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972화 (96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72화

알타누스 (9)

깜짝 놀란 것 같은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금발에 긴 머리, 눈에 띄게 긴 속눈썹, 균열랜드에서 동상으로 봤었던 모습과 완전히 같은 얼굴, 내 동상과 사이좋은 모습을 연출했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왠지 반갑자너.’

애초에 메텔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기는 했지만 괜스레 반갑다는 느낌도 든다.

간혹 막스와 시간을 보낼 때, 녀석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8할이 그녀의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흘려들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메텔 수호자님은 자신의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다느니… 너무 자애로운 분이셨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관심을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가 없었고, 그들만의 훈훈한 추억 이야기 역시 그다지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기는 한다. 막아들이 하도 이야기한 게 이래저래 효과가 있었던 모양.

물론 반가움을 느끼는 사람은 이쪽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막아들의 어머니는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을 최대한 가볍게 풀어나가려고 했던 이쪽과는 다소 다른 태도였다.

심지어 입을 여는 것도 굉장히 조심하고 있는 듯했다. 일단 내 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잔뜩 조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경계하고 있네.’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당신은… 누구죠?”

‘영혼결혼식 한 사이라고 말할 수도 없자너.’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그걸 물어보는 게….”

“지상에서는 방랑 사제였고, 지하에서는 신탁을 받은 사제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중요한 건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고….”

“제 머릿속을 울렸던 목소리는….”

“아.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었겠네요.”

“당신은… 도대체….”

퀘스트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게 맞다면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신성을 사용해 퀘스트를 보낸다는 건 신의 영역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방법이나 종류는 다르지만 느끼는 사람에 따라서 신탁을 받거나 신과 접촉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말하자면 균열 수호자 메텔은 희생과 부활의 신의 단편을 느꼈다는 말이 된다.

“혹시….”

“왜요? 혹시 제가 신처럼 보여요? 신의 환생이나 아바타처럼 보이는 겁니까? 초월적인 존재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라도 들었어요?”

“…….”

“이해는 되네요. 근데 너무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봅시다. 이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잖아. 대표적으로 메텔 님께서 걱정하고 있는 균열도 그렇고, 알타누스 성녀도 그래. 저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세요. 신의 아바타라고 느끼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고… 어떻게 제가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합시다.”

“…….”

“저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메텔 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현실이 될 겁니다. 균열이 열리고 온갖 것들이 거기서 쏟아져 나오게 돼요.”

“네?”

“대륙은 생지옥이 될 겁니다. 이곳에 있는 무능한 사제들과 지상의 권력자들은 아무도 당신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거거든. 이미 메텔 님께서 잘 알고 계시겠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잖아요. 다른 차원이니 균열이니 하는 이야기들… 정신 나간 사람 취급받기 딱 좋을 거예요.”

“…….”

“솔직히 믿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어요. 내가 듣기에도 멍청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확실한 건 메텔 님께서 원하는 수단을 제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최소한 제가 알고 있는 미래에는 균열 때문에 대륙이 주저앉지는 않아요. 당신을 비롯한 몇몇 수호자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하거든요. 혹시 아직도 균열 수호자라는 칭호는….”

“균열 수호자….”

생소하다는 반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잡아줘야 하는 건가?’

라는 의문도 든다.

‘생각해 보면….’

균열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는 기술은 이 시대의 것이 아니다.

초대장에 의해 이곳에 온 이후 도서관이나 여러 자료들을 찾아봤지만 이 시대의 기술은 막스를 비롯한 박물관의 시스템들을 탄생시킬 수 없다.

메텔이 수 세기에 한 번 나올 만한 천재라고는 해도, 기술 발전이라는 게 순서가 있는 법이다.

여신의 거울이나 여신의 손거울, 그걸 총괄하는 메인 시스템과 그 안에 있는 프로그램들은 수십, 아니, 수백 계단을 뛰어넘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술이었다.

‘이것도였어?’

이놈의 대륙 시바 이기영이 없으면 돌아가지를 않아요.

괜스레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똑똑 소리와 함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

“잠깐….”

이라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열고 한 인형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베니고어 님?”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갑작스레 방 안에 들어온 그녀는 뜬금없이 방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신경질적으로 쿠션에 있는 먼지를 팡팡 털어버린다든가 바닥에 힘차게 물걸레질을 하며 물걸레로 메텔과 이쪽의 발을 밀어버린다든가 하는 액션을 취한다.

‘얘 왜 이래.’

아니, 얘 질투하나 봐.

지상에서 온 사제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느껴서 질투한다기보다는 그냥 뿔이 난 것 같다고 판단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베니고어의 입장에서는 온갖 감언이설로 달콤한 말을 쏟아낸 사제가 갑작스레 파티에서 만난 여성과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 아닌가.

‘넓은 사교회장에 돌아다니는 아텐타들 중에는 분명 베니고어도 있었을 거고….’

저번에 다시 찾는다고 말까지 해놓고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으니 어쩌면 내심 기대했을 수도 있다.

얘 정신상태면 파티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이라든가, 은밀한 밀회라든가 하는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메텔과 함께 사라지는 지상의 사제.

자신도 모르게 뿔이 나 뒤를 밟았고 그렇게 나타난 것이 지금의 결과물이라고 정리해도 될 것 같았다.

“앗….”

“잠깐 발 좀 치워주시겠어요? 청소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진짜 어린애 같자너.’

“왜 이렇게 방이 더러운지 몰라. 눈에 보이는 쓰레기가 있어서 그런가?”

‘그 쓰레기가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

“메텔 님은 괜찮으시죠? 혹시 말만 번지르르한 어떤 사람한테 속지는 않으셨나요?”

‘너 왜 그래. 지금 타이밍에… 우리 지금 진지한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아니나 다를까 메텔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저… 베니고어 님?”

“누가 베니고어인가요? 저는 아텐타랍니다. 아무래도 지상의 사제님께서는 여러 명의 베니고어를 두신 것 같네요. 지상에서도 베니고어가 참 많으셨겠죠?”

“…….”

“오해입니다. 베니고어 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근데요. 그거 아세요? 사제님? 저는 바보가 아니랍니다. 애초에 합… 합격시켜 드리지도 않았지만… 이… 이… 문란하고 음탕한 사람.”

‘문란하고 음탕한 건 조금 그래… 그건 아니야.’

“거짓말쟁이. 바람둥이에 입만 번지르르.”

“저 베니고어 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메텔 님과는 공적인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고….”

“사제님은 탈락이에요.”

본인은 쿨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게 보인다.

‘은근히 상처 받았자너.’

아니, 이 정도면 대놓고 상처받았다고 표현해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화 몇 번 나누고 나중에 밥 한번 먹자는 식의 기약을 한 게 전부였다.

혹시 이쪽 시대의 상식은 그 정도면 청혼을 한 것과 비슷한 건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얘 분명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을 거야 아마.’

순수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정확히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베니고어다운 행동,

“이제… 사제님과는 끝이에요.”

끝까지 쿨하고 싶은지 문을 쾅 닫고 나가기는 했지만 굳이 쟤를 뒤쫓지는 않았다.

‘나중에 절절한 드라마 한번 찍어주면 되겠지.’

지금은 눈앞에 있는 메텔이 더 중요했으니까.

“방금… 저분은….”

“뭔가 잠깐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방금 아텐타 님이 하신 말씀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얘 도망치려나 보다.’

말보다는 행동이 더 빠르다. 메텔이 뭔가 내뱉기 전에 나는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내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베니고어의 영향을 받은 메텔은 작은 지팡이를 주워 들었지만, 꺼낸 것이 이상한 형태의 아티팩트라는 것을 깨닫고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음에 보일 행동도 뻔할 뻔 자. 여신의 손거울을 기동하는 것보다는 이게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게 더 이해하기 쉽겠지.

나는 마력을 움직인다. 여신의 손거울에서 뻗어 나간 빛이 홀로그램처럼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방 안이 기하학적인 문양과 이상한 공식으로 가득 들어차 있다.

솔직히 나도 이게 다 무엇인지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주요시스템이나 작동원리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지만 깊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복잡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메텔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홀로그램에 놀라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충 뭔지 알아볼 수 있나 본데.’

균열 박물관의 기초가 되는 거대한 시스템, 내가 던전에 진입하기 전까지 박물관을 유지하고 있었던 프로그램. 메텔을 비롯한 균열 수호자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여신의 손거울은 넘겨주면 안 돼.’

확률은 낮지만 그녀가 여신의 손거울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이쪽의 예상보다 더 발전할 여지가 있었으니까.

기초가 되는 단서만 제공한다. 아마 박물관의 하드웨어가 둔탁하고 거대했던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이리라.

이쪽 기술로 여신의 손거울을 만든다면 필연적으로 하드웨어가 거대해질 수밖에 없다.

“만들 수 있겠어요?”

“…….”

“이거 만들어낼 수 있겠냐고요.”

“말… 말도 안 돼….”

“이 기술을 넘겨드리는 대가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딱 네 가지입니다.”

“…….”

“첫째. 정보가 절대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할 것.”

“…….”

“당신 그리고 당신과 함께할 소수의 인원을 균열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겠습니다. 기술에 대한 정보는 오직 균열 수호자들만 열람합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제이미 수호자, 스네프 수호자 같은 얘들도 좀 영입하고요. 아! 물론 거기서도 등급을 매기고 1급 정보와 2급 정보를 분류하세요.”

“…….”

“둘째. 시스템 전체를 총괄할 인공지능 더미를 만들고, 균열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균열에 대한 정보를 보호, 연구하시면 됩니다. 이건 여기 있는 동안 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면 되겠네요.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뽑기 시스템 등등 신경 써야 할 게 많거든… 생각보다 어려울 테니 빠르게 배우셔야 할 거예요.”

“이걸… 이… 이게 도대체….”

‘얘 완전 얼빠져 있잖어.’

문명을 처음 접한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도 그렇다. 본인이 상상하기 힘들었던 기술이었을 테니까.

“셋째. 여기에 있는 동안 저를 조금 도와주시면 됩니다.”

“…….”

“조금 외롭기도 하고… 전쟁터 같은 사교회에서… 아무래도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겠다 싶었거든… 말 편하게 주고받을 사람 정도는 있는 게 좋잖아요. 그리고 마지막.”

“…….”

“마지막으로… 저에 대해서는 잊으셔야 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