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78화
알타누스 (15)
“사제님….”
“괜찮으세요? 사제님. 사제님.”
공포, 혼란, 두려움, 많은 감정을 담은 표정은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들 것이다.
수도꼭지라도 틀어 놓은 것처럼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한겨울 바다에 입수한 것마냥 몸이 오돌오돌 떨린다.
창백한 얼굴과 바짝 마른 입술, 누가 봐도 패닉 상태를 겪고 있는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드락타리스와 템플러 제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연히 내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템플러 바하무트를 만나고 온 이후에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궁금증은 더욱더 커져 있는 상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이기영 사제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본인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마냥 호들갑을 떨고 있는 템플러 제니의 모습은 가관.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이기영 사제의 빛의 물방울이 녀석의 사춘기 감성을 건드린 것일까. 아니면 이기영 사제가 느끼고 있는 아픔에 불안해하며 공감하는 것일까.
녀석의 눈 역시 촉촉해지고 있다.
“사제님… 사제님….”
본인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춘기 꼬맹이와는 다르게 드락타리스는 제법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는 편.
하지만 그 역시 신탁의 사제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하아….”
계속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자 덩달아 긴장하는 둘, 드락타리스 대주교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이들을 물리기 시작했다.
“대주교님.”
“물러가게. 그리고, 오늘의 일은 불문에 부쳐야 할 것이야.”
“네.”
“템플러 제니….”
“저, 저는….”
심지어 템플러 제니에게까지 축객령을 내리는 모습. 당황스러워하는 녀석은 사제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아직 어린 템플러가 대주교의 말에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자리에 남아 있는 주요 주교들 역시 제니에게 눈치를 주고 있으니 당연히 녀석도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라는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녀석의 사정, 녀석도 이 곳에서 이야기를 들어야 함이 옳다.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는 듯 녀석의 소매 끝을 잡자 녀석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행위에 용기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사제님에게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듯이, 내 임무는 이 사람을 지키는 거라는 듯한 표정을 선보인다.
“괜찮습니다. 사제님. 전부 괜찮아질 겁니다.”
“…….”
“제가 옆에 있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아. 이 새끼야. 네가 도대체 뭔 상관인데… 옆에 있든 없든 아무 상관없어요. 이 사람아. 이 새끼도 참 멍청해요. 태생이 멍청한가 봐.’
녀석의 위로가 효과가 있었기 때문일까. 마음 둘 곳 없었던 신탁의 사제의 안식처가 되어준 꼬마 템플러 덕분에 조금이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이기영 사제님.”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드락타리스 대주교님. 그리고… 다른 주교님들에게도….”
“말씀하기 힘드시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제님.”
‘아니, 뭘 말하기 힘들어. 무조건 말해야지. 낄 데 안 낄 데 구분 좀 하자. 제니야.’
일단 분위기를 잡는 게 옳다.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짧은 시간 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말할 준비가 됐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 올린다.
‘당당하고 꿋꿋하게.’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
“때때로… 이상한 장면들이 보이고는 합니다.”
“…….”
살짝 운만 띄워보자.
“분명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한쪽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연히 심각해지는 얼굴이 보인다.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웬 거렁뱅이가 저런 소리를 지껄였다면 정신과 치료 한번 받아보라는 조언을 받았겠지만 이기영은 평범한 사제가 아니다.
무려 며칠 전에 루키페르로부터 신탁을 받은 사제가 아니었던가.
알타누스 성녀의 몰락을, 루키페르에게 직접 전달받은 기적의 사제. 한 사제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 같은 일들은 그저 허투루 넘겨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혹시 신탁을 받은 이후부터….”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루키페르시여….”
“…….”
“루키페르시여….”
“루키페르 님께서 저를 통해 무엇인가를 전하려 하신다고는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이것이 기적인지… 아니면… 제가….”
미친 건지.
“제가 생각하고 있는게 맞는 건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조심스럽습니다.”
“이기영 사제님… 갑자기 찾아온 변화에 두려워하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는 분명 축복일 겁니다. 루키페르 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사제님을 선택하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뭔가 표정 관리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무척 기뻐 보이는 표정을 억지로 숨기는 듯한 모습,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니 일단은 위로해 주는 것 같았지만 드락타리스 패밀리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을 이야기일 것이다.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대국적으로 본다면 축복받아야 할 일이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이윽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아마 생각이 닿았기 때문이리라.
어째서 신탁의 사제가 이토록 혼란스러워했는지.
어째서 그토록 두려움에 떨며 자신들을 찾았는지 말이다.
템플러 제니도 나를 바라본다.
“사제님께서는… 무언가를 보신 거군요. 바하무트 님과 관련된… 무언가를….”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 저쪽 역시 이해하고 있다. 이야기 풀어나가는 솜씨가 아주 기가 막히다니까.
다시 한번 몸을 오돌오돌 떨어야지. 하지만 아까 용기를 얻었잖아. 나를 아껴주고 함께할 사람들이 있어서 이겨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잖아.
이겨내자 기영아. 넌 할 수 있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너의 힘이 되어 줄거야.
“사제님.”
그래. 용기를 줘서 고마워.
덕분에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
“이기영 사제….”
드락타리스 너도 마찬가지야.
“템플러 바하무트가….”
“…….”
“그가… 악신을 향해 경배드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
“제 눈에 비친 그는 철의 처녀에 갇힌 무언가를 제물로 바치며 악신을 향해 고개를 조이라고 있었습니다. 그의 발밑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피의 강을 이루고 있었고… 아직 살아남은 이들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루키페르 님의 이름을 외치며 많은 이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광경은 너무나 참혹한 광경이라… 저는 도저히… 그 광경을 똑바로 목도할 수 없었습니다.”
“아….”
“정확한 시기도…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가 본 것이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드락타리스 님의 말처럼 어떤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
“저는….”
“알타누스 성녀님의 몰락… 그리고… 템플러 바하무트.”
“…….”
아직은 맞춰지지 않은 조각. 그럴듯한 조각.
“첫 번째 신탁은 분명히 성녀님이 신성력을 잃게 되는 것이었지요.”
“…….”
“그리고 두 번째는….”
하지만 너무 몰아가는 것 같으니까 부정도 한번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템플러 바하무트가 루키페르 님을 배신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제가 본 템플러 바하무트는 그 누구보다도 루키페르 님과 알타누스 성녀님을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분명히 무언가 이유가 있을 수도… 아직 보지 못한 무엇인가가….”
일단 확실히 보기는 봤지만 중간에 많이 빠졌으니까. 다리가 되어주는 서사가 빠졌다고 보면 되겠지.
“만약에 처음부터 루키페르 님을 배신할 생각이었다고 한다면….”
드락타리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쉽지 않겠군요.”
그래, 쉽지 않을 거야.
어느새 이쪽은 뒷전. 불안해하는 드락타리스와 녀석의 똘마니들은 본인들끼리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지하 신전 내에 그를 따르는 세력이 많습니다. 드락타리스 님, 뜻이 있는 자들을 모아 그들을 견제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니요. 이는 지하신전에, 아니, 대륙의 위기입니다.”
“이단심문관들을 불러오면 어떻겠습니까. 신탁의 사제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분명 증거가 나올 것입니다.”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우리 쪽 입장도 난처해지지 않겠습니까. 무려 그 바하무트입니다. 우리가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 역시 다른 세력들을 규합하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전에 템플러 바하무트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면….”
“허… 악신이라니…. 악신이라니… 루키페르시여.”
“지상에 있는 암살자나 용병들을….”
“그런 이들을 지하신전으로 내려오게 할 수는 없소.”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만… 사제님이 본 것이 정말로 루키페르 님의 예언일지도 두고 봐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까.”
“말조심하게! 지금 누구 앞이라고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가!”
“확실히 해야 합니다. 드락타리스님.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지하신전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 새끼들이 패기가 없네.
바젤 교황님이었으면 바로 메이스 가지고 오라면서 호통을 치고 돌진했을 텐데.
근데 저렇게 조심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기는 해.
‘내 입장에서도 당장 피바람이 불면 곤란할 것 같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할 뜻이 있는 이들은 계속해서 템플러 들을 견제해 줘야 한다.
이단심문관이니 뭐니 부르고 난리 부르스를 피웠다가는 역풍 맞고 머리가 날아가는 수가 있었으니까.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나를 의심하는 놈이 있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긴 다짜고짜 신탁의 사제니 예언이니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놈들 한둘이야 있겠지.
“사제님.”
머리가 아프다는 듯한 리액션을 취하자. 이쪽의 안부를 물어오는 템플러 제니, 아까보다 더 불안해하는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사제님?”
녀석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탁상공론을 하고 있는 이들의 시선이 쏠린다.
“사제님 지금….”
“허….”
“이건….”
드락타리스 패밀리와 템플러 제니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곳은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한쪽 눈.
금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을 느낀 사제들이 차례대로 무릎을 꿇는다.
“예언의 사제여….”
“예언의 사제….”
“루키페르 님께서….”
“아아아….”
“아아아아….”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본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제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방금 본 장면에 대해서 관해서 말이다.
다만 모든 이들이 자리를 뜨고 난 이후에는 템플러 제니를 향해 중얼거렸다.
“템플러 제니.”
“네. 사제님.”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제님. 사제님은 특별한 분이신 걸요.”
“아니요.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템플러 제니… 그러니… 그러니 혹시라도…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어요. 기억하세요. 템플러 제니. 저를 위해 자신을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
“꼭 기억하세요.”
“…….”
“저를 위해 죽지 마세요.”
진심으로 녀석을 걱정했기에 할 수 있는 진솔한 발언.
방법이야 어찌 됐든 놈은 나를 위해 죽을 것이다.
“저를 구하려고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