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67화
알타누스 (4)
[군사님.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즈음이면 아마 저는 이곳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운 이런 시기에 자리를 비우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군사님에게 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믿음직스러운 동료,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호적수. 아니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간 제 행동 때문에 개인적으로 섭섭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모두 군사님을 성장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말이에요.]
[제가 군사님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 이유는 당연히 작은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빛의 성자, 대륙의 중심이 자리를 비운 시점, 가혹한 운명에 맞서 싸워야 하는 빛의 성자를 대신해 누군가는 원정대를 책임져야 합니다.]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습니다. 군사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그 누구보다도 제가 잘 실감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부담감에 짓눌리지 마세요. 혜진 씨와 함께라면 군사님은 이 힘든 시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힘드시겠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제가 다 매뉴얼을 적어 놓았답니다. 물론 군사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에요. 군사님이라면 잘 헤쳐나갈 수 있으시겠죠. 하지만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당장 제가 과거로 향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니 발등에 불똥 떨어진 것처럼 움직여야 할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뭘 할 수 있는지, 공적치를 얼마나 쌓을 수 있을지는 군사님이 제일 잘 알거야. 저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게 많아요. 내가 과거에서 한 행동들이 나비효과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단순한 이벤트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봅니다. 어쩌면 작은 실험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꼼꼼히 움직여 주세요.]
[휘둘리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군사님이 제게 협력해야 공적치에서 비벼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굳이 군사님이 아니더라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배짱부려보려면 배짱부려보시든가. 마지막으로 동봉된 편지에 여러 가지가 적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매뉴얼이나 제가 알고 있는 던전의 정보들이요. 자존심 때문에 태울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다른 지휘관들한테도 이미 전해 놓은 내용이니까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우리 그림자 영웅 파이팅!]
‘개자식.’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편지였다.
장난스럽게 웃어넘길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녀석이 떠난 뒤, 원정대는 말 그대로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버렸으니까.
원활하게 원정을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게 가장 적절하리라.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아니, 아직도 몇몇 공격대는 완전히 마비 상태에 돌입했다.
가장 중심을 잡아줘야 할 본대는 원정 잠정 중단을 선포하고 녀석이 사라진 자리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고, 수많은 마법사와 마도사들이 그 자리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아이템으로 과거로 향했다는 것도 황당했지만 그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원정대의 대응이다.
‘병신들만 모아놓은 건가.’
과거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단다.
대륙에 내로라하는 연구자들과 마법사들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연구를 위해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가 생각하기에도 쓸데없는 연구였고, 무의미한 연구였다.
녀석을 따라다니는 그 미친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야 한다.
말하자면 원정대의 고급 인력들이 모두 그 쓸데없는 일에 투입되어 있다는 것.
제대로 된 공략이 진행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던전의 난이도는 점차적으로 올라가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 보급은 밀려 있었고, 제대로 된 소식도 전해오지 않는다.
지휘본부에서는 제1공격대를 비롯한 나머지 공격대의 회군을 종용하고 있었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원을 끊어버리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회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영웅 등급의 히든 퀘스트 과거로부터 온 경고를 발견했습니다.]
“도대체 이 멍청이는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자동으로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이쪽으로 관심을 돌려야 했으니까.
‘블러핑은 아닌 모양이군.’
퀘스트 보상으로 떨어진 포션 컬렉션은 놈의 것이 확실했다. 공화국에서도 이미 유통되고 있었고 실제로 시장 자체를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품질에는 이상이 없는 모습.
포션의 질이 좋다기보다는 퀘스트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다.
녀석이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시점에서 나온 확실한 증거.
이기영은 현재 과거에 있다. 자신과 같은 장소에서 퀘스트가 완료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군사님.”
“…….”
“군사님.”
“네. 듣고 있습니다.”
“지휘본부에서 회군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원정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고… 라파엘 님을 비롯한 다른 공격대원들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도서관 사서장에게서 나온 성과 중, 특별히 보고할 만한 아이템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던전에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장 돌로레스에게서 나온 아이템은 마법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주문 서적 3권과 사제 전용 액세서리를 비롯한 몇몇 아이템들이 전부입니다.”
“…….”
“지휘본부에는 뭐라고 전달하는 게….”
“이기영… 아니, 파란 부길드마스터의 흔적을 찾았다고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네?”
“일단 그렇게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후에는 공헌도가 높은 순으로 아이템을 분배하도록 해주십시오. 아직 분배를 받지 못한 길드를 최우선적으로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군사님.”
전체적인 포인트는 아직 이쪽이 앞서고 있다. 하지만 언제든지 뒤집힐 여지는 있다. 그게 놈의 방식이었으니까.
언제나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허를 찌른다. 물론 블러핑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 개자식을 과소평가 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쪽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이 던전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던전이 확실하다면 말이다.
대표적으로는 던전의 정보, 이를테면 보스 몬스터의 능력이나 던전의 지도 같은 것들을 방금과 같은 방식으로 전해올 수도 있겠지.
어쩌면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주요 인물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공략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본인의 공헌도를 포인트로 정산하려고 할 것이다.
‘나쁘지는 않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놈을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공략의 주체는 이쪽이었으니까. 물론 이 게임과는 별개로 고민해야 할 부분도 존재했다.
‘굳이 향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나?’
간단한 문제였다. 전령 겔크에게 받은 초대장을 곧바로 사용했다는 것. 구태여 위험부담을 떠안았다는 것.
놈은 이기적인 개자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영의 선택에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본다는 눈먼 무녀에게 미래를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
놈은 지독히 쓰레기지만 자기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으니까.
‘멍청한 놈과 무식한 놈. 마지막으로 그 미친 여자가 죽기라도 하나 보군.’
아마 자신 역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원정대가 괴멸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으니까.
갑작스레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연계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현재로부터 와야 할 답장-영웅등급]
[당신은 과거로부터 온 경고를 전달받았습니다. 눈앞에 닥쳐온 위협은 악몽과도 같았겠지만 저는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이 그 역경을 이겨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당신이 위협을 이겨냈다는 증거가 있다면 그것을 같은 장소에 내려놓으십시오. 부디 당신이 이 역경을 잘 이겨내셨기를 기도합니다.]
“확인 작업인가.”
녀석은 자신이 퀘스트를 발견했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과거와 지금 사이에 몇 백, 아니, 몇 만 년이나 공백이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이 퀘스트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을 테니까.
만약 다른 누군가가 이 퀘스트를 발견했다면 미래가 변할 여지가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겠지.
녀석은 나비효과가 일어나는 것을 불안해하고 있다.
미래가 이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저 웃기지도 않은 말투, 그리고 위협, 역경이니, 악몽이니 모호하게 처리한 것 역시 그런 연유였다.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부르셨습니까. 군사님.”
“도서관 사서장 돌로레스에게서 나온 성과를 이쪽으로 가지고 와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사서장 돌로레스에게서 나온 아이템들이 아마 녀석이 말하는 증거일 터.
“그리고 군사님.”
“네. 말씀하십시오.”
“파란 길드마스터가 이쪽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쓰레기 같은 놈.’
그동안 보급을 요청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개자식.
곧바로 이곳으로 온다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
한발 느린 지휘본부의 행태에 피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때만 속도를 내고 있는 모습은 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후우….”
“그리고 말씀하신 성과들입니다. 혹시 필요하실까 싶어 돌로레스에게서 나온 다른 아이템들 역시 가지고 왔습니다. 분배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후 분배하겠다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
[영웅 등급의 연계 퀘스트 현재로부터 와야 할 답장이 완료됩니다.]
[퀘스트 아이템을 제출했습니다.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연계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기도실로-영웅 등급]
[기도실로 향해 주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쉬워질 것이다. 연계 퀘스트라고 이름 붙인 이상, 첫 번째 퀘스트를 수락한 당사자 외에는 퀘스트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
꼼꼼한 녀석이니만큼 몇 가지 확인 작업을 더 거치겠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조용히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파란 길드마스터. 이쪽입니다.”
“기영 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저도 자세히는… 아마 군사님께서 제대로 알고 계실 겁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녀석이 이곳으로 당도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군.”
“…….”
“…….”
“기영 씨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들었습니다.”
“그 눈먼 무녀의 말이 맞다. 녀석은 지금 과거에 있다. 정확히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서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녀석이 과거로부터 메시지를 보냈다. 도서관 바닥에 묻어 있었던 포션이지. 꼼꼼하게 시약처리까지 해 놓았더군, 놈이 퀘스트를 남겼고 나는 거기에 응했을 뿐이다. 네놈이 그 장소에서 헛짓거리하는 동안 말이다.”
가져가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냉큼 포션에 손을 뻗는다.
‘무례한 놈.’
“…….”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까?”
“퀘스트의 이름은 과거로부터 온 경고였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군. 그 이후에는 연계 퀘스트가 있었다. 이 층의 네임드 몬스터, 사서장 돌로레스에게서 나온 성과를 바치라는 내용이었고… 그 이후에는 기도실로 향하라고 하더군. 아마….”
“아마도 저를 인도하시고 계시는 거군요.”
“정황상 원정대가 향해야 할 곳을 짚어주는 것일 확률이 높지. 녀석은 위험한 상태가 아니다. 전령 겔크에게서 나온 아이템 역시 사교회 초대장이었으니 최소한 이곳보다는 환경이 좋다고 해도….”
‘듣지 않고 있군.’
“아무튼 간에 네가 걱정할 이유는 없다는 거다.”
여전히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빤히 포션을 바라보는 것에 여념이 없다.
이윽고 도착한 원정대의 연구진들이 포션을 회수하기 시작, 실제로 과거에서 온 물건이 맞는지에 대한 확인 작업을 거치게 될 것이다.
녀석의 입에서 개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금부터 제가 직접 원정대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개소리.”
“…….”
“지휘권은 나에게 있다. 그게 그 개자식… 아니, 사령관의 뜻이었지. 조혜진이라는 여자와 함께 말이다. 네놈은 자격이 없다. 이미 좌천당한 놈에게 다시 원정대의 명운을 맡길 수 있을 것 같나.”
‘힘만 센 멍청한 자식이.’
녀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자식.’
여러 가지로 복잡해질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했다.
이 개자식이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지는 못할 테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정대의 분열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테니까.
사실상 원정대를 지원하는 보급 물품들은 대부분이 파란 길드와 교황청에서 나오고 있었고 엄밀히 말하면 이쪽은 외부인이었다.
놈과 다른 놈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협조하지 않는다고 한들, 이쪽에서 막을 권리는 없다.
명령불복종으로 페널티를 준다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소리. 저 자식은 군법의 위에 있는 녀석이었다.
결국에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네놈은 다른 할 일이 있지 않나.”
“무슨 일을 말하는 겁니까.”
거짓말이었다.
“사교회 초대장은 한 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한 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