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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91화 (1,01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91화

사교회의 끝 (2)

‘악마의 씨앗.’

그것이 자신의 몸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멍청해서 다행이야.’

아니, 녀석이 멍청한 것이 아니다. 이쪽의 작품이 죽여준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쌓아 올린 결과물, 완벽한 소품과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스토리텔링, 초반에 심어놨던 떡밥을 자연스럽게 회수한 각본.

하나부터 열까지 딱딱 들어맞았던 그 모든 것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거라는 판단이 선다.

찰나, 녀석의 정신을 홀리게 만든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선보였던 날개와 금안.

테라스에서 있었던 작은 이벤트는 사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없어서는 안 될 맛있는 재료가 되어버렸다.

‘아마 허겁지겁 퍼먹었을 거야.’

내 정체를 신의 현신, 혹은 신의 아바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 밀고 있는 설정은 대륙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의 직위를 버리고 내려온 천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 그들의 아픔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내려온 천사였다.

‘하늘에서 유성별과 함께 떨어진 천사자너.’

물론 이 천사가 처음부터 대륙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천국의 보물 이기영이 내려오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그건 스킵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있다.

여느 때와 같은 천국에서의 무료한 오후… 우연히 하계를 내려다보게 되고 루키페르 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한 템플러를 발견하게 되며 시작되는 이야기.

그의 모험에 울고 웃으며 공감하며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본 천사의 일상에 찾아온 작은 변화, 그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되는 신화와도 같은 장대한 서사.

그가 타락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대륙이 무너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결단. 언제나 그렇듯 자기희생으로 마무리되는 감동적인 스토리.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그 스토리가 바로 결정적인 이유, 그 이유를 눈 앞에 둔 놈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비밀을 마주한 자의 심정을 어떻게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악에… 악에 굴복하지 마세요. 바하무트 님.”

“사제님….”

어쩌면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상처 입은 천사를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구하고 싶은 심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힘과 힘의 싸움이 아니다.

성스러운 힘과 부정한 힘의 대격돌.

천사와 대악마의 싸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에너지.

인간을 벗어난 초월자들의 싸움.

사기와 사기의 빅매치.

녀석의 머릿속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싸움일 리가 없다.

성스러운 횃불을 치켜들자 빛이 어둠을 물리친다. 거울로 빛을 반사하며 최대한 어둠이 공간을 잠식시키는 것을 막는다.

물론 어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빛을 위협하며 이 공간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발버둥 친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빛과 어둠의 땅따먹기는 그 어떤 전투씬보다 숨이 막힐 듯한 광경일 것이다.

어차피 허상이니까 조금 멋들어지게 빛을 조종해도 괜찮다는 거지.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어둠의 화살이 순백의 날개를 노린다.

빛의 거울을 들어 올리자 커다란 빛의 방패가 어둠을 집어삼킨다.

검은 낫과 횃불이 부딪치는 순간 횃불에서 떨어진 빛의 파편들이 다시금 어둠을 향해 쏘아진다.

저렴한 액션씬으로는 감히 따라올 수 없는 화려한 가상 그래픽 전투. 눈앞에서 펼쳐지는 4D그래픽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새끼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로 이 모든 상황을 눈에 담고 있지 않은가.

‘벨리알. 이거 개싸움으로 보이지는 않겠죠?’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구역질 나는 천사여. 인간은 본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다. 저 바하무트라는 인간이 종을 초월한 것은 확실하나 그 역시 인간이지 않은가. 우리의 격을 느낄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걸 장난질로 보고 있지는 않겠지. 격이 높은 자들이 이런 장난질을 치고 있다는 걸 예상 못 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럴듯하게 보일 거라는 건 확실한 거죠?’

[내가 장담하지.]

원시인이 신문물을 접한 거라고 비유하면 조금 오바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비추어질 여지는 있다.

-악의 씨앗이 개화하리라! 하하핫! 오늘 이곳에서 대륙의 멸망이 시작될 것이니!

“네… 네 생각대로 될 것 같으냐!”

-발버둥 쳐 보거라. 대륙을 위해 스스로를 버린 천사여! 웃기는구나! 하하하핫! 정말로 웃기는 이야기야! 악마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보호하려고 하는 천사라니! 하하하하하!

“으윽….”

[심지어 그는 그대가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마음이 잘 맞네요.’

-발버둥 쳐도 이미 늦었다. 내 눈에는 보인다. 가련한 천사여. 악마의 씨앗이 이미 그를 잠식한 것이 보인단 말이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습니다. 바하무트 님!”

악마대군주의 말이 맞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어둠이 쏟아진다. 실제로 바하무트는 현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자리에 서서 몸도 꿈쩍 못 하는 것이 시야에 비치는 중.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녀석만 느끼고 있지 못할 뿐이다. 실제로 놈의 몸에서 자라나고 있는 악의 씨앗은 실시간으로 내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니까.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광경에 움찔거리는 녀석이 시야에 비친다. 물론 피드백은 즉각적이다.

‘어? 움직였어? 지금 살짝 움찔거린 거 맞아?’

그럼 시바 빛기영 날개 하나 더 부러지는 거야. 너한테서 터져 나온 악마의 기운 때문에 나만 죽어가는 거야.

정체를 알 수 없는 파동이 순간적으로 터져 나와 날개를 꺾는다.

“아악!”

-하하하하핫! 눈물 나는 광경이로구나. 어리석은 천사여.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아무리 생각해도 네놈은 이해할 수 없는 머저리다.

“으으윽….”

공중전도 한번 보여줘야지.

기왕 날개 꺼내봤으니까. 화려하게 나는 모습도 한번 보여줘도 좋을 것 같다.

‘아. 시바.’

아쉽지만 이것만큼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수많은 어둠의 송곳을 피하려다 잘못 퍼덕거린 죄로 땅바닥에 고꾸라진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고꾸라지는 장면이 제법 잘 뽑혔다는 것.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러웠어.’

오히려 더욱더 처절해 보여 멋진 그림이 나올 것만 같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이미 몸은 만신창이, 성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신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왜 무섭지 않겠는가. 상대는 악마대군주,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신성한 횃불은 조금씩 불이 꺼져가고 있었고 여신의 거울 역시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대륙을 사랑한 천사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도망… 도망치십시오. 사제님. 저는 괜찮으니….”

들리지 않아요.

“사제님… 도망치십시오.”

제가 도망갈 리가 없잖아요.

“안심하셔도 됩니다. 바하무트 님. 제가… 제가 당신을 지킬 테니까요.”

힘없는 미소.

“저를 위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정말로 제 안에 악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맞다면….”

“아니요. 하아… 당신은 아직 악의 씨앗에게 먹히지 않았어요.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 믿고 있어요. 하아… 하아….”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타락하는 건 무섭나 보네.

루키페르의 성실한 종으로서 모시는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놈이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겠지.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었던 대륙의 영웅도 루키페르의 가장 강한 검이며 대륙의 기둥이었던 팔라딘도 타락은 무섭다.

놈은 그 공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불안함에 가득 찬 눈빛만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스스로 신을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저주에 가까운 주박에 영원히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래서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세뇌 교육이 무섭다.

긴 침묵이 흐른다.

당신은 아직 악의 씨앗에 먹히지 않았다는 말을 단순한 위로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더 이상 상처받는 예언의 천사를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일까.

차라리 자신이 어둠에 먹히는 것이… 예언의 천사의 고통을 줄여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

“…….”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영웅에게….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영웅에게 한마디 해줘야 겠군.]

‘바로 그거지.’

긴 침묵 이후에는 조용히 말을 건네기 시작.

“당신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

“그대다운 모습이 아니에요. 언제나 당당하고 당신의 모습이 아니네요. 제가 지켜본 당신은 조금 더 용기 있고…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는데….”

“…….”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

“하늘에서… 당신의 일대기를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루키페르의 검으로서, 대륙의 기둥으로서, 수호하는 자로서, 많은 책임을 등에 진 영웅으로서의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당신은… 바하무트 님께서는 언제나 이 땅에 빛을 피우셨습니다. 많은 시련과 위험이 있었지만, 결국 바하무트 님께서는 루키페르 님이 빛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사제님….”

“조금 더 일찍 말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바하무트 님. 이런 모습을 조금 더 빨리 보여드리지 못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조금 더 일찍 눈치채지 못해 죄송합니다.”

“…….”

“저는… 저는 믿고 있답니다. 당신이 악마의 씨앗을 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악의 힘에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한 방울 장착.

“이번에도 이겨내실 거라고… 다시 한번 빛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째서… 저를 그렇게….”

믿어주는 거냐고?

이유는 없다.

단순히 그렇게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확실한 대답을 원할 수도 있지만 기억은 나지 않으니 작게 웃어주자. 때로는 천 마디 말보다 표정이 더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

“으아아아아아!”

‘아 시바 깜짝이야.’

녀석은 울부짖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자신의 안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 씨앗에 대항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뭔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몸 안에 남아 있는 빛이 악마의 씨앗에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가지고 있는 거대한 신성력을 몸 안에서 맹렬히 회전시키면… 악마의 씨앗을 죽일 수 있다고 느낀 것일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바 빵 터질 뻔했네.

당연하지만 어둠은 걷히지 않는다. 시뻘개진 눈, 처절해 보이는 얼굴, 터질 듯한 근육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우스운 촌극은 끝났나 보군… 아니…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하하… 하하하하! 웃기는 군! 하하하하하하하! 대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한낱 인간이… 겨우 인간 따위가… 하핫! 벌레 같은 버러지 따위가 악마의 씨앗에 저항하려 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희생의 천사여!

“그의 빛은 꺼지지 않을 겁니다.”

-쓸데없는 짓이다.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겠어요.”

-설… 설마….

‘그거 너무 연기 톤이었어요.’

[중요한 부분이다. 전달력을 살리려고 했을 뿐이야.]

‘그것도 그렇네요. 존중하겠습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아니, 바하무트 님.”

“사… 사제님?”

“저는 당신이… 당신이 악의 씨앗을 악마의 씨앗을 이겨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

“…….”

“…….”

드락타리스 쪽에서도 한 번 써먹었던 대사.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에요.”

“…….”

“그동안….”

“…….”

“그동안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하지 마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하지 마세요.(0/1)]

“…….”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돌아오세요. 제발… 제발….(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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