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47화
재판 (6)
‘시바 죽일 놈.’
때려죽일 놈.
‘악마 소환사 새끼.’
나쁜 자식.
‘진청 이 개자식.’
내 편은 아무도 없다.
‘시바. 인생 혼자자너.’
지혜누나도 박덕구도 김현성도 등을 돌린 것 같은 느낌. 사라진 신입길드원들과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정하얀과 한소라는 보이지도 않는다.
뇌물이라도 처먹었는지 배심원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빌드업을 해놓은 것이 문제였을까.
우리 젠을 범죄자로 만들기 위해 짜놓았던 그 일련의 과정들이 내 목을 조르고 있다. 최소한 하나만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납치됐을 당시에 쪽지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폐가에 처박혀 있지 않았더라면, 도시 내에서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저지른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너무 완벽했어. 시바. 너무 완벽했다구.’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진청을 보니 화딱지가 날 지경. 네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자신이 승리할 거라고 믿는 저 태도가 재수 없게 느껴진다.
한번 발버둥 쳐보라는 태도. 어차피 너는 내 손바닥 아래라는 얼굴. 통쾌하다 못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것 같다는 표정.
‘아, 너무 얄미워. 시바.’
일단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재판을 망칠 수는 없었으니까.
“삐뚤어진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있다면 베니고어 님을 향한 그의 마음에 죄를 물어야 합니다. 템플러 시몬과 요한 추기경은 그의 신앙을 이용해 그를 조종했습니다. 베니고어 님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 템플러 젠을 꼭두각시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죄를 물어야 합니까? 단지 베니고어 님을 위하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에 죄를 물어야 합니까?”
“그가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이 새끼가 어디서 은근슬쩍 반말이야.
“그저 실수일 뿐입니다. 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죄를 저지른 것은 그가 아닙니다.”
술은 먹었지만, 시바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고.
“그가 저지른 잘못의 죗값을 치르는 것은 요한 전 추기경과 템플러 시몬이며 교황청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독립된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템플러라는 집단이 현재의 사건을 만들어낸 이들이며 용의자는 그들에게 이용된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합니다.”
“…….”
“단순히 희생양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분노를 해소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2년 전 마도사 윌리엄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법정에서 있었던……. 마탑의 관측 실수로 인하여 민간 마을에 마법을 떨어뜨렸던 그 사건을 떠올려 봅시다. 윌리엄은 지정된 장소로 주문을 외웠을 뿐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사람도 당시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비빌 언덕은 이것뿐이지. 템플러 시몬과 요한 추기경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첫 재판 때부터 빌드업 해온 성과였다. 마침 적절한 사례도 있었고…….
“이의 있습니다, 대법관님. 명예추기경께서 말씀하신 사례는 현 사건과는 동떨어져 있는…….”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처벌을 받은 것은 마탑의 관측병과 확인절차를 무시했던 통신병입니다. 그 누구도 윌리엄을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 누구도 말입니다.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그의 아픔에 공감했습니다. 템플러 젠이 그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평소처럼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 믿으며, 그게 베니고어 님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믿으며, 자신에게 내려온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 발언 역시 허점이 존재한다는 것.
슬그머니 녀석의 표정을 살핀 것은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과장되게 팔을 벌린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걸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이 X새끼, 알고 있었어.’
“명예추기경의 말은 앞과 뒤가 다릅니다. 존경하는 추기경님.”
“…….”
“하핫. 베니고어 님의 로자리오를 암시장에 팔아넘기는 것이 신앙입니까!”
‘이 새끼.’
“그는 베니고어를 저버렸습니다. 추기경님. 암시장에 로자리오를 팔아넘긴 이를 신앙으로 감싸려고 하다니요. 명예추기경.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지 않습니까.”
“증거는, 증거가 있습니까?”
“용의자가 암시장에 로자리오를 팔아넘긴 장부가 있습니다.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대법관님.”
“암시장에서 사용하는 장부입니다. 신용할 수 없는 정보이고 증거입니다.”
-추하군. 이기영.
-그딴 거 증거로 못 써먹어, 진군사. 알아들어? 어딜 날조하려고?
“템플러 젠은 로자리오를 신분세탁을 위한 자금 350골드와 약간의 식료품과 교환했습니다. 앞과 뒤가 다르지 않습니까. 신앙을 위한 임무를 위해 신의 상징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다니요. 교황청에서 로자리오가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그가 신앙을 위해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그 로자리오는 어디에 있습니까. 조금 더 명확한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설령 그 장부가 진짜라고 한들 템플러 젠이 거래한 장부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비빌 언덕이 이것뿐인가 보군, 이기영. 기껏 로자리오 물타기로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진군사님, 아직 끝난 거 아닌데 너무 여유로우시다.
-같잖은 블러핑. 내가 속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시바 블러핑 맞아.
-군사님이야말로 너무 추하시네요. 제대로 된 증거를 못 가져오셨으면 내놓지를 말든가, 반쪽짜리 증거를 가져오고 유세 떠는 모양새가 너무 추해. 당신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배심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만.
대놓고 배심원들의 반응을 살피는 건 조금 부끄러울 것 같아 눈알만 돌리자 충격에 휩싸인 듯한 장내가 들어왔다. 종교 관계자 배심원들은 특히나 동요하는 편.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신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빌드업이 로자리오를 팔아넘긴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시바. 진짜.’
-그나마 종교관계자들을 잡아야 희망이 있을 텐데……. 아쉽게 됐군.
-아직 끝난 거 아니라니까요, 군사님.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닌가 몰라. 당신 그러다가 저번에도 털렸었잖아요. 한번 뒈졌다 살아나서 기억력이 감퇴되셨나 봐.
-겁먹은 개가 크게 짖는 법이지.
-내가 들어봐서 아는데요, 패배한 개도 잘 짖더라구.
-흥.
흥이 뭐야. 시바. 그건 또 무슨 리액션인데.
-아무튼, 정말로 군사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봅시다. 네? 한번 보자고요.
-네놈이 무슨 허세를 부리는지는 상관없다. 물증은 명확하고 빠져나갈 구멍은 없지.
맞아. 시바.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것 같아.
물증은 명확하고 모든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첫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재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변호인단 내에서도 절망적인 분위기가 자리 잡은지 오래. 차라리 감형 쪽으로 무게를 두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이 나올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 리가 없다.
‘안 돼. 시바. 무조건 이겨야 돼.’
이기기 시작하니까 따로 입을 터는 것만 봐도……. 이번 재판에서 패배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오만한 얼굴로 이죽거리겠지. 생각보다 쉬웠다고 중얼거리면서 도발할 거야.
“변호인 측의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증거로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다고…….”
‘나이스.’
-봐요, 진군사님. 어딜 증거 같지도 않은 증거를 들이밀어? 어이, 진군사. 법정이 장난이야? 교국 법정이 당신네 놀이터인 줄 알았어?
-시간 문제다. 대세에는 지장이 없는 사소한 해프닝이지.
담담한 척하지만 녀석이 이걸 사소한 해프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이 새끼는 완벽주의자였으니까.
녀석의 말대로 대세에는 지장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 로자리오 건은 녀석의 주장 속에 숨어 있는 단 하나의 결점이다. 이쪽이 이 사건을 템플러 시몬과 요한 추기경 쪽으로 물타기 하려는 걸 알고 있기까지 하다면 이걸 그냥 놔둘 수 있을 리가 없다.
담담한 척해도…….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을 거야.’
“오늘은 이만 재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재판은 이틀 뒤에 시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가 네 마지막이 되겠군, 이기영.
-군사님의 마지막을 잘못 말씀하신 거겠지.
-이 건을 가지고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네놈이 그리 원하는 일이니 한 번쯤 어울려 주지.
지랄하지 마. 너 엄청 신경 쓰고 있잖아. 아닌 척해도 지금 막 불안하잖아. 한 번 뒤통수 맞아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어울려 주는 정도가 아니라 눈에 불을 켜고 로자리오 찾을 거라는 거 모를 줄 아나 봐.
직접적으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만…….
‘이쪽에서 먼저 선수 쳐야 돼.’
로자리오를 먼저 구할 수 있으면 구하는 게 최선. 아니, 사실 진짜 최선은 따로 있다.
‘어차피 졌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배심원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교국시민들도 교황청 종교 관계자들도 템플러에게 분노를 보내고 있다. 일련의 상황들이 너무 딱딱 들어맞고 있고, 분하지만 이 새끼에게 빈틈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촉박할 것이다.
시바 진 거야. 이대로라면 질 거야.
“부 길드 마스터.”
“네, 김미영 팀장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지만…… 저번 제안에 대해서…….”
“아니요. 감형 쪽은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무조건 승소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주세요.”
“제 능력이 부족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잘해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무 잘해놔서 그래. 우리 김 팀장은 죄 없어. 여기까지 끌고 온 게 기적인걸……. 많이 수척해진 거 봐.
“일단 로자리오를 먼저 찾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공화국의 짐승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지금 바로 암시장으로 향하시고……. 파견 인원은…… 김창렬, 벨리에를 함께 파견하겠습니다.”
“네.”
“추가로 다음 재판은 변호인단과 함께 준비해 주세요. 굳이 제게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김 팀장님 재량껏 판단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재판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승소할 방법을 찾아봐야죠.”
정확히는 이걸 뒤집을 방법이다. 승소와 패소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판을 뒤집어버리는 방법. 몇 번이나 생각해 봤지만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내가 못 이길 거면 진청 이 새끼도 못 이기게 해야지. 절대로 못 이기게 만들어야지.
‘시바.’
무책임한 짓을 저질러도 아무 거리낌 없을 야심한 시각.
새벽 2시 33분.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라는 걸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렇게, 나는 우리 현성의 방문을 두들길 수밖에 없었다.
“단도진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성 씨.”
“네?”
“템플러 젠을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주세요.”
형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걔 탈옥 좀 시켜봐. 너는 가능하잖아.
“다시는 템플러 젠과 만나지 않겠습니다.”
내 부탁 들어주면 이제 걔랑 안 놀아. 너랑만 놀아줄게.
“그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걔랑 절교할게. 네가 다시 내 형제가 되는 거야.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베스트 프렌드. 내 부탁만 들어주면 그게 다시 네 거야. 너한테 다시 돌려줄게. 그동안 형이 좀 섭섭하게 했지? 전부 다 풀어줄게.
초등학생들도 거를 유치한 거래.
하지만, 김현성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