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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71화 (96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71화

알타누스 (8)

“마법후작 클라킨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래, 어디 마음껏 입장해 봐.’

“델리하 제국의 황녀님과 철벽의 기사 레엔 부르크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어차피 너희들 다 들러리니까.

황녀고 왕녀고 나발이고 전부 다 입장해 보라니까.

이번 사교회는 이기영이 씹어 먹었죠. 등장부터 임팩트가 다르죠?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로 치장한 황녀와 제법 말끔하게 생긴 기사가 함께 사교회장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차피 들러리에 불과했다.

예의상 새로 들어온 이들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갤러리들에 머릿속에는 빛의 성자가 각인된 이후.

황녀보다 기품 있고, 기사보다 분위기 있는 희생과 부활의 신.

내가 저들보다 중요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누가 봐도 저들이 더 화려하고 대륙을 이끌어나가는 인재들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타이틀이 전부는 아니다.

‘서로를 알아가는 자리자너.’

델리아 제국의 황녀, 철벽의 기사 어쩌구, 귀족 가문의 누구, 대단한 놈들이야 많았지만 이미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들이다.

물론 지하신전의 신도들에게 처음 소개받는다는 입장은 같지만 이쪽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방랑 사제가 드락타리스 대주교와 함께 입장한 것으로 모자라 좌중을 휘어잡았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기품 있는 몸가짐과 행동거지.

드락타리스가 느낀 궁금증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다.

‘이래서 사람이 배워야 돼.’

귀족 예법, 왕족 예법, 명예추기경으로서의 몸가짐이 몸에 배어 있자너.

시대가 시대인 만큼 예법이라는 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런 점들이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시켰을 확률이 높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고, 배운 새끼는 배운 새끼를 알아본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처럼 보여도 배운 새끼 눈에는 보이는 것이 많다.

모두가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일까. 도대체 누구일까.

그에 대한 관심은 최소한 마법후작 어쩌구보다 내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기영 사제님.”

“네. 처음 뵙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물론 다른 놈들을 중심으로도 집단이 형성되어 있기는 하다.

“하하하. 그렇군요.”

“루키페르 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하하하하하.”

하지만 그 집단마저도 들러리에 불과하다.

‘원래 집단이랑 집단이랑 뭉쳤을 때는 더 시끄러운 쪽이 이기는 거자너.’

경박스럽게 소리 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독 화목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집단을 보면 나도 막 끼고 싶어지고 그렇자너.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시선이 가고 막 그런단 말이야.

여기서 화목한 집단이라는 건 빛의 성자가 속해 있는 집단이다.

학식 있고 똑똑한 놈들이 모여 있는 곳. 어려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잔잔한 웃음을 찾아내는 화법은 귀족들과 어울리며 질리도록 해본 것들이다.

명망 높은 사제들에게는 루키페르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자존심이 높은 고고한 귀족들에게는 그들의 가문을 칭송하고 축복한다.

자존심이 센 다른 귀족 놈들이 하지 않을 칭찬을 내가 대신해 준다. 오히려 다가올 수 있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더욱더 사람들이 몰려든다.

한 놈이 다른 놈을 부르고 그놈이 또 다른 놈을 불러오는 피라미드 구조.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사제님.”

“영광이로군요.”

“바한 주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응, 떨거지.’

“반갑습니다. 바한 주교님. 대주교님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군요. 드락타리스 대주교님께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제님… 하하….”

떨거지들이 몇몇 섞여 있기는 했지만 이런 떨거지들이 중요한 놈들을 불러준다.

“그러고 보니 개인 기도실에서 찬란한 빛이 퍼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시 소문의 주인공이….”

“…….”

“이기영 사제님께서….”

“부족하지만 루키페르 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허허… 정말이었군… 이게 얼마 만인지.”

심지어 축복까지 받았으니까 말 다 했지.

파티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싸움은 계속되는 중.

물론 이런 것들이 사제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저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교회를 찾아온 스폰서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으니까.

반대로 스폰서들은 이런 영역싸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원래 저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놈들 천지니까.

그 증거로 아까부터 황녀가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자존심 때문에 먼저 말을 걸어오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 쟤도 내가 누군지 궁금할 거야.

누군데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 있는 건지, 도대체 왜 저기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건지 엄청 궁금할 거라고.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도대체 어째서입니까!”

“…….”

“…….”

이벤트였다.

‘이런 이벤트 뜬 게 얼마 만이더라.’

사교회장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이벤트, 가끔 문제 있는 놈들이 등장해 문제를 일으키는 이벤트.

사교회에 들락거리던 이쪽도 많이 겪어보지 못한 이벤트였다.

종류는 많다. 전형적인 사례는 레이디에게 행패를 부리는 안하무인 쓰레기, 술에 취해 인사불성 날뛰는 개자식.

온갖 놈들이 모이는 장소다 보니 하나둘쯤 사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호위병들이 사전에 문제를 차단하는 게 원칙이기는 하지만, 사고를 치는 놈들의 신분이나 무력 때문에 보통 집단 내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보통 이런 종류의 이벤트를 해결하는 놈이 당일 사교회의 주인공이 될 확률이 높다.

‘때마침 타이밍도 좋네.’

선남선녀들이 막 손잡고 사교댄스 추려고 하는 타이밍인데. 나는 그거 못 하자너.

유력가에서 온 귀족들도 조금은 아쉽다는 표정, 다른 사람들한테 춤추는 거 보여주는 낙으로 살아가는 놈들도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지원해 주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지하신전에서 지원해 주시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템플러나 성기사단을 함부로 파견할 수는 없습니다. 근거가 부족하단 말입니다. 근거가!”

“근거라면 차고 넘칩니다. 협회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읽어 주십시오. 이미 수백 번도 더 보낸 보고서를….”

“1년 전에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얼마나 천문학적인 자원이 소모됐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보고서만 보낸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에요. 무턱대고 파견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모두가…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쯧….”

“여러분.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술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적당히 하세요.”

“모두 힘을 모아….”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다투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지원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지하신전이 가지고 있는 무력집단의 도움을 요청한 것 같았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당히 중재하는 게 베스트,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교계 하이에나들이 중재하려고 하지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만 좀 하세요! 메텔!”

이쪽은 조금 다른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희귀 등급의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발작 일으키듯이 발광하세요.(0/1)]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0/1)]

눈이 마주쳤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아무도 당신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당신 말에 관심도 없고, 문제라고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거든, 애초에 지하신전이 유지되게 만들어준 스폰서들을 위한 자리예요. 자원 좀 달라고 한들 퍽이나 알아듣겠어요?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세요. 제가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0/1)]

주변을 둘러본다.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확인하는 것만 같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위협이라는 게 뭔지, 또 적당한 해결 방법이 뭐가 있는지, 두 번 말하지 않을게요. 아쉬운 건 제가 아닙니다. 발작 일으키듯이 발광해 주세요.(0/1)]

나는 아쉬울 게 없고 저쪽은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내 말을 들어!”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발광하고 있는 사람 한 명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 이곳에서 사교 파티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야!”

어느 정도는 진심이 섞인 것 같기는 하다.

“진정하세요! 메텔!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어째서 믿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째서!”

“도와주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더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온 이후에… 우리도 여러 가지로 고려하고 있는 사안이 많습니다. 여기서 이러는 것보다는 마탑과 이야기를….”

아마 마탑도 똑같았겠지. 지상에서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지하 신전으로 찾아온 것이다.

정황상 쟤도 초대장을 받은 사람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알타누스 성녀님에게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알타누스 성녀님을 뵙게 해주세요!”

“체통을 지키세요!”

“대륙이 위험합니다! 여러분!”

“메텔 님을 모시거라!”

“이거 놓으세요!”

[제가 번쩍이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죠? 그 정도 눈치는 있을 거라고 믿을게.(0/1)]

상황이 막장으로 치닫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교회 하이에나들도 딱히 방법이 없다 느끼고 있는지 뒷짐 지고 바라보고 있었고, 호위병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주인공은 이쯤 등장하는 것이 옳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갤러리들이 길을 비켜주자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상황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성을 내고 있는 여자, 그리고 그녀와 대립하고 있는 이들.

“길을 비켜주세요.”

목소리에 힘을 싣고 조용히 빛을 뿜어낸다.

신성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그 빛은 여자를 뒤덮는다.

내 입으로 말하기 입 아프지만 욜라 찬란한 빛이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 빛.

그 빛의 영향을 받은 여자의 눈이 천천히 감기고 있다. 마치 진정제처럼 그녀를 안정시키기 시작한다.

물론 그런 효과는 없다. 아무래도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네.

천천히 허물어진 그녀를 안아 든 것은 그 이후.

다시 한번 침묵이 뻗어 나간다. 드락타리스는 물론이거니와 지하신전을 후원해 주시는 우리 스폰서분들도 상당히 놀랐다는 얼굴.

방금 목도한 찬란한 빛에 취한 표정이었다.

“쉴 곳을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잠깐 그녀를 돌보겠습니다.”

첫날이 날아가지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박수 칠 때 떠나는 게 더 아름다울 것이다.

방금 일어난 일은 오늘 하루 종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테고… 결과적으로 내일의 나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는 이쪽.

나는 훌륭히 연기를 마친 여배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균열 때문이죠?(0/1)]

눈앞에 있는 여자는 막스의 창조주, 영혼결혼식의 주인공, 균열 수호자 메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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