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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65화 (95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65화

알타누스 (2)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죄, 죄송합니다.”

“베니고어?”

“네?”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어눌하게 웅얼거린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베니고어라고 발음했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반응으로 여자의 이름이 베니고어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기껏 정리해 가지고 온 서적들의 탑을 무너뜨린 채로 당황하고 있는 모양새, 허둥지둥대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베니고어의 모습 그대로다.

차이점은 머리 색과 옷차림이다. 하얀색과 금빛으로 수놓아진 옷 대신에 자리 잡은 꼬질꼬질 한 시녀복, 항상 빛나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한 갈색으로 변해 있다.

얼굴에 거뭇거뭇 한 것들이 묻어 있었고, 전체적인 행색이 다소 초라해 보인다.

코 근처에는 옅게 주근깨들이 보였고 살은 조금 빠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베니고어가 초월적인 존재답지 못하다는 생각은 평소에 많이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행실뿐이었다.

베니고어의 겉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초월적인 존재였고 신도들의 이상향에 굉장히 가까웠다. 다소 억울하게 생겼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여자와 베니고어의 분위기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가 베니고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자신이 무너뜨린 서적들을 뭔가 해보려고 해보지만 몸을 돌리다 엉덩이로 책의 탑을 무너뜨린다.

“앗!”

깜짝 놀랐는지 몸에 힘을 주다 옆 쪽에 있는 책들을 다시 한번 무너뜨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는 무빙을 선보이고는 결국 뒤로 우당탕 넘어지는 모습.

“꺄악!”

“…….”

“죄송합니다! 사제님! 죄송합니다!”

영락없는 베니고어의 모습이었다.

“이걸 어떻게… 사제님… 제가 정리해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하지 마. 안 봐도 뻔해. 지금부터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안 봐도 비디오라고… 시바.’

“제가….”

‘넌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이 책이 어디에 있었더라?”

“…….”

“콜록! 콜록! 죄송… 콜록! 갑자기 먼지가… 콜록!”

‘나도 기침 나올 것 같아.’

“사제님… 잠, 잠깐 물 좀… 콜록! 콜록!”

‘내 커피 마시지 마. 시바.’

“휴우… 감, 감사합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시끄러운 앵무새 다음에는 사고뭉치가 왔다. 나까지 멍청해지는 느낌에 눈앞에 있는 시녀가 꺼림칙하다.

하지만 얘를 피할 수 있을 리 만무. 일단 확인 과정부터 거치는 게 먼저였다.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제,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제님은 앉아서 계속 독서에….”

“제가 정리할 테니 그대로 놔두셔도 됩니다. 마침 머리를 식히려고 했으니까요.”

“그… 그렇지만….”

“마음이 편치 않으시다면 잠깐 말동무가 되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잠깐 앉아서 말입니다.”

“…….”

“…….”

“혹시 성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제 이름은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최대한 경계심을 줄여주는 게 옳다는 판단이 선다. 베니고어는 겁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항상 그렇듯 미소 지어주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 줘야지.

아니나 다를까 망설이는 얼굴이 보인다. 생전 처음 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깐 긴장했던 것도 잠시. 조금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조용히 펴지기 시작했다.

아니, 펴지는 것으로 모자라 환하게 웃고 있는 듯한 느낌, 실제로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필사적으로 얼굴 근육을 억누르는 듯한 모습이다 보니 살짝은 기괴하게 보일 정도.

“그, 그건… 지금….”

“네?”

“데이트 신청을 하신 건가요? 저… 저한테 작업을 거신 건가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지… 지상 분들은 적극적이시군요.”

‘뭔 소리냐고.’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죄송해요. 아! 같이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 죄송하다는 게 아니라. 제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고… 잘, 잘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몰라서….”

‘얘 진짜.’

“솔직히 얼굴은 제 취향이랑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오, 오해하지는 마세요. 사제님. 못생겼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제 취향이 아니라서… 기본적으로는 예쁘게 생기신 것 같아요. 그… 그런데… 저는 좀… 그런 건 안 좋아하거든요… 그… 뭐랄까… 커다란 도서관에서 독서에 빠져 있는 지적인 모습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도….”

“…….”

“분위기가 마음에 든 달까… 은근히 섹시할지도… 모르겠네.”

‘얘 왜 이래. 시바. 진짜.’

이미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

“사제라는 것도 왠지 모르게 배덕감을… 물, 물론 사제라서 연애를 못 한다는 법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사제는 그런 느낌이 있으니까….”

‘혼잣말하지 마.’

“만약에… 만약에 잘된다면 지상에서 사는 걸까? 아니면 지하에서… 아무래도 지하에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사제님이 몸이 조금 약해 보이시는데… 건강은 괜찮으신 걸까… 한창때에 과부 되기는 싫은데… 지병이라도 앓고 계시다면….”

혼잣말을 하는 모습은 가관, 심지어 그걸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쪽에 실례가 되는 발언을 분당 하나씩 쏟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볼을 꼬집고 싶어진다.

물론 신선한 반응처럼 보이기는 했다. 베니고어가 이렇게 연애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 위에 있을 때야 신이었지 지금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던가.

얘 나름대로 꿈꾸던 판타지도 있었을 거고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로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정보가 너무 과했다는 것.

‘과부는 개뿔….’

“좋… 좋아요. 사제님.”

생각의 정리를 마친 듯 수줍은 모습으로 무장한 얼굴이 가증스러워 보인다.

이미 혼잣말로 여러 가지 계산을 끝난 걸 목도한 직후다.

사교회에 초대된 사제라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분명하다는 둥, 그렇게까지 약해 보이지 않다거나… 심지어 시험 삼아 잠깐 즐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모두 들었다.

그런 주제에 갑작스레 순진한 척 얼굴을 붉히고 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얇아졌고 정체불명의 애교까지 묻어 있는 것처럼 들린다.

‘나도 너 별로야.’

베니고어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불가능하다.

‘나도 너 별로라고….’

지금 당장 부인하고 무안을 주고 싶은 심정, 하지만 그게 효과적이지 않다.

오해가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가까워지기에는 충분한 소재였으니까. 대충 기쁘다는 미소를 지어주자 위풍당당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진짜야?’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치명적인 면모가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본인이 느끼기에 가장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매혹은커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는 지하세계에서 일하는 시녀고… 여러 가지 업무들을 담당하고 있어요. 신도님들의 편의를 위해서요. 취미는 산책이고…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답니다. 사제님은 이번에 사교회에 초대되신 분이시겠죠? 아! 그리고 특기는… 특기는….”

‘특기 없어? 그리고 요즘 누가 소개팅할 때 취미랑 특기를 자기소개로 이야기해?’

“저는 이기영입니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이번 사교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상에서 내려왔습니다. 네제스카 공국에서….”

“네. 들어본 적 있어요! 네제스카 공국!”

딱 적당한 신분이었다. 외진 곳에 자리한 공국의 사제.

한차례 전란이 끝난 이후에 한창 복구에 신경 쓰고 있는 지역, 전란이 터진 이후이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위해 방랑사제들이 많이 찾아가는 지역이기도 했다.

지상에서도 소외되어 있는 지역에서 포교 활동에 힘쓰고 있는 사제라면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을까.

“방랑사제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어째서 제게 이런 연이 닿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훌륭한 일을 하시니 초대받으신 거겠죠, 많은 분들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시는 활동을 하시니까요. 기뻐하셔도 좋아요. 이건 가산점이거든요.”

‘가산점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세요. 그리고 윙크하지 마시고요. 진짜.’

“하하… 다행이군요.”

“책을 이렇게 좋아하시니 취미는 독서시겠네요. 이렇게 쌓아놓고 독서에 열중하시는 사제님을 뵙는 건 처음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는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듣지 못했다.

“잠깐 죄송합니다만….”

“네. 사제님.”

“혹시 성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지상 사제님은 모르시겠군요.”

“네?”

“저희는 따로 이름이 없어요.”

‘그건 또 뭔 소리야.’

“저희들은 수행자라는 의미로… 또 신께 봉사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의미로 아텐타라고 불리고 있어요. 숭고한 사명이죠. 저희밖에 못 하는 일이니까요.”

곧바로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

‘진짜야.’

정말로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다.

어처구니없어서 내가 말문이 막힐 지경, 본래 대륙 인권은 바닥이었지만 이 정도까지 막장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노예도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신께 봉사하기 위해 태어났어? 도대체 뭘 수행해?

물론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 여자가 뭐라고 불리든지, 현 대륙의 인권이 어떤지는 엄밀히 말하면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내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다.

‘단순한 초대장이 아니야.’

그냥 던전 공략을 위해 초대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걸리는 것이 많다.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베니고어도,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은 다른 윗놈들도….

물론 이것 역시 던전 공략의 연장선이겠지만… 이 초대장의 목적은 네임드 보스의 정보를 따는 것 같은 시시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베니고어.”

“네? 베니고어가 뭔가요? 그러고 보니 아까도 베니고어라고….”

“베니고어 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나는 남은 퍼즐 조각을 맞추기 위해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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