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85화
알타누스 (22)
이자는… 이자는 죽기를 각오했다. 이 성자는 지금 이곳에서 마지막 촛불을 불태우려고 하고 있다.
스스로를 희생해 지하신전의 멸망을, 대륙의 멸망을 막아내려고 하고 있다.
정확히 바깥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정도 정황은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설명한 그대로, 현재 예언의 사제라 불리는 이기영은 스스로를 희생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잠재우려고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런 분위기다. 드락타리스뿐만이 아니라 녀석을 둘러싸고 있는 호위병들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락타리스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어떤 선택이 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건….”
예언의 사제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아.
“그건 어떤 의미입니까.”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을 거야. 방금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구. 어차피 모두가 답을 알고 있잖아.
마치 살얼음판 위에 있는 것 같은 분위기. 두 어른의 대화를 듣고 있는 템플러 제니마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저로서는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다만… 다만 드락타리스 님께서 꼭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럴 수… 그럴 수 없습니다. 예언의 사제님.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함께 방법을 찾는다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 따위는 없어요.”
예언의 사제가 본 1,400만 개의 미래 중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
“힘드실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납득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
“하지만 드락타리스 님께서 견뎌 주셔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기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드락타리스 님께서 견디셔야 합니다.”
“…….”
“약속해 주실 거라고,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빛이 되어주실 거라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견뎌 주실 거라고… 지금은… 지금은 때가 아닐 뿐입니다.”
“사제님….”
“저는… 저는 루키페르 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맞는 역할을 맡겨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이… 여기에서 드락타리스 님을 지키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훗날… 먼 미래에 대륙을 위해 루키페르 님을 위해 싸워주실 분들을 인도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역할입니다.”
“…….”
예언의 사제의 발언은 설득력이 없다. 애초에 이성에 호소하지 않았으니까.
어디까지나 감정에 호소하고 있는 발언, 믿어달라고, 지금 이곳은 당신들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드락타리스는 내 부탁을 들어줄 이유도, 약속할 의무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는…. 성자의 희생을 그의 결심을 저버릴 만큼 잔인하지 않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큰 어려움과 역경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었는지 녀석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만무.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은 위치에 있는 대주교였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예언의 사제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아무것도 책임져야 할 것이 없는 사제였다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약… 약조… 드리겠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비통한 심정을 억누르며 튀어나온 목소리.
“루키페르 님에게 맹세코… 사제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을… 약속…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미소를 띤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이게 맞는 거라는 듯이 슬픈 웃음을 내보인다.
드락타리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순교자가 될 그를 웃으며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드락타리스의 눈물샘은 너무나도 쉽게 녀석을 배신한다.
“그럼….”
이후에 이어지는 짧은 작별인사 타임.
다른 주교들의 손을 잡아주고 기도를 외우는 이벤트가 빠지면 섭섭하지.
“루키페르 님이시여….”
“빛이 있으라.”
“가호를….”
“부디 예언의 사제를 보살펴 주시옵소서. 언제나… 언제나 그의 곁에 함께해 주시옵소서.”
“루키페르 님께서 여러분들을 살필 것입니다.”
심지어 호위병들 한 명 한 명도 잊지 않는다.
“드락타리스 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네이마리안 경.”
“네. 네….”
“세릴리시아 경. 당신은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웃으며 배웅해 주셨으면 합니다.”
“흐윽… 흐윽… 예언의 사제시여.”
“루키페르 님의 축복이 여러분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모두의 볼에 입을 맞추고 순교자가 되기 위한 힘든 발걸음을 내디딘다.
“사… 사제님.”
물론 아직까지 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래. 너도 여기까지야.’
깜짝 놀랐지? 여기서 헤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야. 하지만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야. 다음에 또 만나지는 못할 거라구.
소매 끝을 잡아당긴 것은 지금까지 눈치를 보고 있었던 템플러 제니였다.
“템플러 제니도 마찬가지입니다.”
“…….”
“여기서 작별인사를….”
“네?”
“드락타리스 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정말로 드리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여러 가지로 감사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템플러 제니가 얼마나 제게 커다란 힘이 됐는지….”
“왜 그런… 그런 말을 하시는 건가요?”
네가 할 일이 없는 것 같아도 할 일이 많아. 드락타리스 대주교 쪽에서도 템플러 측의 사람이 한 명 필요할 테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뭐 그럴 수는 없어. 그럴 수 있어.
“사제님… 사제님….”
이 새끼는 이미 눈물샘 고장 난 상황이자너.
“가지 마세요. 보낼 수 없습니다. 이대로 사제님을 보낼 수는 없어요. 흐으윽… 흐윽….”
뭔 가지 마야. 내가 가겠다는데 네가 무슨 권리로 보낼 수 있다 없다야.
확실히 아직 어린놈이라는 생각이 들기야 한다. 다소 의젓한 모습을 보였던 아까와는 다르게 한순간에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가는 상황.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내가 다 당황스럽다.
아까 기도드리는 이벤트 때부터 조금씩 시동이 걸리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참고 있는 것 같았는데… 막상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턱은 녀석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격해져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소매를 꽉 잡은 손도 절대로 보낼 수 없다는 눈빛도. 뭔 애새끼 눈빛이 이렇게 살벌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는지 눈치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는 아니네.’
“사제님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죽으러 가는 거냐고?’
사실 죽으러 가는 거 맞을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할 만해.
하지만 하얀 거짓말이 필요하다.
녀석을 안정시킬 수 있는….
“지상으로 올라가게 될 것 같습니다.”
“네?”
천사의, 순백의 거짓말 말이야.
“아마 지상으로 올라가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 것 같습니다.”
“…….”
“메텔 님과 함께 말입니다.”
균열 수호자 메텔이라면 믿을 만하지.
어차피 나는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 어디까지나 초대된 입장이었고 영원히 지하에 처박혀 살 수는 없다.
시기와 타이밍이 제법 극적이기는 했지만… 지상의 도움을 받는다는 발언은 꽤나 그럴 듯하다.
물론 믿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말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
“거짓말….”
‘응 거짓말이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흐윽… 사제님.”
하지만….
“루키페르 님의 이름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템플러 제니.”
이건 결정적이다.
선의의 거짓말은 루키페르 님께서도 용서해 주시지.
누가 봐도 거짓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나를 나무라는 이들은 없다.
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루키페르 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할 수 있냐 다그칠 정도로 눈치 없는 새끼들이 있을 리가 없다.
상처받을 꼬마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 루키페르도 기뻐할 거짓말. 순진한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정말인가요?”
“네.”
“정말… 정말로 거짓말이 아닌 건가요?”
“네. 정말입니다. 당장 지하로 내려올 수 있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네. 저도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어쩌면 돌아오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약속을 드리지… 못하겠지만….”
세심한 배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납득하기 힘들어하지만 분위기에 납득한 것처럼 보인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억지로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덜 괴로운 방법, 아직 어린 녀석이니만큼 가장 덜 상처 받을 수 있는 선택지에 발을 들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가… 제가 찾아가도 되나요?”
그럼 되고 말지. 내가 시바 지상에 있다면 말이야.
“언젠가… 제가 먼저 사제님을 찾아봬도 괜찮을까요?”
살짝 몸을 굽혀서 눈을 맞춰주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마무리.
“네. 물론입니다. 템플러 제니.”
“흐으윽… 끄윽….”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이마리안 경, 세릴리시아 경. 제니를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나 따라오지 못하게 막아달라는 소리야.
말을 끝으로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간다. 굳이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사제님!! 사제님!!! 이거 놔! 놓으란 말입니다!”
“…….”
“사제님! 끄윽….”
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 옳다. 나는 바쁜 사람이었으니까.
여전히 들려오는 폭음 소리와 당장에라도 망할 것 같은 분위기가 온몸을 감싼다.
아. 그다음… 그다음이….
“여기 계셨군요.”
그다음 바로 왔네.
“메텔 수호자님.”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이렇게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까. 괜찮잖아요. 마법 좀 쓸 줄 알죠? 바하무트한테 가는 길 좀 뚫어줘요. 아니, 장소를 한 군데 정해서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공부 좀 했어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직 질문드릴 게… 산더미처럼 많은데….”
“대충 정리해 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저 좀 도와주세요. 시간은 없는데 해야 할 일은 많으니까….”
이 난리가 났는데 균열 박물관부터 신경 쓰는 거 보면 얘도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정도면 집착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물론 이런 부류들은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겠지만….
‘한 손 거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바하무트만 마무리하면 돼.
8시간 안에.
아니. 지금 몇 시간이 지났지?
“정확히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까?”
“…….”
“아니, 그것보다….”
“…….”
“사제님. 한쪽 눈이.”
“…….”
눈이 뭐.
“한쪽 눈이….”
서둘러 손거울을 꺼내고 내 모습을 확인한다.
“…….”
시야에 비친 내 눈이….
“…….”
“…….”
‘시바… 시바 새끼… 감히 날 잊어버려?’
본래의 색으로 되돌아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