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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55화 (94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55화

분위기 (6)

“히든 보스 겔크는 높이가 약 10미터. 아마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 전체를 돌아다니는 로밍형 몬스터로 추정됩니다. 제6공격대가 겔크의 습격을 받은 것은 정확히 1시간 11분 전으로… 6공격대는 진열을 정비해 겔크를 공략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공격대원들을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엘리오스 님께서 중상을 입으셨고, 현재는 세이프존을 만들어 안정을 취하고 계신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혜진이 누님은 무사한 거요?”

“네. 조혜진 님은 무사하십니다.”

‘엘리오스 이 새끼 조혜진 구하려다가 다친 거 아니야? 괜히 오바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괜한 의심이 샘솟기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6공격대가 남긴 영상에서는 쓸데없이 비장한 장면이 흘러나오는 중.

-모두 피하십시오!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니가 뭔데 거기를 맡아.’

-엘리오스 님!

‘혜진이 애절한 표정 봐.’

-제길!

육중한 몸을 가진 거대한 괴물이 공격대 전체를 짓뭉개 버릴 것처럼 돌진한다. 우와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원정대원 한 녀석이 녀석에게 짓눌린다.

생김새는 마치 이전에 봤던 괴물들을 기워 붙인 것 같은 모양새, 전체적으로 징그럽다. 팔이나 다리 같은 신체 일부가 몸 곳곳에 삐져나온 것을 보면….

“던전 내에 있는 다른 몬스터를 흡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플로헤타의 말이 맞다.

“어째서 지금까지 큰 전투가 없었는지 알 것 같군요.”

“네. 제6공격대가 겔크와 마주친 곳은 던전 지하 2층입니다. 현재 제1 공격대가 지하 5층에 진입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겔크가 지하 5층에서 지하 2층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타 몬스터를 흡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 보스몬스터 역시….”

‘보스몬스터까지 처먹었으면 스펙이 오르기는 했겠네.’

“앞서 들어가 있던 레인저들이 겔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뭡니까? 그만한 크기를 숨기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흔적을 지우는 기술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확인되고 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이후에 공격대의 레인저들이 다시 한번 녀석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군요.”

“네.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일 수도 있고, 지하에 있는 다른 보스몬스터의 능력을 흡수한 것일 수도 있다.

[전해야 한다… 전해야… 해….]

-조혜진 님. 피하십시오! 여긴 제가….

[전해야 한다… 전해야….]

-이야아아아!!

[전해야 한다….]

조혜진을 밀친 이후, 자신의 녀석의 영향권 밖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 이 시대 최고의 순정남. 엘리오스.

-엘리오스 님!

하지만 혜진이가 놈의 팔을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녀석 역시 보스몬스터의 일부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순정남 포지션에 서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 슬픈 동물, 무능력자의 순정은 추해 보일 뿐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그건 순정이 아니야. 민폐라구. 시바.’

엘리오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황은 여기서 종료됐을 것이다.

“확인되는 영상은 이게 전부입니다. 겔크의 정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행동을 종합해 분석해 보면 지상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제6공격대에서 보내주신 보고서에 따르면….”

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의 전후 사정을 모르고 있는 이들이야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겠지만, 정황상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가 과거 베니고어가 있었던 장소가 아니었던가.

신전의 규모나 성격, 베니고어의 이상한 행동들을 종합해 추측해 보면 이 지하 신전의 용도는 그녀를 가둬두기 위해서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당연히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임무를 수행했을 테고… 임무를 수행하는 핵심 인물들이 보스몬스터로 변했다는 것이 맞겠지.

겔크는 어쩌면 지상과 지하를 오가는 임무를 맡은 전령이었을지도 모른다.

[전해야… 한다… 전해야 해.]

과거의 행동에 집착하고 있고, 흔적을 지우는 기술을 가지고 있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면 대충 때려 맞혀진다는 거다.

“아마 본대와 마주칠 확률이 높겠군요.”

“네. 사령관님 녀석이 지상으로 향하는 길을 찾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정황상 본대와 마주칠 확률이 높습니다.”

“따로 별동대를 구성해 놈을 토벌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영 씨.”

‘김현성 이 새끼는 무슨 내가 몬스터랑 마주치면 뒤지는 병에 걸렸나.’

“위험부담이 너무 커요. 현성 씨. 아직 정확한 던전의 성격도, 몬스터의 기본적인 스펙마저도 파악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확률은 적지만 사상자가 생기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습니다.”

“제6공격대에게 다시 한번 토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혜지니 다치게 할 일 있어?’

“제6공격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엘리오스 님을 비롯한 중상자들이 아직 회복하지도 않은 시점이에요. 발견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발견하더라도 정상적으로 공략을 진행하기에는 힘들 거라는 게 제 판단이에요. 히든 보스몬스터 겔크는 본대에서 상대합니다. 입구에서 진을 치고 녀석을 기다리겠어요.”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이 새끼는….’

“그게 최선입니다. 별동대를 이끌고 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지금부터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인저들을 먼저 보낸 이후 본대는 뒤따라갑니다. 입구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최대한 빠르게요.”

‘히든 보스고 나발이고 어차피 샌드백이야.’

영상에 나온 게 녀석의 전부라면 던전의 입구에서 튀어나오자마자 샌드백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겔크의 특성은 육중한 몸과 거대한 체중으로 여는 기습에 있었으니까.

정확히 어디서 튀어나올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면 미리 준비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하얀이가 있으면 더욱더 그렇지.’

파란 길드는 기본기가 탄탄하니까.

박덕구를 비롯한 탱커 라인들이 길을 막고 마법으로 두드린다. 쉽게 뚫리지 않는 방패가 버텨준다면 녀석의 거대한 면적은 강점이 아니라 약점이다.

‘미리 함정을 설치할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다면 더욱더 그래.’

스펙은 완벽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애초에 이 정도의 인원과 구성으로 덩치 큰 바보를 상대하지 못한다는 게 우스우니까.

‘게다가 샘플도 확보할 수 있잖아.’

지하 5층에서부터 다른 몬스터들을 흡수하면서 올라왔다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샘플이 들어있을까.

일반 몬스터의 샘플은 물론이거니와 보스몬스터의 샘플 역시 확보할 수 있다.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고, 진청한테 한 방 먹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애초에 그 무능력한 놈이 발견하지 못한 몬스터를 우리 쪽에서 사냥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소리칠 수 있게 되겠지.

변수가 있다면 이쪽이 발이 묶이게 되는 것이다.

‘특수능력을 몇 개나 보유하고 있을까.’

최소 다섯 가지. 타 보스몬스터의 능력까지 사용할 수 있다면 피해가 누적돼 제6공격대처럼 세이프티존에 처박히게 될지도 모른다.

위안으로 삼을 만한 것은 비교적 저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변수에 대해 떠올려 봤지만 변수로 인한 리스크보다는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이기영 님. 곧 입구에 도달할 것 같사옵니다.”

“네.”

스리슬쩍 창문을 여니 이전에 망원경으로 봤던 거대한 문이 눈에 보인다.

실제로 보니 더욱더 압도되는 것 같은 느낌, 예술작품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문.

그리고 거기에 진을 치고 있는 병력들의 모습은 이야깃거리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야전지휘관 몇몇이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었고, 거대한 방패의 벽이 만들어진다.

미리 정해놓은 위치로 이동한 마법사와 사제들은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 간단한 주문이었던 만큼 오차는 없다.

“공격대원들은 상시 전투 준비 상태로 휴식한다.”

“공격대원 전원은 상시 전투 준비 상태로 전투 휴식을 취한다!”

“혹시 포션 못 받은 인원 있나?”

“공격대장님이 각 진영을 방문한다고 말씀하셨다. 준비에 차질이 없게 하도록.”

‘시바 애들이 어련히 잘했을까. 다들 프로들인데. 굳이 직접 방문해서 애들 마음 불편하게 해야겠어?’

상사의 방문을 반기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본대에 속해있는 원정대원들은 병아리들이 아니다.

아까 전에 간신히 잡아놓은 민심이 다시 요동치는 것 같은 느낌, 조금씩 바닥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반가워지는 시점이었다.

“전투 준비!”

“전원 전투 준비한다!”

“전투 준비!”

레인저들이 컨트롤 타워로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컨트롤 타워에서는 각 야전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전달한다.

“기영 씨, 조금 후방에 계시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이미 충분히 후방이야.’

정하얀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 거대한 문이 열리는 순간.

[전해야 한다….]

거대한 화염과 마법이 녀석을 뒤덮었다.

[히든 보스 겔크와 조우했습니다.]

콰아아아아앙!!

[전해야… 전해야….]

콰아아아아아앙!!

화력은 높지만 아군 병력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위주로, 이를테면 마법 화살 같은 것들 말이다.

중간중간에 살상 능력이 높은 마법이 떨어져 자욱한 연기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보조마법사가 외운 바람 마법에 날려 보낸다.

궁수들은 화살을 끊임없이 당기고, 특수 원거리직종들 역시 화력을 쏟아붓는다.

[전… 전해야….]

‘전하긴 뭘 전해. 이 약해빠진 새끼야.’

[전해야….]

“더 퍼부어라! 계속해서 퍼부어! 쉴 틈을 주지 마라!”

쾅!!!

콰아아아앙!!

[으아… 아아… 아아!!]

거대한 손을 휘두르며 천천히 전진하는 녀석.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군 근접직종들이 녀석의 앞을 가로막는다.

박덕구가 메인, 거대한 공간, 육중한 몬스터를 홀로 마크하는 녀석의 뒷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듬직해 보였다.

“방심하지 말고 간격 유지해. 돼지.”

“거, 알고 있다니까!”

녀석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주의하면 돼.

여러 가지 신성 마법들이 박덕구에게 쏟아지고 겔크의 발을 묶기 위한 함정과 마법들이 발동한다.

미리 가져온 대형 몬스터 전용 발리스타까지 쏘아진 상황,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전투는 무난하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물론 변수는 있다. 녀석이 발을 구르자 충격파가 터져 나오고,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들의 주문이 캔슬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들 후위로!”

“마법사들은 후위로!”

[전해야… 전해….]

‘자꾸 뭘 전해. 이 무식한 새끼가.’

[두더지 성녀가… 눈을 감았다는 사실을… 지상에….]

‘…….’

[두더지 성녀가 눈을 감았… 다… 그녀가 숨을 거두… 었다….]

‘뭐?’

[오랜 시간 동안 대륙을 지탱한 두더지 성녀가 숨을 거두… 었….]

“공격 중지.”

[가련하고 불쌍한 두더지 성녀… 희생하는 것만을 강요당한 성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격 중지! 공격 중지! 공격 중지한다!”

[스스로 철의 처녀에 기어들어 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 다. 아아… 대륙이여… 찬란하고… 눈부신 대륙이여… 이제는….]

일단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전령 겔크는 추기경의 명을 받들어라.”

보통 이런 경우에 입을 털어서 잘못된 경우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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