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964화 (95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64화

알타누스 (1)

‘알타누스?’

“…….”

“여러 가지로 준비한 게 많습니다. 지상에서 오신 분들을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모이는 자리니까요. 일단 묵으실 숙소부터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조금 일찍 온 편인가 보군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주일 전에 오신 분들도…. 물론 모든 분이 이 사교회를 그만큼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겠지요. 저희로서는 감사할 뿐입니다. 아! 이곳이 묵으실 방입니다. 따로 맡겨놓으신 짐이 있으신지요. 제가 들어드리도록….”

“없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 새끼 말 더럽게 많네. 진짜. 옆에서 재잘재잘 앞에서 재잘재잘 뒤에서 재잘재잘.’

“아니면 들르고 싶으신 곳이 계신지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지하신전에 혼자 돌아다니시는 건 자제해 주셔야 합니다. 지하신전은 너무 넓어 처음 오신 분들이 곧잘 길을 잃어버리시기도 하니까요. 저도 아직 모르는 지역도 있으니… 어딘가 가고 싶으신 곳이 생기신다면 방문 옆에 붙어 있는 종을 흔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사제님… 제가 식당까지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너랑 수다 떨 상황이 아니라고 시바.’

“많은 신도님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용식당입니다. 지상에 비하면 보잘것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맛 좋은 음식들이 많으니 사제님도 꼭 한번 드셔보셨으면 합니다. 특히나 인기 있는 메뉴는….”

‘좀 꺼져. 이 새끼야. 진짜.’

눈앞에 있는 이 수다쟁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이었다.

‘알타누스? 알타누스? 아까 전에 알타누스 성녀라고 한 거 맞아?’

“아니면 다른 곳을 둘러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멋진 조각상들이 있는 곳입니다. 사제님. 지상에도 이런 조각상들이 많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평소대로였다면 녀석의 장단에 맞춰줬을 것이다. 정황상 템플러 젠이 늙은 망령들을 계승하는 룰을 부여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니,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앞에 있는 놈은 어떻게 봐도 젠의 유년 시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냥 넘기기에는 신경 쓰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눈앞에 있는 제니는 아마도 최후에 남은 4인의 템플러 중 하나겠지.

시기는 템플러 육성 실험 보고서가 쓰이기 전, 템플러들과 두더지 성녀가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전일 것이고….

사교회가 벌어진 시기는 이놈이 아직 병아리 시절이었을 때일 것이다.

제니 역시 실험체일 수도 있지만 지하 신전의 상황을 보고 있자면 전자의 무게를 더 실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템플러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신전의 관리도 잘 되어 있는 상태였으니까.

당연히 호감을 사 놓는 것이 옳다. 미래의 네임드, 성공 길이 훤히 열려있는 엘리트.

아직 정확한 행동 방향을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맨몸으로 들어온 이상 의지할 것이 한 곳 정도는 필요하다.

애초에 놈을 처음 본 순간 그렇게 행동할 거라도 생각했지만….

‘두더지 성녀는 베니고어 아니었어?’

녀석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모든 생각들이 날아가 버렸다.

‘알타누스? 지하에 처박혀 있는 성녀가 알타누스가 맞아?’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아마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교리도, 책도, 기도를 드리는 방식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시대의 주신은 알타누스가 아니다. 어디서 이름 들어 본 적도 없는 개뼈다귀가 지휘봉을 잡고 있다는 거지.

베니고어는 뭐 하고 있는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제님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그 와중에도 눈앞에 있는 놈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정신이 없다.

오랜만에 들어온 바깥사람이 반가운 것일까. 나이대에 맞는 호기심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딱히 그만둘 생각도 없어 보였다.

뭐라도 말해주고 싶지만 말조심을 해야 할 시기.

‘정보 수집부터.’

“혹시….”

“네!”

“혹시 도서관에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후에는 기도회실로 가고 싶습니다만….”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사제님.”

“아니요. 괜찮습니다. 템플러 제니.”

아니나 다를까 조금 민망해하는 모습. 당연한 반응이었다. 애초에 원하고 있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이게 어른이야.’

아직 10대 초중반, 한창 혈기왕성하고 궁금증도 많은 나이다.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살며 수련을 했다고는 하지만 본질을 숨길 수는 없다.

지상에서 온 손님이 무척 신기했을 테고, 여기서 지냈던 만큼 위쪽에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는지도 궁금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이것저것 떠들어댔지만… 지상에서 온 청렴하고 깨끗한 사제 이기영은 신학을 공부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정숙하고, 조용했으며, 언제나 몸가짐에 신경을 쓰고,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워한다.

마치 사제의 모범과도 같은 모습이 아닌가.

오직 신을 위해서만 살아가기로 결심한 성인의 모습은, 재잘재잘 떠드는 앵무새의 입을 닥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과하실 필요도 없고요. 보잘것없는 저를 위해서 신경을 써주셔서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템플러 제니.”

“네… 네!”

‘덜 자란 꼬맹이 하나 가지고 노는 건 일도 아니지.’

“그, 그럼 도서관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제님.”

아까와는 조금 다른 모습, 보통 이 나이대면 동경하는 것들이 하나둘 있게 마련. 녀석이 어떤 유형의 인간을 동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신분이 동경할 수밖에 없는 유형의 인간은 잘 알고 있다.

‘어른 사제지 뭐겠어.’

아까와는 다르게 입을 꾹 닫고 발걸음 하나도 조심하는 모습, 심지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나를 힐끔 힐끔 바라보기까지 한다.

발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조신한 걸음걸이가 그렇게 멋져 보였던 것일까. 들리는 것은 오직 옷과 옷이 스치는 소리밖에는 없다.

심지어 그 사르륵사르륵거리는 소리마저 신성하게 들려오지 않는가.

이 새끼 긴장했자너. 혹시 자신이 폐가 될까 봐. 이 성자의 수행에 방해가 될까 봐 무서워하고 있자너.

조금은 긴장을 풀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템플러 제니.”

“네!!! 사제님!!”

‘시바 시끄럽게.’

“죄, 죄송합니다. 사제님 저도 모르게….”

“괜찮습니다. 템플러 제니.”

또 한 번의 실수로 기가 완전히 죽어버렸다.

“저… 저… 사제님.”

“네?”

“혹… 혹시라도 담당 템플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제가…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혹시라도 사제님께 방해가 될까 봐….”

짧게 웃어주고 한 박자 쉬어주자.

“…….”

“…….”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저는 아직까지 템플러 제니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지만… 템플러 제니의 에너지에 저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그리 자신을 자책할 필요도, 자신을 낮추실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저를 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템플러 제니에게 충분히 감사하고 있답니다.”

“아… 그… 그렇군요.”

“템플러 제니는 지상에서의 삶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네… 부…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부끄러워하실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지하에서의 삶이 궁금하니까요.”

“아!”

“사실은 템플러 제니 같은 분들을, 이 장소에서 지내시는 분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빛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스스로를 가두시고 희생하신 분들 덕분에… 지상은 번영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믿는 분들은 빛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는 하지만 단언하건대 이 지하신전에서 살아가시는 분들이야말로 그분의 오른편에 서 있을 자격이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상에 계신 분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저… 저는….”

“…….”

“저 역시 지상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사제님. 다른 지하 신도님들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지상의 사제님들이 있기 때문에 지하 신전이 유지되고 있는 거라고….”

그야 그렇겠지. 너희들 생활비를 어디서 대주겠어?

“서로 돕고 있는 셈이로군요.”

“네….”

이즈음에서 살짝 웃어주는 것이 맞다. 지하와 지상은 서로 돕고 있고 상생 관계에 있다고, 너와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나는 너한테 지하 신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너는 나한테 지상에 대한 정보를 받아가는 거지.

물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90퍼 센트가 거짓말이겠지만 이 꼬맹이가 뭘 알겠는가. 오히려 진실을 듣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또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녀석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 앞으로 잘 지내 보내자는 뜻으로 받아들였어도 상관은 없다.

원래 서로 친해지고 잘 지내다 보면 이것저것 공유하는 일도 많아지고, 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아도 놈이 이것저것 물어오는 게 많을 수도 있겠지.

비슷한 뉘앙스의 대화를 나누자 누가 봐도 도서관같이 생긴 장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녀석 역시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입을 여는 중, 아마 내 반응을 보기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가 지하 도서관입니다. 사제님.”

“좋은 곳이로군요.”

어마어마하게 넓다. 예상은 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넓다. 5미터는 될 것 같은 높이에 책장에는 온갖 종류의 서적들이 빽빽이 쌓여 있다.

지하신전은 번영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도서관의 규모를 보고서는 더더욱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지하에서 쓰여진 서적들도 있지만….”

“지상에서 내려온 서적들도 많겠군요.”

“기뻐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안 기쁠 리가 있나.’

지금부터 읽어야 되거든. 황정연 같은 초 기억력은 없지만 자료가 이 정도라면 도움이 된다.

“템플러 제니.”

“네?”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고 싶습니다.”

“네?”

책에 파묻혀 지내고 싶다구.

일단 신학 서적부터. 대부분이 신학에 관련된 서적이겠지만 일단은 읽을 수 있을 만큼 읽어두는 것이 좋다.

깊게 읽어볼 서적들과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넘길 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순식간.

보통의 경우에는 얕고 넓은 지식이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는 도움이 된다. 쓸데없이 박식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사교회는 여러 가지 종류의 대화가 오고 갈 테고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 테니까.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논점을 흐리거나 자리를 피하고 부족한 부분은 이빨로 어떻게든 메운다.

전문적인 대화를 나눠야 할 주제를 몇 가지 선별하고 관련 논문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너무 집중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된다.

‘얘는 어디로 갔어?’

템플러 제니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니 커피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요깃거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신 이후에는 다시금 독서에 집중. 물론 내가 원하는 정보들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었다.

‘베니고어는 어디로 간 거지?’

어느 서적에도 베니고어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나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나?’

알타누스가 두더지 성녀라고는 해도, 그 어떤 곳에서도 베니고어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익숙한 인형의 모습이 보인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여자.

“앗, 죄송합니다.”

여전히 멍청하게 들리는 목소리. 이상하게 어눌하게 들리는 말투.

‘베니고어?’

갈색 머리의 시녀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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