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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84화 (97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84화

알타누스 (21)

물론 기분 탓일 것이다.

아직 생각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이었으니까. 아니, 기분 탓이어야 한다.

‘10시간은 버텨야 돼.’

준비한 퀘스트가 전부 다 떨어질 때까지는 무조건 버텨야 되는 게 맞아.

원정대 쪽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10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기억이 지워지고 있는 거라면….

‘다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어.’

진청 쪽에서 다른 방법을 강구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녀석 나름대로 잊지 않기 위한 보험을 마련해 놓을 것이다.

아기자기하게 노트에 적어 놓는다든지, 아니면 본인만 알아볼 수 있는 신호나 암호를 마련한다든지, 방법은 많다.

중요한 것은 10시간이 지나기 전에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거였으니까. 문제는….

‘이 새끼만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거 아니야.’

조금씩 조금씩 이기영이 잊혀진다는 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는 모르지만 정하얀이나 김현성에게도 같은 현상이 온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는 뻔할 뻔 자.

발작이 온 것마냥 지랄발광을 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 모습들이 눈에 그려지기도 했다.

혜진이나 다른 애들도 불안함을 표출하기야 하겠지만 최소한… 해야 할 일들을 내팽개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원정대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게 맞다면, 김현성과 정하얀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김현성 이 새끼는 보나 마나 3회차 어쩌고, 죄송하다 어쩌고, 지켜야 할 의미가 없다 어쩌고 말하며 상황을 방관할 테고….

‘그나마 얘는 양반일 수도 있어.’

정하얀은 진짜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게 불안하다.

‘누나는 괜찮나?’

그쪽에서도 뭔가 방도를 찾을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빠르게 이쪽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실시간으로 내가 잊혀지고 있다는 게 확실하다면 최소한 그전에는 모든 일을 마무리하는 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자리를 옮긴 것은 당연, 흑마법사가 설치한 크고 작은 폭탄들은 극적인 상항을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콰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폭음이 들려온다. 화력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이미 저 폭발 소리는 이곳에 있는 인사들에게 각인 된 이후.

마치 지옥의 겁화가 터진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비명 소리가 쏟아지고 여기저기서 허리를 숙인 인파들이 뛰쳐나온다.

본능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장소를 향해 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비규환이 된 지하신전에서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템플러 몇몇이 인파들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누가 너희들을 신뢰하겠어.’

템플러들이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저들이 더욱더 잘 알고 있다. 지옥불 폭탄이 만든 공포, 머릿속에 각인된 그 공포는 이미 실패한 집단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꺄아아아악!”

“비켜! 제길! 비키라고!”

“여… 여러분!”

“이곳에서 나가겠어요!”

콰앙!!

“황녀님!”

“제기랄! 제기랄!”

“여기에서 나가게 해줘! 제길!”

블랙마켓에서 본 꼴이 딱 이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패닉 상태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고, 장식용 테이블 아래에 숨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대부분은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커다란 소리에서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하는 소리들이 연속적으로 들려온다.

대부분은 블러핑인 것 같았지만 겨우 이것만으로도, 너무나도 쉽게 지하신전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문제는….

‘시발 나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드네.’

나 역시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 워낙 많은 인원들이 발등에 불똥 떨어진 것마냥 뛰어다니다 보니 움직이기는커녕 중심을 잡기도 쉽지가 않다.

어깨를 치고 지나가고 인파에 휩쓸려 오히려 뒤로 밀려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제님!”

“…….”

“사제님! 사제님!”

“제니!”

저 멀리서 들려오는 템플러 제니의 목소리. 입술을 꽉 깨문 녀석은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오더니 이쪽의 손목을 꽉 잡아왔다.

“사제님!”

“드락타리스 님께….”

“피하셔야 해요! 사제님! 일단은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

“드락타리스 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드락타리스 님께 데려다주세요.”

‘시바 지금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있다고. 그냥 블러핑이라고.’

물론 조금 실감 나기야 한다. 기승전결로 따지자면 전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 마치 지하신전이 내일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분위기다.

혼란이 혼란을 불러오고 그 혼란이 더 큰 혼란을 불러온다.

실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이 세상에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날뛰고 있으니, 정말로 세상이 멸망할 것만 같다.

사실 템플러 제니의 얼굴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하지 못한 풋내기인 만큼 이런 상황이 더욱더 공포스럽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입술을 꾹 다문 녀석, 당장 나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싶었겠지만 예언의 사제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숙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의 모습, 잘은 모르겠지만 이 사제님의 말을 따라는 게 맞다고 세뇌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그 말 그대로 이기영의 눈동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하…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이쪽을 잡아당기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락타리스 님께서는 아마 아직 부상자들과 함께 계실 겁니다. 이쪽으로.”

“템플러 제니….”

“멍청한 저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모르는 게 당연해.’

“사제님이라면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지하신전을 구해주세요. 사제님.”

당연히 녀석의 말에 살을 붙이지는 않았다. 극에 빠져든 배우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콰앙!!

“사제님 이쪽으로!”

‘생쇼를 해요. 생쇼를 해.’

쾅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벽이 터질 때마다 악마라도 나오는 것처럼 반응하는 모습.

세트장에서 진심으로 피땀 흘리며 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부끄러워진다.

물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인파를 뚫고 놈은 확실히 길을 열어주고 있었으니까.

“사제님!”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데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애잔하다. 이 새끼 너무 몰입한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눈치채지 않을까.

조금은 섭섭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일회용 연금소환마법을 사용하자 거대한 괴물의 팔이 벽면에서 튀어나온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쪽을 붙잡고 바닥에 뒹굴며 반응한 녀석.

순식간에 몸이 땅바닥을 뒹굴었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고 검을 뽑아 허무할 정도로 쉽게 거대한 팔을 양단한다.

“이야!”

“…….”

“약해….”

‘시바 괜히 했나?’

“아니… 약한 게 아니야. 내가 강해진 거야.”

라고 혼잣말까지 내뱉는 것도 완벽하다.

“사제님 덕분에….”

“…….”

“사제님 덕분에 강해질 수 있었던 거야.”

‘어디 숨을 곳 없냐구. 시바.’

얼굴에는 자신감이 들어차 있다. 이 한 번의 전투는… 훈련병이라도, 하위 템플러라도 할 수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긴장감에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온 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성장한 듯한 얼굴.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던 놈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한 사람의 어엿한 템플러로 우뚝 서려 하고 있었다.

템플러 제니는 이곳에서 성장했다.

라는 내레이션이 깔려 줘야 할 것만 같은 절박한 상황. 땅바닥을 구르고 무너지는 벽을 막으며 공포와 절망 속에서 끝끝내 변태한 나비.

원래부터 포텐셜이 있는 녀석이었겠지만 행동에 망설임은 사라진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라진 망설임만큼 나는 빠르게 드락타리스 쪽으로 당도할 수 있었다.

“사제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드락타리스 님!”

“…….”

“사제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내부에서 한차례 소란이 일어난 이후에 빠르게 문이 열린다.

아마 문을 열어주는 것이 맞을지, 내부 회의라도 하고 있었던 거겠지. 아마 아직 바깥이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드락타리스를 비롯한 사제들은 이곳에 있는 병자들을 버릴 수 없었고 호위병들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드락타리스의 안전에 신경 쓸 수밖에 없을 테니 이곳에 처박혀 있는 것이 정답.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무사하셨군요.”

예상했던 것처럼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녀석은 빠르게 다가와 이쪽의 양손을 잡는다.

“아아… 예언의 사제여.”

“지금….”

“그렇지 않아도 호위병들 두셋을 보내 바깥의 상황을 파악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병자들 때문에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 그것보다 몸은 괜찮아지신 겁니까?”

“저도…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쩌면… 어쩌면 미래에 일어날 일이 조금 더 빠르게 벌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변수가 생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

“…….”

“사제님이 보신 미래가… 그렇다면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호위병들을 이끌고 지하신전 내부에서 준비 중인 병력을 모아야 합니다.”

“심려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드락타리스 님.”

“…….”

“이곳에 계셔야 합니다.”

“…….”

“적어도 이 소동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이곳에 계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이 방문을 나간다면 드락타리스 님께서는… 드락타리스 님께서는….”

내가 무슨 미래를 봤는지 알겠어?

이렇게 말끝을 흐렸는데 모를 리가 없다. 이 새끼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누가 봐도 말귀를 알아 쳐 들은 놈의 얼굴. 알겠다는 듯이 녀석은 잠잠히 말을 잇는다.

“제 죽음을 보셨습니까?”

그래 정답이야. 지금 여길 나가면 넌 죽어.

무척 처참하고… 아무 의미 없게.

“저는 루키페르 님의 종입니다. 사제님. 저는 죽음이 두렵….”

“제가… 제가….”

“…….”

“제가! 드락타리스 님의 죽음이 두렵습니다.”

“…….”

“제가 두렵단 말입니다!”

“…….”

“드락타리스 님이 이곳에서 사라지실 분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먼 미래에… 먼 미래에 대주교님께서는 더욱더 큰일을 하실 겁니다. 자세하게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드락타리스 님께서는… 이 지하신전을… 알타누스 성녀님을 구하시게 될 겁니다. 지금 이곳을 안정시키는 것보다도 더 커다란 일을 하시게 될 겁니다.”

“…….”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실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참으시는 것이 그 누구보다도 드락타리스 님을 괴롭게 하실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하지만… 약조해 주십시오.”

진심을 담은 눈으로.

“루키페르 님의 이름으로 약조해 주십시오.”

“…….”

“언젠가 드락타리스 님을 찾아갈 때까지. 제가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루키페르 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이 지하신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신에게 축복받은 이들이… 빛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 드락타리스 님 앞에 나타날 때까지….”

“예언의 사제….”

“살아남겠다고… 기다리겠다고… 그때가 오기를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겠다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희망을 위해….”

눈물 한 방울. 처연한 눈빛. 하지만 강렬한 기백.

“그날을 위해… 그날만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거침없는 이빨!

“약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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