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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86화 (97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86화

알타누스 (23)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손거울을 바라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얼굴을 빤히 쳐다봤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유대감의 그 자체이자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상징하는 금색의 눈이 본래의 눈으로 되돌아가 있다.

멋들어지는 오드아이가 사라져 버렸다. 중2 감성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끼고 있었는데….

‘아끼고 있었단 말이야….’

“사제님?”

“…….”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시바… 이걸 잊어버려?’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닌 상황.

‘진짜로 잊어버려? 진짜?’

“…….”

‘진짜로 잊어버린 거냐구? 이 새끼. 진짜 못 쓰겠네.’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파란이 이기영을 잊어버린 게 아니다. 애초에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처리가 되는 만큼 사실 잊어버렸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예 미래가 뒤바뀌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달라져 버린 것이다.

바뀐 세계에 김현성이 회귀자인지 도 확신할 수 없다. 김현성을 회귀시킬지 회귀시키지 않을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으니까.

갈려 나가고 싶지 않은 만큼 기왕이면 1회 차에 모든 걸 해결하는 게 맞다는 생각은 들지만 내 계획이 생각한 대로 흘러갈지 장담할 수 없다.

변수가 있다면 다시 한번 회차를 진행할 수 있겠지만… 만약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 맞다면….

‘1회 차로 진행되고 있는 거일 수도 있어.’

가면의 영웅도 없었던 1회 차.

알타누스의 회귀자가 아니라 알타누스의 용사로 진행되고 있는 1회 차.

여러 가지가 달라졌겠지만 기본적인 골조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륙전쟁, 27군단 소환사태, 외신전쟁 등등 굵직한 사건들을 전부 겪었고 지금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에서 던전 공략을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전체적인 타임라인은 내가 직접 조율했을 테니… 아마 확실하지 않을까.

김현성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었겠지만 이타누스가 뒤를 봐주는 상황에서 성장한 영웅이고, 지금의 내가 모르는 서사를 겪으며 노을빛의 검사로 각성했을 것이다.

어쩌면 노을빛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니야. 노을빛이기는 할 거야.’

노을빛이랑 잘 어울리기는 하니까. 노을빛의 검사가 아니라 다른 루트로의 진화는 상상할 수도 없으니 이타누스가 알아서 잘 처리했겠지.

어쩌면 노을빛의 성기사일 수도 있어. 소환되자마자 알타누스의 용사로 시작한 상태로 시작할 테니까…. 기본적으로 성기사 루트를 타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정하얀이나 박덕구도 그런 방향성으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하얀이는 전에 없던 신전마법사로 활동할 수도 있고….

한소라 같은 경우에는 포로로 붙잡힌 흑마법사. 어쩌다가 일이 꼬여서 같이 다니는 포지션으로 가는 것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박덕구도 뭐 김현성이나 정하얀 비슷하게 성장했을 수도 있겠지. 방패 하나 내려주면 이번에도 성장을 따라갈 수 있을거야.

조혜진은 아직 감이 안 오고… 예리 같은 경우에는 이단심문관이 잘 어울리겠다.

창렬이도 이단심문관으로 활동하고… 희영 씨는 대주교 같은 지위로 움직일지도 몰라.

파란 길드가 아닌 알타누스의 성기사단으로 활동하는 애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나름 고개가 끄덕여 지기는 한다.

템플러랑은 다른 기관으로 특수한 예복도 다 같이 입고 있으면 멋은 있겠지.

이처럼… 지금의 현대는 전체적인 타임라인이 비슷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딱히 이기영이라는 사람을 잊은 게 이상한 상황도 아니고, 아쉬워할 만한 상황도 아니다.

어차피 전부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니까.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아쉬워하기보다는 박수를 쳐야 함이 옳다.

내 눈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갔다는 건….

‘이타누스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거지?’

아직 실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확정된 미래처럼 작동을 하고 있는 거라면 오차나 변수 따위는 없고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봐도 되는 거잖아.

‘역시 이기영이야.’

계획에 빈틈 따위는 없지.

생각한 것만으로도 미래를 확정지어 버리지.

‘역시 이기영이라구….’

하지만….

고개를 끄덕여야 함이 옳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이 뻗치기는 한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섭섭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온다.

‘조금 정도는 저항해도 되는 거 아닌가?’

잊을 수 없어. 라면서 발버둥 좀 치는 클리셰는 없었던 건가.

아직 8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 잊어버리는 건 조금 너무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이렇게 쉽게 모든 게 달라져도 되는 건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버텨줘야 되는 거 아니야?’

딱 10분 정도 남은 시점에 아슬아슬하게 잊는 그림이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었을까? 하얀이는 아직 날 안 잊었겠지? 누나도 기억하고 있을 게 분명하겠지.

아니, 하나라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잊혀지는 건 조금 비참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야.

“유대감은 다시 쌓으면 돼.”

이기영과 파란은 아니겠지만.

알타누스와 신성기사단으로 쌓으면 돼.

아직까지 또렷한 방법은 생각나지 않지만 던전 공략이 끝난 이후, 파란 신성기사단이 철의 처녀에서 나를 꺼내준 이후 기억을 돌려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사제님… 괜찮으십니까?”

“…….”

“사제님.”

“제가 뭐요?”

“방금….”

“별일 아닙니다.”

“네? 하지만….”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자꾸 불편하게 왜 물어보고 그러세요? 사람 화나게… 그것보다… 이후 계획을 말씀드려야겠네.”

“바하무트 님을 맞이할 장소를 찾아야 한다고….”

“네.”

드락타리스도 끝냈고, 템플러 제니도 끝냈다.

바하무트만 마무리하고 베니고어랑 대충 아름다운 이별 마무리만 해주면 이기영의 서사는 끝이 난다.

메텔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했으니까.

“제가 뭘 하면….”

“악마를 소환할 겁니다.”

“네?”

“악마 소환이요.”

“네?”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요. 악마 소환이요. 저는 소환 의식을 진행하기에는 마력이 부족해서… 메텔 님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 같고요. 아니, 도움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메텔 님의 임무가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왜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에요?”

“…….”

“어차피 우리 메텔 수호자님 역할은 균열의 수호잖아. 악마를 소환하든, 악마 부모님을 소환하든 별로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균열이 열리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거기서 뭐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제게서 배울 프로그램이랑은 별개로 악마랑 계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계약서만 잘 보면 영혼을 빼앗길 염려도 없고… 오히려 위에 있는 루키페르 같은 신들보다 좋은 경우도 더러 있어요.”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겠는데. 메텔 님이 생각하시는 거 그런 거 아닙니다. 내가 날개 보여줬었나?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기는 하지만 저는 악마보다는 천사에 가까운 사람이에요.”

“…….”

“일이 끝나는 대로 메텔 님은 균열을 막는 일에 집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륙이랑은 별개로 거기서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가능하다면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보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이걸 넘겨드리겠습니다. 현재 시점으로는 오버테크놀로지라 전부 다 드리지는 못하지만… 수호자님이 원하시는 건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가능하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 입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 하지만 내가 위로 올라가게 될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대륙을 관장하는 신이 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정신 나갔군요.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나는 날개를 꺼내 들었다.

더 이상 눈치 봐야 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미 확정된 미래야.’

조금 무리수를 던지기는 했지만 눈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

“…….”

당연히 메텔은 나를 바라본다.

“이제 믿을 수 있겠어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리다 이내 조심스레 말을 해온다.

“당신은… 도대체 누군가요?”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어차피 대륙은 균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러 벌어지기도 한다고. 제가 누굴 거 같아요? 처음에 들었던 목소리는 기억나요? 신탁처럼 느껴졌던 그 목소리? 어떻게 생각하든지는 수호자님 마음이에요.”

“…….”

“불쌍한 어린 양아. 나는 너희들을 가엾이 여겨 과거로 찾아온 희생과 부활의 신이며 루키페르를 대신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반은 농담으로 이야기했지만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내 터무니없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얘는 나한테 퀘스트를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나 균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 의심을 품을 수 없게 만드는 겉모습이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함.

눈에서 빛이 나오는 기믹이 없어진 게 아쉽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건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신성을 품은 성자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비현실적이며 초월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반쯤은 진실입니다.”

“…….”

“믿어요?”

“네….”

“정말?”

“잘은 모르겠지만… 저도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왠지… 왠지 믿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거면 됐어요. 그리고 예전에 했던 말 좀 정정할게.”

“네.”

“처음에 만났을 때 기억하십니까? 제가 저에 대해서는 잊으셔야 한다고 말했잖아요?”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거 취소할게. 잊지 마요.”

“…….”

“잊어버리지 마세요.”

“네. 잊지 않겠습니다.”

저 말을 들으니 갑자기 화가 난다.

‘시바….’

메텔의 모습이 김현성과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김현성도 시바 잊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기는 했었어.

‘시바.’

그러고 보니까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분명히 잊지 말라고 이야기했었지. 그게 갑자기 기억이 나.

‘시바. 이래서 정 줘도 소용없어요.’

불현듯 떠오르니 다시 한번 이가 으득으득 갈리기 시작.

‘이 새끼들 나 없이 행복할 것 같아?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내가 생각하고도 확신이 없기는 하다.

얘들이 겪고 있는 정신병 한두 개 정도는 모두 이기영이 만든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준 게 많기는 했어.’

사소한 정신병 하나에서 두 개 정도 안겨준 거 감안하고도 내가 해준 게 많기는 했다고. 정신병이랑 별개로 복지는 좋았잖아.

‘지금 아마 엄청 불행할 거야.’

이기영 없으니까 평범한 일상 따위는 꿈도 못 꾸겠지. 이기영 없는 불행한 던전 공략을 진행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내가 알타누스가 된 이후에 괘씸한 녀석들의 복지에 조금 신경을 써주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얘들이 전보다 행복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나보다 걔네들이 더 불행할거야.

* * *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거 현성이 형씨.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해도 되는 거요? 아무리 그래도 공략 도중이라니까!”

“그게 우, 우, 우리 모토니까요. 언제나 즐겁게….”

“하얀이 누님 말이 맞기는 하지. 언제나 즐겁게… 거 좋은 말이라니까. 상황이 조금 힘들어지기는 했지만… 뭐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요. 언제나처럼 말이요.”

* * *

걔네도 나만큼 불행할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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