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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79화 (97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79화

알타누스 (16)

이타누스 루트를 타야 하는 건지, 베타누스를 루트를 타야 하는 건지, 아직 확정하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어떤 것이 더 이득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내가 알타누스가 됐을 때 꼬여 있는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보면 기본적으로 베타누스 루트가 더 안정적이라는 판단은 들지만 최악의 상황이 찾아올 경우에는 이타누스 역시 고려해 봐야 했다.

현재로서 가장 합리적인 것은 두 가지 루트를 모두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것, 템플러 제니에게 씨앗을 심어놓은 것은 그런 의미였다.

‘제니든 젠이든 간에 한 번은 방패가 되어줄 거야.’

이타누스 루트를 타면 제니가, 베타누스 루트를 탄다면 젠이 이쪽을 도와줄 것이다. 아니, 미래가 바뀌더라도, 템플러 젠이 김현성을 대신해 숭고하게 희생하는 장면을 설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드락타리스도 마찬가지일 거고.’

어느 정도 그림은 만들어졌을 거야.

말하자면 녀석을 협력자로 만들 토대를 세웠다는 것, 바하무트와 드락타리스 간의 갈등 관계를 심화시키고 최종 보스 레이드에 도움을 줄 NPC로 만드는 과정을 만들고 있다면 생각하기 편하지 않을까.

‘드락타리스 공략 소식이 들리지 않은 게 이런 이유일 수도 있어.’

공략에 참가한 희라 누나가 느끼기에는 다소 김빠진 상황이 연출 될 수도 있지만 기도실로 들어간 인원들은 보스 공략의 조건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이들과는 별개로 본대는 계속해서 공략을 진행 중인 것 같으니 최소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이타누스든 베타누스든, 드락타리스를 아군 NPC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루트에 답은 템플러 바하무트가 가지고 있다.

‘세력을 약화시키는 게 첫 번째야.’

처리할 수 있으면 여기서 처리하면 좋겠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높아.’

놈은 이 세계에서는 영웅이었으니까.

대륙은 나나 베니고어가 철의 처녀에 들어간 이후에 점차적으로 종말을 맞이해야 했다. 루키페르가 자연스럽게 대륙을 손절할 준비가 되었을 때 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대륙이 다른 방식으로 멸망을 맞이한다면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녀석은 방패였다. 나나 베니고어가 대륙을 승계받기 전까지 대륙을 지킬 방패.

애초에 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도 없지만 말이다.

“사제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드락타리스 님.”

“…….”

“루키페르 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제가 확인한 것이 지금부터 시작될 미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주교님과 다른 주교님들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제가 정말로 예언의 사제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

“만약 정말로 루키페르 님께서 제게 이러한 능력을 내리신 것이 맞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템플러 바하무트가 타락하게 된 원인을 알 수도, 어쩌면 그의 타락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으로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와 가까워지는 일이에요. 제가… 제가 그를 안 것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입니다만… 저는 그가 정말로 루키페르 님을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드락타리스 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더 안전하고 합리적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에도 동감합니다만… 현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제님….”

“만약 그가 정말로 루키페르 님을 저버렸다고 해도….”

“최소한 템플러 제니나 다른 호위병력을 대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고개를 젓는 것이 옳다. 녀석에게 경각심을 주고 싶지는 않다는 대외적인 이유가 있었으니까.

“사, 사제님. 드락타리스 대주교님의 말이 맞습니다. 사제님 말대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혹시…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뿐입니다. 템플러 제니.”

“…….”

“템플러 제니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사제님!”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템플러 제니. 꼭 기억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마치 어딘가로 팔려가는 듯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들이 눈에 띄었지만 예언의 사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회피하지 않는다.

두렵고 무섭지만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일인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것 아니라는 듯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은 당연지사. 그 환한 미소로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맞는다.

“템플러 바하무트!”

더 씩씩한 목소리로 말이다.

본래대로라면 삼 일 차 사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녀석, 정확히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의 만남이 나름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재미있을 수밖에 없지 뭐.’

이 동네에 여신의 손거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나 지하신전에 사제들이랑 부대끼다 보면 얼마나 지루하겠어.

간만에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나타나니까. 루키페르밖에 모르는 아웃사이더들이 환장할 만도 하지.

“오셨습니까.”

“저 멀리서부터 보이시더군요. 템플러 바하무트는….”

“하하하….”

머쓱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짧은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확실히 어제보다 분위기가 좋다.

녀석의 검술 수업이 유대감을 쌓는 데 도움이 된 모양, 조금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없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원래 술 몇 잔 들어가고 친해지면 괜히 다음날 어색 하자너.’

이미 그 단계는 뛰어넘었다고 봐야 하는 거지.

“드락타리스 대주교님.”

“템플러 바하무트.”

그 와중에 지하신전의 두 기둥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저 시간이 조금 더 지속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은 느낌에 곧바로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잠깐 템플러 바하무트와 시간을 보내고 오겠습니다. 드락타리스 님.”

“네. 알겠습니다. 이기영 사제님.”

사교회에서 할 일이 많기는 했지만 일에 우선순위라는 게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해야 할 일들과 만나봐야 할 인사들에 대해서는 메텔에게 대충은 맡겨 둔 상태.

벌써부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럭저럭 잘 대처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드락타리스 쪽에서도 움직여 줄 테니까.’

세력을 모으고 훗날을 도모한다. 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드락타리스와 계속해서 붙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은근슬쩍 사라지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마법후작 어쩌구랑 황녀의 마음을 얻어야 할 테니까.

물론 갑자기 밖으로 나가자 그러면 조금 이상하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조금씩 조금씩 각을 보는 게 맞겠네.

“하하하하하!”

오늘도 여전히 웃음꽃이 피자너.

“루키페르 님의 말씀 속에 그런 뜻이 숨겨져 있었군요. 대단하십니다. 이기영 사제님.”

“그저 개인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어떻게 제 말이 루키페르 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분명히 개인적인 해석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바하무트 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저 역시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루키페르 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했습니다만… 사제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숨져진 뜻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학식이 대단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지하신전으로 내려온 이후에도….”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어?’

“도서관에서 계속해서 공부를 하셨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었습니다.”

“지하신전의 도서관이 어땠는지 궁금했던 터라….”

“하하하하하.”

물론 오늘의 목적은 여기 있는 갤러리들을 상대로 이빨을 터는 것이 아니다.

함께 웃고 있지만 어딘가 불편하다는 모습을 보여주자.

다른 갤러리들의 눈에는 평소와 같은 이기영처럼 보이겠지만 어제 하루 종일 진실 된 미소를 보고 있었던 바하무트의 얼굴에는 찝찝하다는 표정이 들어서 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자꾸만 눈치를 보고 이 불편한 장소를 빠져나가고 싶다는 행동을 취한다.

“괜찮으십니까? 사제님?”

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

“네. 괜찮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괜찮지 않은 표정 장전.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많이 답답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네?”

“아까 말입니다.”

“네? 그럴 리가….”

“제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것처럼….”

“…….”

한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섣부르게 입을 열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불안하다는 얼굴로 말이다.

“실은….”

“…….”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

“때때로… 이상한 장면들이 보이고는 합니다.”

“…….”

어제와 같다.

“분명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한쪽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친 것처럼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루키페르 님께 신탁을 받은 후로부터 제 눈에 이상한 것들이 비칩니다. 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가까운 미래인지, 먼 미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들이 환상처럼 지나가고는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소중하게 품어왔던 비밀.

멍청한 짓일지도 모른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는다는 건 다분히 비정상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의지할 곳이 없었다. 지하신전에서 이기영은 혼자였으니까.

혼자만 끙끙 앓아온 고민에 새롭게 친우가 된 바하무트는 입을 닫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

“하… 하하… 실은 농담이었습니다. 바하무트 님. 제 농담이 조금….”

“믿습니다.”

“네?”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바 믿을 줄 알았어.’

녀석도 환상을 목도했었으니까.

지상에서 내려온 사제의 등 뒤에 날개가 펼쳐지는 찰나를, 그의 한쪽 눈이 빛나던 모습을, 그의 몸 전체에서 감히 설명하기 힘든 신성한 빛이 퍼져나가는 걸 목도했었으니까.

내 말을 녀석이 믿지 않으면 누가 나를 믿을까.

“정말인가요?”

“네. 믿습니다. 사제님.”

긴장이 풀려버린 것일까. 저도 모르게 안심이 들어 다리가 풀린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실례지만 어떤 것을 보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불편하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은….”

“네?”

“아닙니다. 바하무트 님.”

“…….”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

“힘을 멀리하셔야 합니다.”

말을 끝으로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폭음이 터져 나온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폭발이 순식간에 몸을 뒤덮는다.

물론 나는 안심할 수 있다. 어차피 쟤가 지켜줄 테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마치 지옥 불과 같은, 너무나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색의 겁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만 같은 구역질 나는 불꽃.

“아!”

“위험!”

지하세계로 숨어든, 정체불명의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지옥 불 폭탄 물약-준 신화 등급]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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