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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70화 (96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70화

알타누스 (7)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제님.”

“…….”

“사제님이 아니었다면….”

“템플러 제니.”

“네?”

“폐를 끼친 것은 접니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다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제가 조금 더 템플러 제니에 대해서 생각했더라면….”

애초에 템플러 제니가 있는 자리에서 신탁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변명거리는 있다. 지하신전의 정확한 세력 구도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으니 드락타리스가 템플러 제니를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을 리 만무.

템플러 제니가 이번 일에 휘말릴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이쪽의 실수였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

“…….”

‘꼬맹이 하나 가지고 노는 건 일도 아니라니까.’

당연히 내 입장에선 녀석에게 빚을 만들어놓는 게 좋다. 녀석은 꼬맹이였지만 제법 강한 꼬맹이였고 미래의 떡상이 예정되어 있는 안전 주였으니까. 이런 종목은 기회가 보이면 바로 사 두는 게 옳다.

지금 녀석에게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제님이 갑자기 신탁을 받았단다. 형용할 수 없는 빛에 휩싸여 대륙의 위협에 관련된 신탁을 받은 비운의 사제.

어쩌면 이 사제는 거대한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가혹한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만 해도 일단 이 나이대 꼬맹이들이 환장할 소재다.

‘근데 목숨까지 구해줬자너.’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배를 타게 된 것이다. 물론 당장 녀석이 부여받은 역할은 없다.

불어오는 거대한 바람 속에서 현재의 녀석은 하위 템플러에 불과했고 놈의 역할은 그저 입을 닫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본래 사제라는 족속들은 이런 것에 대해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신의 인도라든가, 운명이라든가, 루키페르 님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다든가.

당연히 어린 나이일수록 흔들리기 쉽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 사제님과 자신이 만난 것은 신의 인도라고, 가혹한 위협에 맞서야 하는 이 사제님을 지키고 보좌하는 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또 다른 신탁이라고, 말이다.

“사제님 잘못이 아닙니다. 사제님께서는….”

‘그래. 경황이 없었지. 발작을 일으킬 만큼 상태도 안 좋았고 말이야.’

“사제님도… 힘드셨을 텐데….”

살짝 웃어주자.

“어떻게 저 혼자만 힘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네.”

“템플러 제니도, 대주교님도 모두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드락타리스 님이 보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템플러 제니를 위협한 행동은… 분명히 잘못됐지만… 서로 간의 입장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 제 잘못이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

“…….”

녀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말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반박하기 어렵다고 느꼈는지 어색한 웃음을 드러내는 것이 보인다.

이후에는 생각에 잠긴 얼굴, 다시 한번 어색한 표정으로 놈은 말을 이었다.

“저… 사제님.”

“네?”

“대륙은… 대륙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건….”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소 무례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위화감은 없다. 이미 우린 베스트 프렌드였으니까.

“그건… 템플러 제니가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른바, 어른을 믿어라. 포지션.

“물론 여러 가지로 걱정되시겠지만 지하신전에는 훌륭한 사제님과 템플러님들이 계시니까요.”

“네?”

“템플러 제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조금 더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아….”

너는 괜찮다. 이런 건 어른들에게 맡겨라. 포지션.

자칫하면 반감을 살 수도 있다. 이 사제님은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구나. 라는 스탠드로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녀석에게는 생소한 느낌일 것이다. 누가 녀석에게 이런 말을 해줬겠는가.

눈을 뜨자마자 루키페르의 종으로 태어나 어른이 되기를 강요한 지하신전.

강해지기 위해서, 루키페르를 위해서 자신을 바친 것이 녀석의 삶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즐기라니, 단언하건대 이런 말을 지껄인 사람은 나 이외에 없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녀석이 어른 사제를 동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생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람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하는 얼굴이 눈에 띈다.

“저… 저도… 도움이….”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템플러 제니. 하지만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습니다.”

“…….”

“언젠가 루키페르 님께서 템플러 제니를 긴히 쓰실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 겁니다.”

“사제님….”

“더욱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우세요. 루키페르 님께서 템플러 제니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세상은 넓고 아름답고, 아주 광활하답니다. 작은 것에서도 배울 것이 존재하고… 새롭고 새로우며 또 새로운 곳이에요.”

“…….”

‘이때는 알지 못했다. 사제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라는 전개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

재미있게도 녀석은 정말로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래에 대한 힌트를 살짝 던져주기는 했지만 사제님이 주는 따뜻함과 받아본 적 없는 위로에 취한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번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은 당연지사. 녀석은 조금은 쑥스러워하고 있었지만 굳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물론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녀석은 지금 임무 수행 중이었으니까.

“아! 사, 사제님. 움직이실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네. 예복은 드락타리스 대주교님께서 준비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교회장 대기실에서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입장 순서는 다섯 번째입니다.”

“네? 어째서….”

“아마도 대주교님께서 배려해 주신 듯하여….”

이래서 줄을 잘 서야 돼.

“제가 모시겠습니다. 사제님.”

“잘 부탁드립니다. 템플러 제니.”

“네!”

진짜 이래서 줄을 잘 서야 된다니까.

‘원래는 입장 순서는 개뿔 그런 것도 없었자너.’

정확히 말하면 엑스트라 포지션에 있었다.

소개받고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와 있어야 되는 포지션 말이다.

주목을 받을 수도 없고, 입장하는 이들을 선망하는 표정으로 바라봐야 하는 포지션.

물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방랑 사제에게 잘 어울리는 포지션이기는 했다. 사실상 초대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워해야 했고…. 이곳은 지상에서 온 스폰서들을 위한 자리였으니까.

지하에 자원을 원조하고 있는 권력자, 특별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강자나 유서 깊은 귀족이나 왕족, 같은 사회 주류층들을 위한 자리.

아무 힘없는 방랑 사제나, 대륙민들에게 존경받는 철학자, 지식인 같은 놈들이야 구색 맞추기로 딸려온 이들이다.

당연히 입장 순서를 배정받는 경우는 전자, 떨거지들 같은 경우에는 따로 소개해 주지도 않고 사교회의 인원수를 채워주는 역할을 맡는다. 고위 관료들과 대화하기도 쉽지 않고 말이다.

‘드락타리스 형 생각보다 파워 있나 봐.’

게다가.

‘예복도 괜찮네.’

지나치게 화려한 느낌이 없는 게 마음에 든다. 광대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정숙한 사제를 위해 마련된 예복 같지 않은가.

물론 가지고 온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시대에 트렌드에 맞춰야 하는 것이 옳다.

준비하고 있는 아텐타들이 조용히 이쪽에 달라붙었고, 예복을 갈아입혀 주는 중.

물론 어색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대접이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기는 하지만, 누군가 시중을 들어주는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한 모션을 취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지. 방랑 사제 이기영은 사실 귀한 집 자제라는 설정이 붙어 있었으니까.

여기 있는 아텐타들과 호위들이 드락타리스의 눈과 귀가 되어준다는 게 확실한 이상 설정 충돌은 없어야 한다.

“드락타리스 님께서는….”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사제님.”

현재까지 녀석의 단점은 빨리 뒈지지 않는다는 것밖에 없다.

‘더럽게 질기네 진짜.’

원정대가 녀석과 마주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거의 하루 동안 기도실 공략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클리어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는 중.

공략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답답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기영 사제님. 준비는 전부 되셨습니까?”

“네.”

예복을 갖춘 이후에는 바깥에 나가 대기실에 들어선다. 당연히 질긴 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드락타리스 대주교님.”

일단 인사부터 해주고.

물론 이기영은 이런 상황을 별로 바라지는 않았지만 호의에는 감사를 하는 게 맞으니까.

“제가 부담스럽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래. 부담스럽게 했어. 네가 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느껴져서 말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주교님.”

신탁을 받은 사제가 있다는 건 이미 지하신전 내에 퍼져 있다.

정확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말이 나오고 있지 않지만 조만간 드락타리스가 입장발표를 하겠지.

녀석이 나를 내세운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계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권력과 명분을 주는 수단이 어디 있을까.

놈은 부패한 성직자가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 수단에 집착할 여지가 있다.

녀석은 나를 수단으로 이용하고, 이쪽은 뒷배를 얻어서 좋고.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놈은 신탁의 사제가 자신의 편이라는 걸 알리고, 나는….

‘사교회의 주인공이 되는 거지.’

“드락타리스 대주교님과 방랑 사제 이기영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눈앞에 들어온다. 시선은 정중앙에, 수많은 갤러리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이미 소문이 돌았는지 귓속말을 주고받는 이들, 이쪽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보는 녀석들도 눈에 띈다.

당연히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루키페르 님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신앙이 깊을까. 방랑 사제의 신분으로 지하 사교회에 초대됐으니 그 행실이 바르고 사제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라는 종류의 이미지.

당연하지만 이기영은 갤러리들의 이미지를 배신하지 않는다.

눈 안에 가득 담은 신앙심, 몸에서 신성력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걸음걸이. 많은 사연을 품은 것 같은 표정, 그리고… 루키페르 님과 알타누스 성녀님에 대한 존경과 죄스러움.

대륙에서 빛의 성자라고 불렸던 몸이다.

어떻게 갤러리들을 홀려야 하는지 본능적인 움직임이 장착되어 있다.

시선이 느껴진다.

‘더 봐. 더 봐줘.’

드락타리스 대주교는 이미 들러리로 전직한 지 오래. 할 말을 잃은 듯한 침묵이 좌중을 뒤덮는다.

‘내가 바로 시바 빛의 성자라구.’

“루키페….”

‘내가 바로 희생과 부활의 신이라니까.’

“루키페르시여….”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날개까지 꺼내고 싶다. 진짜 날개 꺼내면 여기 있는 놈들 절반 정도가 무릎 꿇고 조아릴 텐데.

‘나머지 절반은 시바 피 빨려고 해서 문제지.’

너무 오바하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첫 등장에 이 정도 임팩트는 뽑아 줘야 하니까. 은은한 빛 정도는 뿜어주자.

다시 한번 시선이 쏟아진다. 당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주인공이야.’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쏟아질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은 시점. 누가 뭐래도 사교회의 주인공은 이기영이었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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