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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44화 (93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44화

재판 (3)

“이 새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잘근잘근 밟아줘야 돼.”

“적당히 해야 되는 거 알죠? 진 군사가 맡고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앞뒤 안 가리고 묻어버리려고 하면 우리만 힘들어져요.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까지 끌고 오지 마세요. 오빠. 그나마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진 군사 때문인데….”

“…….”

“만약에 진 군사 내치면 용엄마가 경기를 일으킬걸요.”

디아루기아가 조금 불쌍해질 수는 있어. 그건 맞아.

“아주 시건방지다니까. 지가 뭐라고 시바 특별검사야? 공화국 놈이 교국에 대해서 뭘 알아? 뭘 아는데 지껄이느냐고. 교국으로 망명이라도 하겠대? 지가 교국법을 그렇게 잘 안대?”

“그거 다 도발하려고 그런 것 같아요.”

“재판을 하는 것보다 이 새끼가 아예 무대 위를 밟아 보지도 못하게 끌어내려야 하는데. 특별검사에 관련된 조항들이나 사례들 찾아봤지?”

“오빠가 부탁한 건은 전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잖아요. 근데, 특별검사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 오빠가 더 힘들어질 텐데.”

그건 맞아.

근데 그 새끼가 짜증 나는 걸 어떻게 해?

교국 법정 위에서 이의 있음 하는 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심사가 뒤틀리는데.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에요. 그게 더 오빠한테 유리하고요.”

자격을 운운하며 아예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베스트이기는 했다. 애초에 녀석은 공화국민이었고, 트집을 잡자면 잡지 못할 것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녀석을 자리에서 끌어 내린 이후였다. 당장 내 기분은 좋겠지만 그 이후 녀석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뻔했다.

‘대륙법정으로 끌고 갈 거야.’

사실상 공화국의 도시를 때려 부순 건 김현성이었지만 템플러 젠 역시 도시를 폐허로 만든 것에 일조했으니 말이다.

재판 내용이 조금은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조삼모사일 것이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쪽은 공화국, 범죄가 일어난 장소 역시 공화국, 범죄자의 신병을 확보한 것 역시 공화국.

교국으로 신병을 넘긴 것은 어디까지나 동맹국을 위한 배려였다. 교국 내부에서만 일어날 싸움을 대륙으로 넓힌다는 것부터가 불리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굳이 교국법 운운하며 이쪽에게 엿을 먹인 것은 기만책이다.

‘침착해야 되자너. 근데 침착할 수가 없자너.’

온갖 증거들이 공화국 내에 있다. 지금이야 조사단이라는 형태로 교황청의 이단심문관과 교국의 레인저들이 파견되어 있지만… 아마 법정을 대륙으로 넓히는 순간… 나와 템플러 젠의 추억이 담긴 오두막을 공화국의 잡놈들이 무참히 짓밟을 것이다.

증거조작이야 하지 않겠지만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충분하겠지.

“무조건 교국 안에서 끝내는 게 유리해.”

“맞아요. 진청은 그대로 놔두는 게 좋을걸요. 그나마 교국에서 하니까 힘을 쓸 수 있는 부분도 제한적이잖아요. 투입할 수 있는 부관들도 한계가 있고, 물론 교국의 지원을 받으니 상관은 없겠지만 자기 사람들이랑 같이 일할 수 없다는 건 좀….”

“누나는 안 해? 도와줄 거지?”

“지금 도와주고 있잖아요.”

“…….”

“…….”

“제대로 안 하고 있잖아.”

“그럼 어떻게 해요. 저도 할 일이 있는데. 솔직히 이거 그냥 어린애들 자존심 싸움이잖아. 사실 오빠 입장에서는 재판이고 나발이고 아무 상관 없는 거 아니에요? 템플러 젠인지 템플러 궨인지 뭔지 그냥 알고 있는 거나 뱉고 빨리 죽으라지.”

‘그건 그래. 그 새끼는 그냥 뒈져도 상관없어. 모가지 붙어 있으면 쓸데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공을 많이 들인 건 아니니까.’

그래도 그 띠꺼운 놈이 웃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잘 보면 이 누나도 시바. 내 편 아니야.’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중립을 외치고 있기는 했지만 이 누나가 중립이라는 것부터가 내 편이 아니라는 증거나 다름이 없다.

설렁설렁 문서를 뒤적거리는 게 이지혜답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지사, 밀고는 하지 않겠지만 큰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력이 너무 부족한데.’

녀석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던 것이 문제.

“부길드마스터?”

“아… 네. 김미영 팀장님 잘 오셨습니다.”

김미영 팀장을 제외하면 아직 제대로 된 변호인단도 꾸리지 못했다. 쉽게 쉽게 갈 거라고 생각해 탱자탱자 힐링이나 하고 있는 사이 공화국의 비겁한 새끼는 빠져나갈 구멍을 단단히 틀어막아 버렸다.

“부길드마스터께서 요청하신 자료들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이번 사건이 워낙 특수한 터라 비슷한 사례들은 많이 찾을 수 없었지만… 피해자가 용의자를 두둔한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111년 전에 일어난 성녀 납치 사건에서도 성녀님께서 성기사 바르학이 처벌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지만….”

‘찢겨 뒈졌네.’

성기사 바르학은 오체분시가 되어 찢겨 뒈졌다는 서류가 보인다. 감히 교황청의 성녀를 탐한 죄. 극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54년 전, 교국의 공주 샤를페리아도 왕국의 재상에게 납치를….”

그 새끼도 뒈졌잖아.

“과거 사례들 같은 경우에는….”

“네. 물론 이러한 과거의 사례들은 교국이 아닌 제국 시절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실효성이 없다고 반박한다면 그쪽에서도 크게 트집 잡을 수 없을 겁니다.”

“승소한 사례는 없는 겁니까?”

“네.”

어차피 과거 사례들은 상관없어. 법이 바뀌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재판을 주관하는 것이 교황청이 아니라는 것, 이담심문관들이 재판을 주관하면서 종교재판이 이루어진다면 템플러 젠이 이토소우타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교황청 측에서도 아주 약간의 사정을 봐준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저 내 원망을 받기 싫을 뿐이다.

교황청도 그렇고 교국도 그렇고.

“교국과 교황청이 함께 법정을 운영하게 되므로 재판 방식은 배심제로 채택됩니다.”

어느 한쪽도 미움받기 싫다 이거지. 진청을 환영한 건 김현성뿐만이 아니다. 바젤 교황도 마찬가지고 오스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심원단은 교황청 종교 관계자 10인과 교국시민 11인으로 구성되게 되며 선출 방식은 무작위입니다.”

“양형은 대법관이 결정하게 되어 있던가요?”

“대법관과 추기경이 함께….”

‘어지간히 책임지기 싫었나 보네.’

템플러 젠에 대한 명예추기경의 ‘집착’이 자신들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거겠지.

결국 유무죄는 배심원단에게 맡기고 양형은 두 명이 함께 결정하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배심제는 나한테 더 유리해.’

배우신 분들이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들이 판결을 한다는 것은 배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매번 나오는 논란거리다.

‘흔들 수 있으니까.’

배심원단의 동정을 살 수도 있고 호감을 살 수도 있다. 개소리도 먹힌다.

물론 대법관이나 상대측에서 제재할 수는 있겠지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감정호소는 백 퍼센트 들어맞는다.

진청에게 익숙한 일은 아니다. 저 새끼는 딱딱하게 자기 할 말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배심원단을 증거로 설득할 수 있다면… 전부라고 판단하겠지만 인간은 감정에 휩쓸리는 동물이다.

“혹시….”

뭔가를 갈망하는 눈으로 김미영 팀장을 바라본다.

“배심원단 명단이라면….”

‘비공개겠지.’

“가지고 있습니다.”

역시 유능해.

재판 방식이 배심제로 채택됐다면 이쪽을 공략하는 것이 옳다.

교국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일반 방식의 재판은 진청 때문에 불안하고 우리들 식으로 처리하는 종교재판은 변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대비할 수가 없다.

두 집단이 서로에게 폭탄을 돌리며 어쩔 수 없이 채택한 배심제가 이쪽에게는 득이 된 셈이다.

“1번 배심원 조지….”

“삼류도박사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몇 푼 쥐여주면 되겠네.

“캐넌.”

“린델의 난봉꾼이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두 명 모두 굵직한 전쟁들에 모두 참가한 이력이 있으며… 아니, 사실상 모든 전쟁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 다요?”

“같은 파티원으로 활동했다고 하더군요.”

벼락 맞을 확률이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굵직한 전쟁에 모두 참여했다는 건 명예추기경, 빛의 성자와 더 가까운 곳에서 함께 호흡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엘프 엘레디안.”

“안 좋네요.”

“네.”

엘프들은 대부분 원칙주의자다. 감성보다는 이성의 편을 들 확률이 높다.

진 군사가 제대로 된 증거를 물어온다면… 빛의 성자의 눈물에 함께 눈물을 떨어뜨릴지언정 유죄에 표를 던질 것이다.

“캐슬락의 지젤가릭스. 공화국에서 이주한 자입니다. 현재는 교국시민권자로.”

‘갑자기 공화국 놈이 튀어나온다고?’

이거 명단 랜덤으로 뽑힌 거 맞나?

전체적인 명단을 확인해 보면 무작위로 뽑힌 게 확실해 보이기는 한다.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이쪽에게 살짝 유리하게 배정된 것 같은 느낌.

변수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배심원단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 새끼 쪽이지.”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미영 팀장님. 대법관과 추기경은요.”

“대법관 쪽은 미정이며 함께 재판을 진행해 주실 추기경으로는 제이나 추기경님께서.”

“제이나 추기경?”

“요한 추기경을 대신해 이번에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김미영 팀장님.”

김미영 팀장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에….

“그럼 변호인단 구성이 아직 안 끝났으니….”

“네.”

아마 유능한 이들로 구성되겠지.

“다 들었지? 누나 진짜 변호인단 안 할래?”

“안 해요. 저 진짜 바쁘다니까요. 진 군사가 재판에 정신 팔렸으니까. 나라도 업무 해야죠. 그리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만 괜히 고집부리지 마요. 그냥 정보만 빼고 죽여도 되는걸….”

자존심 문제야. 누나.

“그럼 제이나 추기경이랑 자리 한 번만 만들어줘.”

“이 오빠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네. 그거 위법이에요.”

“이것만 해주면 변호인단 해달라고 안 조를게. 나… 너무 아파서 그래.”

재판 준비 중인 추기경과 변호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부터가 어불성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고 해서도 안 되는 짓이지만 누나라면 가능하다.

도와주지 않는 것에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있는 만큼 자리 한 번은 만들어줄 수 있겠지.

“오빠 근데 치사해도 너무 치사한 거 아니에요?”

원래 실전은 치사하고 비열한 놈이 이기는 거야.

내가 여기서 진청한테 발리면 잠도 못 잘 거야. 누나. 홈에서 털리는 건데 얼마나 짜증 나겠어. 그 새끼 나 볼 때마다 입꼬리 올릴 텐데. 내가 그걸 어떻게 봐. 이 새끼가 얼마나 무모한 싸움에 발을 들였는지 깨닫게 해줘야지.

내가 교국이고 교국이 난데. 교국은 모두 하나니까 치사한 것도 아니야. 원래 당한 놈이 병신인 세상이잖아.

그리고….

“…….”

“…….”

“그럼… 검사 측 증인, 계속 증언하십시오. 명예추기경님과 같은 여관에 투숙하신 것이 맞습니까?”

“네. 맞, 맞습니다. 밤… 밤마다 명예추기경님의 비명 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퍽퍽 때리는 소리와 함께… 저는 귀를 닫으려고 했지만… 그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베니고어시여….”

“베니고어시여….”

“흐윽… 흐윽… 빛의 아들이시여….”

역겨운 미소를 흘리는 진청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개새끼….’

“…….”

정정당당하게 재판에 임하려고 하던 내가 바보가 된 느낌.

이 비겁한 새끼는 신성한 법정에서… 거짓 증인을 데리고 구라를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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