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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46화 (93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46화

재판 (5)

“그는 교국이, 교황청이 만들어낸 피해자입니다.”

“…….”

“라고 말씀하셨다니까.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셨는지는 충분히 이해해. 명예추기경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실제로 젠이라는 놈도 기구한 인생을 살았더라고. 신전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영문도 모른 채 템플러로 차출되고,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는 대부분 혹독한 훈련을 하면서 지냈다고…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아. 사실 자기 의지라는 게 없었으니까. 젠이라는 괴물을 만든 건 템플러라는 집단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교황청도 가담했다고 볼 수 있고.”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가 그의 범법행위를 변명해 줄 수는 없어 캐넌.”

“나라고 그걸 모를 줄 알아? 그냥 이해가 된다는 거야. 명예추기경님이 눈물로 호소하시는 걸 네가 못 봐서 그래. 알렉스. 흔들린 건 분명히 나뿐만이 아닐 거야… 사실상 템플러 젠을 조종한 건 템플러 시몬과 요한 추기경이라고.”

“템플러 시몬? 요한 추기경?”

“그래. 그 잡놈들이 템플러 젠을 휘둘렀던 거야. 템플러 젠 역시 피해자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니야.”

“템플러 시몬과 요한 그 개자식이 템플러 젠을 휘둘렀다는 증거는 있나? 게다가 명예추기경님 납치가 일어났던 당시에 명예추기경님께서 남기신 쪽지에는 자신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써져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림자 영웅이 증거로 제출한 그 쪽지. 증거는 너무나도 명백해. 캐넌. 이건 생각해 볼 가치도 없어. 템플러에서 어떤 음모가 있었고… 어떤 뒷이야기가 있었는지는 상관없다고, 물론 현장 검증관으로 파견된 내가 배심원인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합리적인 판단은 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템플러들의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명예추기경님이 납치당한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시선을 돌리자 현장보존 된 명예추기경님의 방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만신창이가 된 방 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는 엉망진창이었고 바닥에는 찢어진 종이들과 쓰레기들이 나 뒹굴고 있다.

그 참혹한 현장에 대부분의 배심원들이 침을 삼켜 넘기고 있다. 마치 이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는 거겠지.

침묵이 길어졌던 탓일까. 관리위원회의 후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 현장이 명예추기경님께서 납치당하시기 전 마지막에 있었던 장소입니다. 배심원분들은 현장보존에 유의하며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사관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현장 조사관들은 명예추기경님께서 큰 저항은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말다툼이 일어난 이후에 짧은 몸싸움이 있었고 지금 보고 계시는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신전의 성기사들과 경비병들은 어디에 있었나요?”

“요한 추기경에게 매수된 성기사들이 근무를 서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사전에 계획되어 있는 납치라고 판단해도 되는 겁니까?”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저희 검증관들은 어디까지나 배심원분들이 올바른 판단을 도와주도록 안내를 해드릴 뿐입니다.”

그 말이 맞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자신의 행동은 현장 검증관에 어울리지 않다고 봐도 되는 거겠지. 캐넌이 다시금 말을 이어왔다.

“네 후배는 너랑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

“그나저나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알렉스 네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일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분 때문에 생각을 고쳐먹은 거야. 캐넌.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도 명예추기경님께 뭔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거였다고… 그런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그놈한테는 재판도 사치야. 당장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란다고.”

“목소리 좀 줄여. 알렉스. 너 지금 흥분했어. 배심원들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

“네놈들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지. 다른 곳에서는 조용히 입 닫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

“다음 현장은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다.”

“…….”

“정수아 씨?”

“네. 알렉스 선배님.”

“이만 다음 현장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선배님. 그… 그곳으로 바로 이동하면 되는 건가요?”

“네. 워프게이트로 배심원들 인솔하고 마경의 숲으로 곧바로 이동한다고 공지해 주세요. 10분 뒤에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선배님.”

“조금 관리 위원회 사람 같이 보이네. 알렉스.”

“입 닥쳐 캐넌.”

“정수아라는 사람이랑은 무슨 관계야?”

“아무 관계도 아니야.”

“에이,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서로 주고받는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관리위원회에서 사내연애해도 괜찮은 거야?”

“입 닥치라고 캐넌. 지금 네 장난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마 녀석 나름대로 이번 일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이겠지만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옆에 붙어서 조잘거리는 캐넌을 보니 짜증이 날 지경, 물론 녀석이 입을 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충격적인 광경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번 현장은 명예추기경님께서 약 18일 정도를 머무르셨다고 추정되는 현장입니다. 안이 좁으니 두 분씩 입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지하에 반쯤 처박혀 있는 오두막, 흙탕물과 오물이 뒤범벅된 것 같은 바닥.

공기가 제대로 통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 악취 때문에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공간. 이런 장소에서 18일을 버텼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도 이러할진대 명예추기경님은 오죽할까.

이미 한 번 와본 적이 있지만 여전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장소였다.

‘빛의 아들이… 이런 곳에서 지냈다고?’

녀석이 입을 닫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시작은 종교관계자 배심원들부터였다.

“흐윽… 흐윽…. 베니고어시여.”

“명예추기경님….”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와 신을 찾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눈물은 쉽게 전염된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폐가, 이런 곳에서 고초를 겪었을 그를 생각하니 감정이 격해질 만도 하지.

“레인저들은 명예추기경님께서 이 장소에 들어온 이후 2번 정도 밖으로 나가셨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외출 두 번을 제외하면 이 좁은 공간에서 계속해서 지내셨던 겁니까?”

“예. 이곳에 계신 2주 동안 영양 상태 및 건강이 많이 악화되셨습니다. 몸에 후유증이 생긴 것 역시 이곳에서의 생활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많이 흐르고 무엇보다 빗물이 계속해서 들어와 폐가 안에 많은 흔적이 남지는 않았지만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이곳에서… 네. 여러 가지 폭행에….”

“공화국의 군사가 제출한 증거가 발견된 장소가 이곳이었군요.”

“네.”

“확실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 장소에서 여러 가지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폭행은 물론… 아마 정신적으로도 무척 힘든 시기였을 겁니다. 특이한 점은 이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화전민 마을에 다녀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직접 가죽 손질을 하신 이후에는 가죽과 생활용품들을 물물교환하셨다는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이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화전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걸까요?”

“걱정됐기 때문이셨겠죠. 혹시라도 화가 그들에게 미칠까 말이에요. 템플러 젠이라면 그들을 모두 죽이고도 남았을 겁니다.”

“실제로 이후 곧바로 이곳을 빠져나가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성력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된 것 역시 그 직후고요.”

“아무래도 화전민 마을에 다녀온 것에 대한 보복성 폭행을 당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신성마법을 사용한 횟수는….”

“정확히 몇 번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다수라고….”

“그 정도의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 다수의 신성마법을 사용할 정도라면… 당시 상황이 심각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네.”

“실제로 죽을 고비를 넘기셨다고 했으니….”

“물물교환한 생활용품들은 어디에 사용되었습니까?”

“명예추기경님께서 템플러 젠에게 식사를 만들어 바치거나….”

“어째서….”

“그분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감히 추측건대 아마 그를 동정하셨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려 이주가 넘는 시간 이상을 이 좁은 공간에서 숨어 지내셨으니…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그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공감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해하고 상처 입히고 모욕하고 치욕스럽게 한 범죄자지만 빛의 아들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셨을 겁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

“…….”

“빛의 아들이시여….”

“후우….”

“현재 빛의 아들께서 그를 두둔하는 것 역시 그런 연유이기 때문일 겁니다. 빛의 아들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용서하시려고 하십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하고 착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 모진 폭력 속에서도….”

“…….”

“…….”

“네 생각은 어때? 알렉스? 배심원들은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야. 캐넌.”

“…….”

“실제로 다음 현장… 그러니까 공화국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그 개 같은 범죄자 새끼를 위해 헌신하신 정황이 남아 있으니까. 매일 밤 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보내면서도… 명예추기경님은 그를 동정하신 거야. 새벽같이 일어나 그 범죄자 자식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개자식.”

“하지만 되돌아온 건 폭력뿐이었던 거지.”

“…….”

“그 헌신에 대한 대가가 무차별적인 폭력이었던 거야. 매일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개자식은 빛의 아들을 암시장에 노예처럼 다뤘다. 이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분을 짓밟았던 거야. 그가 템플러 시몬에게 이용당했든, 요한 추기경의 거짓말에 속았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그는 악이야. 캐넌. 사람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동정하게 만들고, 은혜에 폭력으로 대답하는 악마 같은 자식이야. 명예추기경님께서 그를 용서하시더라도 우리가 녀석을 용서하면 안 돼.”

“이제 1심이 끝났을 뿐이지만….”

“더 이상의 재판이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너는 어때. 조지?”

“사실….”

“응.”

“무죄에 손을 들어달라고 접선해 온 단체가 있네.”

“뭐?”

“진정하게. 알렉스. 나도 녀석들의 정체가 궁금해 찾아봤지만 소용없었으니까. 괜한 분란을 만들기 싫어 입 다물고 있었지만 눈이 다 커질 만한 액수더군. 아마 템플러나 요한 추기경의 끄나풀일 확률이 높을 걸세.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너. 그래서 그 돈을 받은….”

“받지 않았다네. 예전이면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어떻게 그분을 배신할 수 있을까. 그는 마땅히 대접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자야. 빛의 아들이 대륙을 구한 대가가 이런 무너져가는 폐가에 갇혀 혹독한 짓을 당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매번 그분께 도움만 받지 않았나.”

“…….”

“우리는 대륙의 위기에 늘 함께 있었고, 그분의 일대기와 서사를 지켜본 사람들이지.”

“…….”

“파란의 방패가 끌려가면서 외친 목소리가 기억나는가. 그의 말이 맞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그 악마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 게 될 걸세.”

생각 없이 사는 녀석이라고 매번 생각했었지만 가끔 조지는 저런 말을 던지고는 한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들 말이다.

참혹한 현장의 앞에 대부분의 배심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 놈….”

“때려죽일 놈.”

“악마 같은 자식.”

그 말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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