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87화
알타누스 (24)
엄밀히 말하면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등급 외로 분류되어 있는 두더지 성자의 안식처의 난이도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던전 연구가들과 전력분석관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애초에 계획했던 일들이 모두 틀어져 버렸다.
이 던전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공략할 수 없다. 아마 원정대에 들어온 모두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몬스터를 잡는다고 해서 공략되는 게 아니야.’
뜻 모를 말들을 내뱉는 던전 보스들, 이해할 수 없는 이상 현상들….
다른 무엇보다도… 어느 순간 모자이크처럼 분열되고 있는 공간들이 신경 쓰인다.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 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인 광경.
던전 곳곳에서 보이는 그 공간은 분열하고 합쳐지고를 반복하거나 조립되고 해체되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던전에 관련된 학위를 받은 박사들이나 마법사들도 정확히 증상을 찾을 수 없는 이상 현상.
마력도 아니었고 신성력은 더욱더 아니다.
“대, 대… 대륙이 하나의 거대한 프로그램이라고 가정한다면 저 공간들이 이 프로그램을 수정하고 있는 걸 거예요.”
“그렇습니까?”
“저, 저도 정확히는 알… 알 수가 없어요. 조… 조금 더 자세히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예… 예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 님. 마법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건 어떠세요?”
“아! 그, 그렇지. 고마워 소라야. 그… 그러니까. 소환마법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이 경우에는 소환수를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통째로 불러오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여서… 아니, 불러온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이동하는 있는 건지, 아니, 내보내고 있는 거일 수도 있으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시공간이 뒤집히고 있는 거일 수도 있고…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아무래도 연구를 더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충분히 들여다보셨어요. 정하얀 님. 저 이상한 공간에 너무 집착하고 계신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는데….”
“…….”
“아, 아니야, 소라야.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데… 아! 아무튼 지금 현성 오빠와 제가 밟고 있는 보고 있는 저 이질적인 공간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균열 박물관에서 봤던 균열 너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동 시간대에 다른 세계일 수도 있고 저희가 알 수 없는 과거나 미래일 수도 있어요. 물론 이것도 가설이에요. 이건 마법이 아니거든요.”
“시공간이 바뀌고 있는 도중이라고 판단해도 되는 겁니까?”
“네. 아마도….”
어쩌면 던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기믹일지도 모른다. 던전이 오랫동안 잔존하며 생긴 부작용이라든가. 던전 공략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정황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 그보다, 오빠. 알, 알타누스 님의 목소리를 듣지는 않으셨나요?”
알타누스 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원인일지도 모른다.
“네. 아직까지는… 다른 말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하얀 씨도….”
“네.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바, 바쁘신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거, 현성이 형씨가 또 알타누스 님을 화나게 한 거 아니요?”
“…….”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희영 누님도 그리 생각한다는 거 아니요. 도망가라는 신탁을 받았는데도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죽을 뻔해서… 그때 알타누스 님이 일 년 동안 말도 안 걸었었지 아마. 쓸데없는 공물을 바치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 이상한 가방 계속해서 바치다가 석 달 좀 넘게 잠수 타셨고… 아니, 알타누스 님이 그 가방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직접적으로 표현하시지는 않지만 알타누스 님은 기뻐하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알타누스 님께서 직접 그 공물을… 선택하시지 않았습니까?”
“거. 굳이 공물 같은 거 줄 필요 없는데. 정 주고 싶으면 그거 하나 달라고 말했던 것뿐이잖소. 우리 단장님은 다른 곳에서는 융통성 넘치는 사람인데… 알타누스 님만 관련되면 영 융통성이 사라지는 것 같다니깐. 물론 누님도 마찬가지지만….”
“저… 저는 믿음이 확고할 뿐인걸요. 확고한 믿음이요. 융통성이 없는 거랑은 조금 다르죠….”
“여기서 믿음이 확고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 전부… 알타누스 님의 인도 아래 이곳에 모인 사람들 아니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얀이 누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소라 후배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희영이 누님이나 혜진이 누님, 신입 길드원들도 전부… 알타누스님의 인도 아래 모였으니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시고 우리를 달라지게 만든 분이잖소. 다른 사람들도 다 성장하기는 했지만… 특히 우리 단장님이 많이 변했지.”
“단장님께 무례한 언동은 삼가….”
“거, 혜진이 누님은 너무 딱딱하다니까. 알타누스 님께서도 혜진이 누님한테는 좀 풀어지라고 했던 거 기억 못 하는 거요?”
“괜찮습니다. 혜진 씨. 조금 창피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모두가 조금씩 미소를 보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튜토리얼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좁은 틈에 기어들어 가 숨어 있었던 때의 이야기.
마냥 웃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가족 같은, 아니, 가족들과 함께 나누기에 좋은 이야기다.
튜토리얼 때와 지금의 갭이 재미있는 거겠지. 부끄럽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신도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자그마한 치부를 공유하면서 웃을 수 있다는 것도 모두가 가족이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이야 웃을 수 있는 이야기지. 처음에 거기 숨어서 벌벌 떨고 있던 걸 생각해 보면 지금의 단장님이랑은 매치가 안 된다니까. 이게 그 나약했던 형씨가 맞는 건가. 당연히 이런 생각도 들 수밖에 없다니까. 지금 이렇게 성장한 걸 보면 노을빛의 성기사는 정말로 전설이요. 예전 일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니까.”
“하하. 아마 알타누스 님께서 저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평생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덕구 씨는 어떻습니까. 알타누스 님께서 내려주신 방패를 잃어 버렸을 때 펑펑 울면서….”
“그… 그건 너무… 그 이야기는 너무 치사한 거 아니요?”
“그때. 아저씨. 정말. 부끄러웠는데.”
“예, 예, 예리도 그렇게 생각한대요.”
“성물을 잃어버린 성기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는지. 그것도 직접 내리신 성물이었는데… 알타누스 님도 얼마나 황당했으면… 할 말을 잃었겠어. 뭐라고 하지도 못하시고….”
“…….”
“나. 그때. 정말로. 덕구 아저씨. 이단 심문할 뻔.”
“하하하하.”
“아니. 알타누스 님이 덕구 아저씨를 아끼지. 않았으면. 정말로 천벌이라도 내렸을걸. 왜 유독 아저씨한테 약한지. 모르겠단 말이야.”
“저, 저도 속으로… 성물을 잃어버린 건… 조, 조금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어요.”
“하얀이 누님까지….”
매번 비슷한 패턴이기는 했지만 언제나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이제는 소중한 일상이 된 것 같은 장면.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또 옛날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정… 연 누님.”
“단장님이 우리 귀여운 남편 또 괴롭히셨나 보다. 그리고 여보. 아직도 누님이 뭐예요. 결혼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여보, 자기라고 부르기가 아직도 부끄러워요?”
“…….”
“덩치는 산만 해서 이상하게 부끄러움이 많다니까….”
“큼… 큼….”
“아무튼… 흠… 흠… 식사 준비된 것 같다고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다른 분들께서는… 어떻습니까?”
“진 군사님은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고… 조사해 볼 게 있다고 여기저기를 서성거리고 계시고… 용병여왕님께서는 간단히 하실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전에 후퇴하신 게 마음에 들지는 않으시나 봐요.”
“그렇군요.”
“아! 그리고 오늘 무슨 날인지 식단이 잘 나왔더라고요. 교황님께서 힘을 조금 쓰셨나….”
“그럼 식사하러 가기 전에….”
“네. 다른 단원들도 전부 불러올게요.”
언제나 같은 행사다.
식사하기 전, 원정을 떠나기 전, 잠에 들기 전에,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알타누스의 성기사단만이 시작하는 작은 행사.
기다렸다는 듯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머지 단원들이 돌아왔다.
엘룬의 사제였지만 알타누스 님의 신도로서 살아가기를 결심한 엘레나 님.
같은 시기에 길드에 들어온 아영 씨와 이단 심문관으로 활약하고 있는 창렬 씨. 알프스와 신입 길드원 벨리에.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모든 길드원이 전부 자리를 잡기까지 잡담을 나눈다. 힘든 상황이기는 했지만 다들 기분이 좋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다.
“전부 다 모인 거요?”
“한 명이… 안 보이는데….”
“아! 리안 씨 저기 오시고 계시네요.”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장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오히려 기사단의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자리를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손을 잡고 원을 만든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함께 기도문을 외운다.
알타누스 님에 대한 감사함, 우리들을 선택해 주시고 함께하게 하심에 대한 감사함.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만들어주심에 대한 감사함.
말로 전부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 감정들을 단어 하나하나에 담아 외운다.
“언제나 대륙을, 우리들을 보살펴 주시는 감사함에….”
“언제나 대륙을, 우리들을 보살펴 주시는 감사함에….”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따르지 않는 자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따르지 않는 자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할 수 있게….”
“있게….”
아마 모두가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알타누스님이 매번, 매번, 하시는 말씀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기도문을 외우고 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양들아.’
“해주시옵소서.”
‘아니… 내 새끼들… 내 자식들아. 나는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
“…….”
‘너희들이 가족처럼 지내며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단다. 언제나 서로의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란단다.’
“해주시옵소서.”
‘가끔은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너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닥쳐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들을 믿는다. 모두가 함께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단다. 그러니 나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언제나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서로에게 공감하거라. 보잘것없는 나 역시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
“알타누스시여.”
‘나는 언제나 너희들이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단다. 그러하니 나의 자식들아… 너희들에게 주어진 일상을, 평범한 하루하루 소중하게 즐겨 주기를 바란다. 고난과 시련이 찾아와도 웃으며 이겨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단다. 내가 너희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것들을 소중히 여겨… 아끼고 즐겨주기를….’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항상 웃게 되기를….’
“언, 언,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알타누스 님. 저희들을 보살펴 주셔서 너무나… 감, 감사합니다.”
‘즐겁게… 또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란단다. 그게 나의 위안이자 바람이란다.’
“…….”
‘내 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언제나 가슴속에… 내 말을, 나의 진심을 새기고 내가 너희들을 사랑함을… 아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절대로… 두 번 다시…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나의 신이시여.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
“…….”
“…….”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