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75화
알타누스 (12)
“정말 감명 깊은 이야기로군요.”
“과찬이십니다. 루키페르 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델리하 황녀님.”
“네제스카 공국에서 활동하셨다고 하셨나요? 정확히 어디 즈음인지….”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부끄럽네요. 사실 네제스카 공국에서 이어진 오랜 분쟁은… 저희 델리하 제국이 일정 부분 관여한….”
“황녀님.”
“저는 제국의 치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레엔 부르크 경.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랍니다. 틀린 이야기를 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네제스카 공국의 분쟁이 델리하 제국과 발리네리아 제국, 두 제국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클라킨 후작님?”
“이거 부끄럽군요.”
“발리네리아 제국의 마법 후작님까지 그렇다고 말씀하시네요. 두 제국은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일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제님이 돕고 계셨군요.”
“두 제국의 이후 행보가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네?”
“황녀님께서 말씀하신 알량한 자존심은 결코 알량한 자존심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쟁은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작은 관점에서 본다면… 무척 안타깝습니다만… 커다란 관점에서 두 제국이 얼마나 인류를 이롭게 했는지 제가 모두 다 열거할 수 없을 겁니다. 마법의 발전은 편안함과 안전함을, 기술의 발전은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까.”
“사제님께서는 두 제국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 개인의 의견을 묻는 것이라면….”
“제가 뻔한 걸 물었군요.”
“물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듣기 좋은 소리를 해주시네요.”
“중요한 것은 나누는 일입니다.”
“얼굴에 기름칠을 해주신 이유가 있었네요. 그렇지 않나요? 클라킨 후작님?”
“하하. 아까부터 느꼈지만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공국에 지원을 해달라 말씀하신 것입니까?”
“두 제국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시민들에게 제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면 말입니다. 게다가….”
“…….”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경쟁은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말입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사제님께서 두 제국의 알량한 자존심을 건드리시네요. 공국에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는지 서로 경쟁이라도 해보라는 건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속에 구렁이가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제님. 하하하하!”
‘시바 남의 속도 모르고 웃고 있자너.’
“그러고 보니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다고 하셨습니까?”
“네. 물론 마법후작이라 불리는 클라킨 후작님의 눈에는 보잘것없이 보이겠지만….”
“새치기는 곤란해요. 클라킨 후작님. 이기영 사제님께서는 저와 신학에 관해 나눌 이야기가 있답니다.”
“이런… 기왕이면 저도 함께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함께 해주신다니 더 즐거워지겠는데요.”
“…….”
“대신 그건 좀 미뤄야겠네요. 아무래도 저희가 귀한 손님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인지라….”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이래서 인기인은 피곤해요.’
델리하 황녀님, 철벽의 기사 레엔 부르크, 마법 후작 클라킨, 사실상 지상에서 가장 핫 한 삼인방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지하신전, 지상 가릴 것 없이 유력인사라는 유력인사들은 이곳에 치고 들어올 기회만 노리고 있는 중.
물론 사교회 하위 계층들도 다르지는 않다.
어제 나와 함께 있었던 메텔에게 다가가 무리를 이루는 것을 보니 떨어진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고 싶은 모양.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는 것보다는 저게 맞는 거겠지.
“황녀님께서 이기영 사제님께 할 말이 많으셨나 봅니다.”
“드락타리스 대주교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사제님을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이만 사제님을 놓아 드리려고 했답니다. 눈총이 워낙 따가워서 말이에요.”
“하하하하하.”
아주 웃음꽃이 피었네. 웃음꽃이 피었어.
“저희가 사제님을 곤란하게 만든 건 아니겠죠?”
“그런….”
“짓궂으신 농입니다. 황녀님. 하하하하하하. 사제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지 않았습니까.”
“어머.”
“하하하하하하하!”
지들끼리 아주 북 치고 장구 치고 잘하는 짓이야. 시바 이쪽은 심란해 죽겠는데.
물론 그런 티를 낼 수는 없다. 당장 눈에 띄는 실적은 없었지만 이 빌드업은 중요했으니까. 괜히 메텔과 생쇼를 하며 하루를 버린 것이 아니다.
‘내일 즈음이면 템플러 관련해서 이빨 좀 털어봐도 되겠는데.’
너무 갑작스럽고 생뚱맞게 들리지 않도록 양념을 쳐야 했다. 사실 내 옆에 있는 드락타리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조금 더 직접적으로….
‘집단을 분열시켜야 하니까.’
솔직히 아직까지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아니, 결론을 내리기야 했다. 확신할 수 없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나는 알타누스가 아니야.’
이기영이 알타누스일 가능성은 없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스스로 철의 처녀에 들어간 이후, 현재와 미래가 제대로 조립되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
1회차의 김현성을 전부 지켜보고… 내 아바타를 만들고… 1회차 가면의 영웅을 연기하게 한 이후, 마지막에는 김현성을 회귀시켜 스스로를 갈아 넣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베니고어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남은 껍데기를 지상에 떨어뜨리는 것으로 2회차가 시작되도록 설계했다면?
2회차가 시작된 이후,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가정한다면 ‘이기영=알타누스’라는 가설이 들어맞는다.
계속해서 떠오르던 가면의 영웅, 내가 보던 1회차의 이기영과 과거의 파편들도 소멸의 잔재라는 해석도 가능하지.
물론 세세하게 정리해야 할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지구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이건 가능한 건가. 내가 스스로 손 볼 수 있는 건가?’
베니고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베니고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나처럼 스스로 기억을 봉인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알타누스가 된 내가 그녀를 위로 끌어 올려주는 과정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거라면?’
희박한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희박한 가능성일 뿐이다.
‘그냥 끼워 맞춘 것뿐이야.’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로… 1회차 가면의 영웅이라는 아바타를 내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게 불가능해.’
단순 강림이나 신탁에도 어마어마한 신성을 필요로 한다. 아예 아바타를 내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1회차를 통제하는 것은 수치상으로 불가능하다.
어차피 망할 1회차 대륙 멸망이고 나발이고 신성 좀 당겨 쓰자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헬게이트를 열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가능할 거라는 확신은 없다.
호문클루스에 더미의 인격을 집어넣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것 역시 논외.
단순히 더미의 기억을 물려받은 거라기엔 내가 느꼈던 환상과 기억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두 번째는 이유는 ‘이기영=알타누스’ 설보다 ‘베니고어=알타누스’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
이타누스 설은 억지로 끼워 맞춘 것뿐이다. 단순히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과 누가 봐도 명백한 것, 둘 중에 뭐가 더 정답에 가까운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증거와 정황이 이타누스보다는 베타누스가 더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있었고, 개인적인 감으로도 베타누스 설이 더 무게감 있다는 판단이 선다.
‘무조건 베타누스야. 여기에 다른 변수는 없어. 대가리가 깨져도 베타누스라구.’
그게 본래, 정해져 있는 타임라인이다.
머리가 아픈 것은 여기서부터다.
내가 억지로 끼워 맞춘 퍼즐, 들어가지도 않는 퍼즐을 억지로 구깃구깃 쳐넣어서 완성시킨 이 가설로 인해 이쪽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영이 알타누스일 가능성은 없어.’
하지만.
“…….”
“…….”
[이기영은 알타누스가 될 수 있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베니고어보다 빠르게 철의 처녀에 들어간다면 나는 알타누스가 될 수 있다.
나는 베니고어를 대신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할 수 없는 일까지 전부 마무리할 수 있다.
철의 처녀에 스스로 기어들어 가 처음부터 끝까지 미래를 원하는 대로 조립할 수 있다.
물론 위험부담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대로 이기영의 아바타를 생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하얀과 김현성, 박덕구와 이지혜는 가면의 영웅과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1회차를 마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내가 스스로를 갈아 넣어 김현성을 회귀시킨 이후에 내 껍데기를 지상에 내리는 작업도 실패할지도 모르지. 일이 실패하면 이기영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래를 원하는 방향으로 조립할 수 있다.
‘만약 실패한 채로 시작한다고 해도 이기영만 없을 뿐이야.’
대륙전쟁, 27군단 소환사태, 외신전쟁, 모든 퀘스트를 마치게 할 수 있다.
가면의 영웅은 애초에 나올 타이밍도 없을 것이다.
바뀌기 전의 세계에서의 이기영은 지상에 처박힌 무능력자였지만 바뀐 세계의 이기영은 전지전능한 신으로서 시작할 테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날 모든 사건에 대한 안배, 혹시 모르게 일어날 변수에 대한 안배.
‘누워서 떡 먹기지.’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외신전쟁이 끝나고 파란 길드원들을 다시 안식처로 불러들인다면 걔네들이 철의 처녀에서 나를 구해줄지도 몰라.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그거다.
내 새끼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과거가 바뀌고 나비효과가 시작되고 이기영이 사라진 채로 회차가 시작하게 된다면 모두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얘네들도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성격이 달라질 수도 있고, 다른 습관이 생길 수도 있겠지.
결과는 같을지언정 살아온 삶이 완전히 다를 테니까.
‘그건 말도 안 돼.’
그렇게까지 해서 이걸 할 필요는 없지.
모두에게 잊혀질지도 모르는 페널티를 떠안고 굳이 알타누스가 될 필요는 없다 이거야.
“사제님. 이쪽으로…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네. 드락타리스 대주교님.”
하지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한 인형을 확인한 순간 이곳에 오기 전에 봤던 것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넝마가 된 돼지.
머리카락이 전부 백발이 된 정하얀, 고슴도치가 된 한소라.
순식간에 쓸려버린 선희영, 엘레나, 황정연. 버티고 버티다 못해 쓰러진 안기모와 유아영.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던 김예리와 김창렬, 박리안.
날개가 뜯긴 채로 죽음을 맞이한 김현성.
“…….”
“…….”
나는 예정된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안녕하십니까. 이기영 사제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는 템플러 시몬. 저는….”
“…….”
“저는… 템플러 바하무트라고 합니다.”
아마 그 미래를 만든 것은 눈앞에 있는 개자식일 것이다.
“…….”
“…….”
그걸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