지 부러진 것 같다. 지독한 녀석들답게 얼굴을 집중적으로 때려서 그런지, 아마 얼굴도 많이 부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래도 희미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게 바로 이기영이지. 그래. 꿋꿋해지자. 기영아.
현성아 그 새끼들 절대로 잊지 마. 진짜 용서할 수 없는 새끼들이니까.
“기… 기영 씨….”
“…….”
일단 입 닥치고 있어야지.
“기영 씨… 괜찮으신 겁니까. 도…도대체 이게….”
김현성도 차마 말을 이어나가기 힘든 모양, 어마어마한 분노와 자괴감으로 휩싸인 감정은 이미 마이너스를 뚫고 나간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까 다리도 절고 있는데. 서 있을 수가 없어서 그걸 보여줄 수가 없네.
“어째서 연락을 하지 않으신 겁니….”
아 그것도 개연성이 있기는 있어. 나 한쪽 눈이 망가졌거든.
유대감으로 만들어진 신의 선물,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상징, 한쪽 눈의 금안은 이미 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제대로 뜨여지지도 않는 한쪽 눈. 사실 이건 상징성일 뿐이지만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이유로 써먹기에는 충분하다.
“…….”
김현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그 눈을 확인한 직후였다.
‘어.’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 안 그래도 화난 표정이었던 녀석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얘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괴하다. 찰나이기는 했지만….
‘시바 뭐야. 깜짝이야.’
“죄송합니다.”
“…….”
“제가… 제가 전부 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정말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괜… 괜찮습니다. 현성 씨.”
“저는….”
“이렇게 와 주실 줄 믿고 있었던걸요.”
사실, 시바 안 왔으면 했어.
“제가… 조금 더….”
“그리고 이건 내 잘못이니까… 현성 씨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그 손 놔.”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러고 보니 쟤도 있었지.
몸을 흠칫거린 것은 당연지사. 더러운 납치범의 손에 고통스럽게 놀아났던 지난날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꿀꿀이죽, 흙탕물이 들어오는 폐가. 꿉꿉한 냄새가 나던 모포.
“그 손 놓으라고.”
“…….”
“그 손 놓으라고 말했다!”
“저자입니까?”
“네?”
“저자가… 기영 씨를 이렇게 만든 사람입니까?”
이야기하면 긴데….
일단 울자.
필사적인 표정으로 너희 젠이 날개를 펼친다. 우리 현성은 입술을 꽉 깨물며 검을 뽑는다.
젠은 틀림없이 강자의 반열에 올라와 있다.
규격 외라면 규격 외, 베니고어의 힘을 꽁으로 받아먹고, 어릴 적부터 전투기술을 필사적으로 연마했다.
교황청에서 놈을 차출할 만큼 재능이 넘쳤고, 많은 지원을 바탕으로 지금의 성장을 이룩해 냈다. 녀석은 틀림없이 강하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우리 현성이가 더 세.’
검을 뽑아 들고 김현성에게 쇄도하는 것은 순식간, 아까 전에 선보였던 저공비행이 특기였던 모양인지, 땅에 닿을 것 같은 모습으로 검을 내지른다.
김현성 역시 놈을 맞을 준비를 하는 모습.
‘얘 싸우는 거 오랜만에 보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젠 녀석이 몇 킬로미터 뒤떨어진 건물로 튕겨 나갔다.
‘시바. 이래서 이 새끼 부르기 싫었던 건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놈의 마찰력을 줄여주는 건물들이 순식간에 박살이 난 것은 당연지사.
‘어….’
콰드드드드드득!
도로고 건물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처박힌 곳에서 다시금 튀어나온 녀석이…
“이기영 님!”
이라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손을 뻗지만 다시 한번 반대쪽으로 튕겨 나간다.
콰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도시가 개 박살이 나고 있는 중.
‘미안해. 진 군사. 시바.’
녀석도 이 상황을 예견했던 걸까. 주변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은 것 같다.
이미 민간인들과 모든 병력을 철수시킨 이후, 최고 인원으로만 현 상황을 컨트롤 하고 있었고 그것마저도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하지만 말릴 생각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말릴 수는 있겠지만 실행할 수 없는 거겠지.
어차피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도시는 포기했다 이거야.’
랜드마크라고 불렸던 거대한 탑이 김현성이 휘두른 검에 두 동강이 난다.
필사적으로 김현성의 검을 막고 있는 너희 젠의 반격으로 신전이 터져나간다. 광장은 이미 쑥대밭이 됐고, 성벽들이 무너진다.
정하얀이 나타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피해가 극심하다.
마치 모래성 위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허망하게 밝혀 무너지는 모래성보다 이 도시가 터져나가는 것이 더욱더 허망하게 보인다.
-제기랄! 이기영, 이 개자식! 제기랄!
-군사님 보고 있어요?
-제기랄! 이 사태를 어떻게….
-현성이 좀 맡아달라니까 그것 하나 제대로 못 해요? 무느응해 가지고… 시바 진짜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이래 가지고 프로젝트 맡을 수 있겠어?
-이 미친 자식! 네가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너까지 이러지 마. 머리 아파.
곧바로 통신 채널을 꺼버린 이후에는 다시 한번 갤러리의 마음가짐으로 두 녀석의 물러설 수 없는 공방을 눈에 담는다.
‘이거 근데 어떻게 하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래도 쟤는 같이 산 정이 있는데. 조금 더 써먹을 때가 있을까.’
“아아아아악!”
‘아니면 그냥 여기서 손절해 버릴까. 너무 괘씸하기는 했어.’
콰드드드드득!
‘던전에 대해서 더 들을 이야기가 있나. 그래도 최후는 명예롭게 법정에 세워서 마무리하는 게 젠 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수도 있을 텐데…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명예롭게.’
“개자식!”
“네가 알기나 해… 그분의 아픔을 네까짓 게… 커헉!”
어.
콰아아아아아아!!
아.
콰드드드드드득!
“크윽!”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뭐야. 쟤 죽겠다.
김현성은 놈과 검을 부딪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검을 놓아버린 이후 마구잡이로 놈을 쥐어 패고 있다.
마치 차희라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아니, 둠둠현성의 그것처럼 보였다.
혹시나 뒤에 꼬리가 생긴 것은 아닌지, 얼굴은 무사한 건지 확인하게 되지만 겉모습에는 변화가 없다.
기술이고 뭐고 없는 순수한 폭력. 악의를 배출할 뿐인 모습.
단순한 화풀이고, 놈이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계속해서 저항하려고 하는 놈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무의미한 저항일 뿐이다.
내구력은 쓸 만한지 버티고 있는 모습이 더 측은하게 보인다.
“잠… 잠깐….”
진짜로 죽겠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개자식.”
콰직!
“멈… 멈추세요. 현성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