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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54화 (94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54화

분위기 (5)(삽화)

그야말로 왕이라도 행차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물론 컨트롤 타워의 중요성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게 조금 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종교적인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타국에 방문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엄연히 던전을 공략하러 가는 원정, 공격대 하나를 통째로 호위 병력에 투자하는 건 그다지 옳은 선택이 아니다.

가마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병력의 질과 규모가 먼저 진입한 공격대의 배 이상이라니….

명예추기경이 소꿉장난을 하기 위해 던전으로 향한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기는 했다.

마차의 외부는 쓸데없이 고급스러웠고, 그런 마차의 주변을 성기사들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이 둘러싸고 있다.

총 4명으로 이루어진 가마꾼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가마를 지고 있었다.

능력치가 살짝 떨어지는 중급 모험가들, 하지만 실력은 진짜다.

전문적인 가마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심지어 그 안은 웬만한 고급 마차 뺨칠 정도로 화려하고 편하다.

마법으로 확장되어 있는 내부는 침대, 쇼파, 책상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주방까지 자리해 있다. 여유롭게 머물면 약 4명 정도가 머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실내.

그만한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가마꾼을 보고 있자니 동정이 절로 생기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심지어 너무 긴장한 것 같아.

혹시나 실수해서 가마를 놓친다면 삼족을 멸한다고 협박이라도 받은 것만 같다. 이 추운 지하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거라면 문제가 있는 게 맞다.

‘괜히 미안해지네….’

나는 너무 편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차를 홀짝거리자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영 님.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유노 님.”

“이렇게 오랜만에 이기영 님을 뵙게 돼서 너무나도 기쁘옵니다.”

차를 한 잔 내리며 입을 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너무 오랜만에 만났다는 생각도 든다.

메시지 같은 것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활동하는 범위가 다르다 보니 마주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유노는 실리아의 실질적인 지배자였고 그만큼 많은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지….”

‘우리 지금 휴식하는 거 아니야. 원정 가는 거야.’

얼마나 여기가 편하면 얘가 이런 생각을 하겠어.

“혹시 기억하십니까? 검은색 세계에서….”

사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분 좋으라고 고개 한 번 끄덕여 줘야지.

“이렇게 원정을 함께 떠난 것이 얼마 만인지… 주인, 아니, 이기영 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사옵니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

“아! 그, 그러고 보니 이기영 님.”

“네?”

“듣기로는 아직 은발의 아이의 보호자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단 현성이가 보호자이긴 한데….

“그 아이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고 들었사온데… 혹시 제가 쓰로누스와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되겠습니까?”

“쓰, 쓰, 쓰로의 보호자는 현성이 오빤데… 그, 그치 소라야?”

정하얀이 작게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쓰, 쓰로누스는 검술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현, 현, 현성이 오빠가 맡아야 돼요. 검술뿐만이 아니라 다, 다른 것도 전부 다 가르치고 있어서… 현, 현성이 오빠가 아니면 안 된대요.”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해.

그러고 보면 얘가 쟤를 찢어 죽이려고 난리 쳤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자존감이 높아진 정하얀이 카스가노 유노에게 관심을 꺼버린 것이다.

거의 매일을 붙어 있는 자신과는 다르게 카스가노는 가끔 린델에 들락거리는 외부인이었고, 나와 그다지 접전도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심지어 카스가노 유노는 아기 외신들도 받지 못했으니 세라핌의 보호자 포지션으로 당당히 자리 잡은 자신과는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재미있는 것은 카스가노 유노 역시 정하얀을 무시하고 있었다는 것.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1회 차의 정하얀은 장기 말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

워낙 조용하고 얌전한 그녀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정하얀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가 있었다.

“정하얀 님. 세라 일도 말씀드려야죠.”

“아, 응. 소라야. 그, 그렇지. 오, 오빠 제, 제가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세라 교육 때문에….”

“응.”

“사, 사회성이라는 게 조금 중요하다구 하더라고요.”

그래? 잘 알고 있었네.

“물, 물론 세라가 다른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는 건 알고 있, 있지만 학, 학교에 다니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세, 세라가 조금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그건 차차 생각해 보는 것으로 하자. 이번 원정 끝나고 세라 의견을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

물론 이럴 때면 카스가노 유노는 슬쩍 자리를 피한다. 이상하게 얘한테 미안한 감정이 들어 불편하다.

창문으로 똑똑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바. 다행이다.’

“기영 씨?”

“네. 현성 씨.”

“안은 괜찮으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안에 있기 답답하고 피곤하실 텐데… 잠깐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근데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근처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

상식적으로 여기서 차나 마시고 있는 내가 피곤하겠어. 아니면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피곤하겠어?

가마꾼들, 시바 땀 뻘뻘 흘리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나보고 피곤하냐고 하면 어떻게 해.

“…….”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잠깐 휴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얘들 또 욕 오지게 하겠네. 휴식한다 그러면 캠프 칠 거 아니야.’

단언하건대 여기서 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휴식을 한 번 취할 때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잠깐 쉬고 가겠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김현성.

“네. 공격대장님.”

라고 부관들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표정들이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모험가들의 한숨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엿 같네. 진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젠장. 이게 무슨 개 같은 짓거리인지…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소풍이라도 온 거야? 아직 던전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캠프 설치한다. 빨리빨리 움직여!”

“네. 네.”

‘시바. 이거 내가 왔으면 안 되는 거였나.’

모두가 일류 모험가들이다. 당연히 허드렛일이라고는 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 각 길드와 도시에서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고, 모두의 존경과 선망을 받고 있는 인원들로 구성된 원정대원들이다.

그런 이들이 캠프를 설치하고 바닥을 광나게 닦고 요깃거리를 준비하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특히나 각 집단의 막내들은 발에 불똥이 떨어진 것처럼 뛰어다니는 중.

처형의 할버드라고 불리는 용병은 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바닥에 못질을 하고 있고, 폭염의 마도사라고 불리는 녀석은 불을 지필 준비를 하고 있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커다란 한숨 소리가 나온다.

“제길… 이래서 이 공격대에 배정받기 싫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는 물러서지 않는다.

“바닥에 돌들이 너무 많은 것 같군요.”

“처리하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일을 끝낸 인원들은 모두 바닥에 크고 작은 돌들을 옆쪽으로 옮기는 중.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상상이라도 한 것일까. 물론 바닥에 돌이 있으면 조금 거슬리기는 하다.

“위생상태 철저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처리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기영 씨?”

행복한 것은 가마꾼들밖에 없다. 육체의 한계를 시험했던 가마꾼들은 조심스레 가마를 내려놓은 뒤에 먼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 널브러진다.

왠지 시바 저 멀리서 가마 안쪽을 노려보는 것만 같다.

“나가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방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이 순식간에 완성되어 있다.

슬그머니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역시나 왠지 모르게 나를 원망하는 눈빛이 쏟아지는 것 같다.

이 사달이 난 게 나 때문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것일까. 이 새끼만 안 따라왔어도 이런 개고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느끼는 것일까.

일단은 몸이 안 좋은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그나마 원정대원들의 불만이 사라질 테니까.

긴 원정 때문에 정말로 피곤한 명예추기경,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원정에 참여한 성자.

“기영 씨. 괜찮으십니까? 역시… 몸이 안 좋으신 게….”

“괜찮습니다. 모두가 힘든 상황이니… 최대한 버텨보도록 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없게 웃는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그렇듯 꿋꿋함. 쉬고 있는 원정대를 한 바퀴 돌아 주면서 대원들을 격려하는 것도 필요하다.

김현성 이 새끼가 따라올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황급하게 달려온 정하얀이 김현성을 데려가 버렸다.

저 둘이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그렇게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몇 마디 주고받고 있는 상황, 애써 무시하며 유노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자 편하게 쉬고 있는 원정대원들이 보였다.

“혹시 잠깐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이, 이기영 님.”

정치인들처럼 악수 꽉 해주고, 눈 한 번 마주쳐 주고, 미소 한 번 보여주면서 웃어주고.

기호 1번 이기영입니다. 잊지 마세요.

“대륙을 위해서 이렇게 모여 주시다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어떻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원정 중에 불편하신 일이나 건의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행이군요.”

수고한 가마꾼들한테도 격려의 인사를 해줘야지.

태닝한 것처럼 탄 피부를 가지고 있는 녀석들. 야전 생활을 오래한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쪽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녀석들의 손을 꽉 잡아준다.

“명예추기경님?”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그야 빛의 성자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손을 내밀어 주거든….

“직접 걸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겠군요.”

고급스러운 상자에 들어가 있는 고급 포션 세트. 피로 회복 포션도 아마 들어 있을 거야. 그리고 그거 비싸.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예추기경님… 저희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고되고 힘드신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받아주세요.”

“하지만….”

“제 마음이라 생각하고 꼭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식사 자리에 초대 드리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 그대로 편하게 식사하는 자리니까요.”

“네… 그렇다고 하시면….”

조심스레 다가온 카스가노 유노가 말을 이어왔다.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던 발언이었다.

“이기영 님. 오늘은 예정되어 있는 약속이 있사옵니다.”

응. 나도 알고 있었어. 얘네한테는 그냥 밥 한번 먹자고 인사치레 차 말해본 거야.

“그렇군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네요.”

“저희들에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권해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니요. 꼭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날 때 다시 말씀드려야겠군요.”

“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답 소리 한번 우렁차. 가마도 그렇게 힘차게 들어봐.

꽤나 효과가 좋은 격려와 응원, 나를 노려보던 눈빛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자신들에게 신경 써주고 있다는 기쁨이다.

함께 원정 온 모험가들에 비하면 애매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 떨거지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명예추기경과의 저녁 식사가 눈앞까지 다가왔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확 직원으로 고용해 버려?’

편하기는 하던데….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

“저희들이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명예추기경님. 안전하게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금발 머리. 너 말 참 잘한다.

이래저래 공격대를 수습하고 있는 상황.

저 멀리서 새로운 부관 플로헤타가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사령관님. 제6공격대가 히든 보스 몬스터와 맞닥뜨렸습니다. 습격을 받은 제6공격대는 뒤늦게 진열을 정비했으나 공략은 무위로 돌아갔으며 커다란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자는 많지 않지만… 공격대장인 엘리오스 님께서….”

‘뭐야 그 새끼 죽었어?’

“중상을 입으신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시바, 표정 관리해야지.’

“그… 그런….”

근데… 혜진이는 괜찮구?

*다음 페이지에 선희영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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