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992화 (98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92화

사교회의 끝 (3)

‘뭐야 이건….’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0/1)]

‘이거 누구야?’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돌아와 주세요.(0/1)]

‘어떤 놈이 보낸 거야?’

물론….

물론 대충 예상이 가기는 했다. 어차피 이런 퀘스트를 보낼 수 있는 인원은 한정적이었으니까. 알타누스 성녀일 리는 없고 루키페르일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미래에 있는 인원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녀석이 어떤 방법으로 내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시간상으로 다른 시대에 있는 사람에게 다이렉트로 이런 종류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쪽이 괜히 사물을 이용해 진청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제 퀘스트는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기영 씨가 있어야 할 장소는 그곳이 아닙니다.(0/1)]

아마 김현 뭐시기일 것이다.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 것 같기도 한데… 분명히 거짓말을 입에 담고 사는 노을빛의 김 뭐시기일 확률이 높다.

연결이 끊어지기는 했지만, 이 개연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영혼이 한 번 연결된 적은 있었으니… 내가 모르는 방법을 찾아내거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변수 때문에 일어난 일이겠지.

‘기억해 낸 건가?’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윽고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던 감각, 이전에 한 번 박살 났었던 유대감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것과 굉장히 유사하다.

꽉 닫혀 있었던 벽을 뚫고 들어온 그것은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는다.

그리고….

“…….”

눈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해.

모스부호도 뭣도 아니지만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눈.

조금씩 이어지는 미약한 통증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계속해서 눈동자의 색이 바뀌고 있지 않을까.

본래의 색과 검은색을 오가며 계속해서 빛을 뿜어내고 있을 것이다. 마치 전등의 불을 깜빡거리는 것처럼 말이야.

조금 황당했던 것은 이쪽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흥분하고 있는 쪽이 있었다는 것.

“으… 으아아아아아아아!!”

‘이 새끼… 진짜.’

어느덧 신성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금안이 힘을 되찾고 있는 게… 본인이 맹렬하게 악마의 씨앗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까보다 더 큰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맹렬히 신성력을 퍼뜨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괜히 오바 하지 마. 괜한 희망 가지지 말고 이야기의 끝을 받아들여.’

“크어아아아아아아아!!”

‘아니, 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라니까.’

아니, 시바 작별 인사까지 했는데. 그동안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라는 말까지 내뱉었는데.

막 엔딩으로 닿을락 말락 하고 있는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뻘쭘해진다. 완벽한 이별은 없지만 방금의 분위기는 완벽한 이별에 가장 가까웠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더럽게 시끄럽네. 진짜.’

물론 녀석의 발악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시끄러운 기합 소리에 데시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희생의 천사의 몸에는 점점 상처가 생겨난다.

날카로운 검은 창들이 피슉피슉 소리를 내며 나를 지나치거나 공격한다. 이미 내 주변에는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져 있다.

기합을 내뱉었던 녀석은 자신의 행동이 의미 없는 발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놈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내 몸에 상처가 늘어날 뿐이다.

“아… 아아….”

하는 절망적인 소리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희생의 천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움직이는 게 이상할 정도로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빛의 거울로 어둠을 밝히며 나아간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경건하고 성스러운 모습, 할 말을 잊게 만들 정도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

어둠을 빛으로 밝히며 고행길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모습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성한 의식을 떠올리게 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희생의 천사여! 하핫… 하하하핫! 정말로 가련하고 멍청하구나. 악마의 씨앗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생각인가. 자신을 고행의 가시로 밀어 넣으면서까지 이 자를 지킬 이유가 있다는 말이냐!

쟤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평생을 고통받을 것이다. 희생의 천사여. 영겁의 고통이 네놈을 따라다닐 것이다. 네 녀석을 아끼는 이들은 전부 네놈을 잊고 결국 너는 혼자 남을 것이다. 이 그릇을 위해서라니…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빛을 지켜온 천사의 마지막이 악의 씨앗을 위해서라니!

이 서사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바하무트를 위한 친절한 설명.

자연스럽게 녹아든 대사 때문인지 녀석 역시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겠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이곳을 버리지 마세요.(0/1)]

버리는 게 아니야.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이 모든 걸 두고 가지 마세요.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기영 씨를… 이제는 전부 끝났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짐이라도 함께 들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고 하셨잖습니까.(0/1)]

‘얘 참 시끄러워.’

그래도 발걸음은 옮겨야지.

횃불이 비추고 있는 길의 끝에 있는 철의 처녀가 보인다.

어두운 공간 안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가 들어간 이후에는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대륙을 위해 스스로의 날개를 꺾은 천사가 들어간 철의 처녀인데. 모르긴 몰라도 인테리어 정도는 새로 해주겠지.

빛도 막 뿌려주고. 도금도 해줄 거야. 보석 같은 것도 박힐지도 몰라.

-그래. 그 고귀한 정신은 인정해 주겠다만… 이 내가 네놈 생각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내가 네놈의 발악을 두고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악의 씨앗은 개화할 것이다. 종국에는 이 대륙에 피와 멸망을 가져올 것이다.

“…….”

역병의 겁화가 쏟아진다.

몇 장 남지 않은 날개로 몸을 보호하며 다시금 발걸음을 내디딘다.

치이이이익 소리가 나지만 희생의 천사의 눈빛은 죽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이지만… 힘겹게 내디딘 그 한 걸음에 기어코 빛의 족적을 남긴다.

‘나 조금 김 뭐시기 같자너.’

대륙의 영웅 말이야.

이렇게 대놓고 악마의 힘과 정면충돌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것도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해 보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신성해 보인다. 희생의 천사는 이미 저항할 수 없는 상태다. 언제나의 클리셰 그대로 육체는 이미 한계를 맞았다.

스스로를 희생하는 영웅은 종국에는 정신력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 정석.

공간 전체를 뒤덮는 어둠의 깃털이 파바바박 소리를 내며 이쪽을 뒷걸음치게 만들려고 시도해 보지만….

몸을 꺾을 수 있을지언정 마음은 꺾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은 날개를 내버려 둔 채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 발자국을 더 전진한다.

이쯤 되면 등장해 줘야 하는 대사가 하나 있지. 브금이 깔리는 타이밍도 딱 이쯤이 좋을 거야.

-어째서!! 어째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어째서!!!

어째서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솔직히 답은 정해져 있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스스로를 희생하지 마세요… 제발… 전부 버리고 떠나려고 하지 마세요.(0/1)]

“하아… 흐윽… 빛은 지지 않습니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두 번 다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마세요. 전부를 없었던 일로 하지 말아요. 이번에도 함께한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0/1)]

아. 좀 방해 좀 하지 마. 집중력 흐트러지게. 지금 중요한 구간이야.

-겨우 그딴… 그딴 이유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내가 그런…

근데 진짜 벨리알 연기 오지기는 해. 진짜. 저 상투적인 대사를 이렇게 소화 잘하는 거 봐.

“당신도….”

-…….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거짓과 선동의 군주여… 역병의 마왕이여… 인간들은 늘… 소중한 무언가를 지킬 때… 하아… 하아… 강해진다는 걸… 말이에요.”

-개 같은 소리!

“저는 바라봐왔답니다. 하아… 아윽… 언제나… 언제나 제 눈으로 직접 봐왔어요. 그들은 약하고… 가끔은 이기적이며… 많은… 많은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언제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아픔을… 슬픔을 딛고 일어선다는 것을 말이에요.”

-웃기지 마라! 웃기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다!

“언제나… 저는 지켜봐왔어요. 바로 옆에서… 그들의 모든 것들을 지켜봤었어요.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얼마나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이제야… 이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그들은 훨씬 더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에요.”

-…….

“저는… 저는 그런 용기가 없어… 도망치고 숨었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크윽… 네노오오오오옴!!!

키사마아아아아아아아!

“어쩌면… 어쩌면 저도… 그들과 가까워졌을지도… 어쩌면 나도…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딜 수 있을지도 몰라….”

진심으로.

정말로….

진심으로….

갤러리가 한 명이라는 게 아쉽다.

그래. 솔직히 조금 유치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 감독은 왕도는 패배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한다.

클리셰가 언제나 먹히는 이유는 있고 현재의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이건 대작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명작이다.

바하무트의 얼굴은 이미 눈물이 고여 있는 중, 자신의 무력감에는 분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천사의 헌신에는 감사함을…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악마의 씨앗에는 두려움과 고통을….

언제나 대륙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바하무트는 그 커다란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불안감에 잠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녀석이 이런 종류의 무력감을 겪어봤겠는가.

“안… 안 돼….”

돼.

“사제님… 사제님!”

아까 작별 인사했잖아. 두 번은 없어. 원래 뒤를 되돌아보는 것만큼 추한 건 없다고.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기영 씨. 제발….(0/1)]

그러고 보니까.

‘커피 한 잔은 마시고 싶었는데.’

일정에 커피 한 잔 마시기 넣는 걸 깜빡했어.

한 잔은… 마시고 갔어야 했는데.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제발….(0/1)]

“…….”

“제발… 가지 마세요.”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당긴다.

‘시바. 벨리알 이 새끼 여기 올 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었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돌아가요. 하얀 씨와 덕구 씨….”

“…….”

“파란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갑시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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