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51화
분위기 (2)
‘아냐. 김현성만 긴장할 게 아니지.’
나도 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혜지니는 소중한 친구자너….’
“세계수 소실 사건 당시에… 엘리오스 님께서 직접 고백하셨거든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죠. 정말 로맨틱 했었는데…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어요.”
“정연 씨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때 나도 같이 있었지 아마.
엘리오스, 이 늙탱이 새끼.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몇백 단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랜만에 들려온 가십에 잠깐 설레었던 것도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애한테 청혼을 세 번이나 갈겨 버린 무신경함, 이미 범죄행위나 다름이 없다.
우신여고 테크니션이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봤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 아니었던가.
즐길 수 있을 만큼 다 즐기고 나서 정착해야지. 연애 한 번 못해본 애한테 청혼이라니. 이 새끼는 정녕 양심이 있는지가 의문스럽다.
“…….”
“혜진 누님이 말이요?”
“네. 덕구 씨. 엘리오스 님뿐만이 아니라니까요. 같이 길거리에 나가면 연락처를 묻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요.”
그래. 얘 진짜 의외로 인기 많아.
아니, 의외라고 말하는 것도 실례지. 성격 좋지, 일 잘하지, 싸움도 잘하지, 똑똑하지. 멋있지. 어딜 봐도 모난 구석이 없어.
얘 창 휘두르는 거 보면 날 가져라는 말이 절로 나오니까.
그 꽉 막힌 성격이 인간들이 보기에는 조금 딱딱하게 느껴지기야 하겠지만 원칙주의자들이 많은 엘프들이 보기에는 최고의 배우자감이 아닐까.
엘레나처럼 상대방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다면 더욱더 조혜진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으리라.
‘얘가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엘프 왕국의 통치자 버프도 있고… 엘리오스는 생긴 것도 제법 볼만하니까…. 마음 약한 조혜진은 흔들릴 수밖에 없겠지.
어쩌면 벌써 조금 흔들렸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 새끼가 3번이나 청혼한 거고….
“그건 몰랐구만.”
“아마… 제 배경을 노리고 접근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사업 문의나… 길드 가입 문의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머. 그렇지 않을걸요. 말을 걸어온 사람들이 부족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제가 알아보기에는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나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분들도 많았어요.”
“…….”
“아무튼… 혜진 언니는 나중에 엘프 왕국의 여왕님이 되는 거네.”
“거, 거절할 겁니다.”
“…….”
“네 번째 소식을 기다려야겠네요.”
“…….”
엘레나의 반응을 보면 정말로 아쉽게 느껴지기는 하는 모양이다. 김예리 얘는 은근슬쩍 조혜진을 떠보는 분위기고….
어떻게 해. 그 와중에 쟤 아직도 김현성 좋아하나 봐.
“혜진 누님이 엘프 여왕이 되면….”
“안 될 겁니다.”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있죠?”
“안 어울릴 겁니다.”
“동화 속 이야기 같은 느낌이군요. 엘프 왕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있는 여기사라니….”
“그러니까. 안 할 겁니다.”
“왠지 잘됐으면 좋겠다니까.”
‘조혜진 말처럼 되면 다행인데….’
완곡히 거절의 표현을 내비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김현성의 반응을 살피는 조혜진을 보면 아직 둘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김현성은 동요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 현시점에서 조혜진의 일까지 신경 쓰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저는 혜진 씨가 길드를 떠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떠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 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렇지 않아요? 현성 씨?”
“네.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혜진 씨는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이것 봐. 누나. 이 코인 아직 반등의 가능성이 보여.’
“아암. 누님은 소중한 사람이요. 우리랑 평생 파란 길드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요.”
“왕!”
“가지 마세요. 조혜진 님.”
“아무 곳도 가지 않을 겁니다. 알프스.”
다들 한마디씩만 거들어도 스트레스다.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선지 제법 짓궂은 농담들도 나오고 있는 편.
조혜진은 조혜진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있었는데 그게 또 신입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축제를 열거나 길드원들끼리 시간을 보내면 저런 모습을 볼 수 있었겠지만 최근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으니까.
벨리에에게 조혜진은 그냥 딱딱하고 무서운 상사 정도로 비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 이미지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적당히 커피 마시면서… 다과도 마시고… 화제는 계속해서 바뀐다.
회의를 하는 건지 잡담을 떠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즐겁다. 김현성도 신나 하는 것 같고… 하얀이도 오랜만에 떠들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은 모양.
“끄응… 슬슬 배고픈데.”
밥까지 처먹는 건 조금 그래.
회의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바깥에서는 엄청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는 줄 알 거야.
조혜진과 엘리오스의 러브스토리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거라고…. 사실 우리도 이렇게 떠들 시간 없는데….
“그러고 보니 회식은 언제 하는 거요? 우리 회식 안 한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맞, 맞아요. 오, 오, 오빠.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너는 나 와인 먹이고 싶어서 그러지.
“신입 길드원 환영회도 제대로 한번 열어줘야 되는 거 아니요.”
“그럼… 파티 준비는 제가 하는 게 좋겠네요.”
“희영… 희영… 누님이 주최하는 파티는… 언제나 환영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게….”
나는 선희영이 주체한 파티 좋더라. 조용하고 품위 있고….
그런데 다른 애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왕!”
“알프스 후배님이 주최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네? 제, 제가요?”
그건 더 아닐 것 같네. 애견파티 만들 일 있어? 쟤 딱 봐도 파티 같은 거랑은 거리가 멀자너… 누가 봐도 널드자너.
“시켜만 주신다면 열심히!”
“왕! 왕! 왕!”
아니야. 넌 하지 마.
“아니면 내가 해도 상관없고. 이 박덕구가….”
넌 더 하지 마.
“정하얀 님께서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요?”
한소라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
정하얀이 파티를 주최한다면 한소라 손을 타겠지만 이기영 등신대가 나올 것 같아서 허가할 수 없다.
“파티 말고 스케일 크게 축제나 열자니까! 저번에 현성이 형씨가 연 가방축제. 그거 엄청 반응 좋았다는 거 아니요.”
“각 길드에게 협력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빠듯하지만 무리해서 진행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크닉. 어때? 저번에. 우리. 다 같이. 거울 호수.”
예리야 너 놀고 싶구나.
“아니면 바다낚시 하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단합대회의 일환으로 말입니다.”
“거, 오랜만에 기모 형씨가 좋은 의견 내준 것 같은데.”
“특수 낚싯대라도 몇 개 제작해 놓을까요?”
유아영이 낚싯대를 만드는 건 재능 낭비처럼 보인다.
본래 말이 없는 김창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마디씩 내뱉는다. 언성도 높아지고 있고… 조금씩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 같다.
돼지 새끼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일단 참으려고 해보지만 자꾸만 지랄 같은 말을 내뱉어 참을 수가 없다.
‘시바. 진짜.’
“특수 낚싯대 말고! 특수 미끼를 제작해 달라니까!”
‘아 저거에 왜 웃음이 나오지. 진짜.’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만들 수가 없어서….”
김현성이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그렇게 웃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기영 씨.”
‘그래? 나는 자주 웃어줬던 것 같은데.’
“그런가요?”
“네.”
“모두 함께 있으니까요.”
“…….”
“…….”
“그렇군요.”
나보다는 지가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딜 시바 나를 속이려고 들어. 너 신난 거, 형이 다 알고 있어.
“오, 오빠. 그, 그, 그때는 세라도 같이 데려가요.”
“당연히 같이 데려가야지.”
너네 근데 그동안 잘 지냈어?
하얀이 얼굴 보니까 좋아 보이기는 하네. 쓰로누스 얘네들도 잘 지내고 있었나 몰라.
“그런데….”
“응?”
“축제, 피크닉, 단합대회, 파티는… 다 언제 하는 거, 거, 거예요?”
“이번에 던전 들어갔다가 나와서.”
“네… 네?!”
갑작스럽게 침묵에 휩싸인 장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 시바 타이밍 좀 이상했나 봐. 필터링 안 하고 빌드업도 안 하고 그냥 그대로 뱉어버렸네.’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분위기가 좋았었는데… 조금 싸늘해진 것만 같다.
던전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회의에 대한 내용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모두들 이쪽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문제, 특히나 김현성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던전에서는 진짜루 희생 쇼 안 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길드마스터.”
“불허합니다.”
네가 뭔데 내 앞길을 막아.
“꼭 던전에 기영 씨가 들어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황청 내부에 있는 던전은 이미 공략준비가 진행 중이며 파란 길드를 비롯한 여러 길드의 협력으로 공격대를 구성 중에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을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부, 부길드마스터는 푹 쉬세요. 저희가….”
‘아냐. 나 너희들 못 믿어.’
“같이 가겠습니다.”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기영 씨!”
시바. 언성 높이지 마. 어차피 딱 한마디면 끝나.
이거.
“혼자 있기 싫어요.”
어디가 제일 안전할 것 같아.
“파란 길드원들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침묵.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길드원들이 보인다.
‘내가 어디서 제일 안전할 것 같냐구.’
너희들 전부 다 던전 들어가면 누가 날 위로해 주겠어. 누가 날 지켜줄 수 있겠냐구.
언제나 당당했던 이기영이었지만… 템플러 젠에게 공감하고 그를 위로하던 이기영이었지만 그날의 충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끔 악몽을 꾸기도 하고, 쉽게 잠들지 못하기도 한다. 작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누가 나를 때리지 않을까 불안해 떨기도 해.
길드원들밖에 없어. 이기영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여기 있는 가족들이야.
김현성도 던전 들어가고 정하얀도 던전 들어가면 나는 어떻게 해. 누가 나랑 같이 있어 줄 건데….
“제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장소는 바로 여기예요.”
“…….”
“…….”
“그러니 함께 가겠습니다.”
반박이 나올 리가 없지.
오히려 무척이나 숙연해진다. 심지어 몇몇은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어째서 이 사람을 혼자 내버려 뒀을까. 길드 업무에 밀려 자신들이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이기영이 위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도 막 생각날지도 몰라. 깜깜하고 아무도 없었던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었던 곳을 향해 손을 뻗었던 그때 말이야.
젠과 함께 있었을 때, 그때의 기억이 잠깐 떠올랐어. 파란 길드가 그리웠고 너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리웠다구.
수많은 업무와 책임에 짓눌린 명예추기경이 유일하게 이기영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너희들과 함께 있을 때야.
더 이상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모두들. 내 마음이 느껴지니? 이기영의 진심 느껴지니?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오, 오, 오빠….”
그래. 하얀아. 너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
“형님….”
덕구야. 형 너무 힘들다.
“…….”
혜지니. 내 친구. 계속 옆에 있어 줄 거지? 엘프 늙은이랑 결혼 안 할 거지?
“이기영 님.”
네. 엘레나 님. 함께 있어 줘요.
“기… 기영 씨.”
그래요. 현성 씨. 이제는 혼자 내버려 두지 마세요.
모두에게 시선을 보낸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말이다.
다들 날 내버려 두지 마.
날 두고 떠나지 마.
이기영 버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