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95화
뿌린 대로 거둔다 (2)
‘이 새끼 납작 엎드린 거 봐.’
절경이네. 절경이야.
‘이 호구쉑. 이거 봐라. 납작 엎드리고 있는 거 보라구. 이거 보여? 이게 결과물이야.’
“드락… 타리스 님….”
이렇게 기분 좋은 광경이 또 어디 있을까.
그 광경은 단순히 숭고하고 성스럽다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 누군가에게는 저절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광경, 또 누군가에게는 주먹을 꽉 쥐게 만드는 광경.
받아들이는 이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모두 이 기적을 만들어낸 교국의 성자를 쫓고 있었다.
쉴 틈 없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던 혈투의 흔적들이 눈에 보인다.
대주교 드락타리스와 긴 시간 동안 싸워왔던 파티원들, 차희라와 박덕구를 중심으로 짜인 인원들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전투에 임한 것처럼 얼굴에는 무거운 피곤이 내려앉아 있다.
그나마 멀쩡했던 것은 체력 스탯이 높은 전위들이 전부.
젊은 피 라파엘이야 언제나 그렇듯 젊은 피 하나만 믿고 버텼던 것 같았지만… 후위의 중심에 서 있던 선희영과 엘레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정신계열 능력의 카운터 역할로 파티에 넣었던 알프스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처럼 보였고 흰둥이는 아예 드러누운 상태에서 헥헥거리기 여념이 없는 상태.
그 외 별동대에 합류한 진청의 똘마니들이야 뒈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지만, 녀석들 역시 반 거지꼴을 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두 번째는 환하게 웃음 짓는 표정으로 말이다. 이 새끼들도 내가 반가웠나 보다.
“형님? 돌아온 거요? 형님!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형님이 올 줄 알았다니까!”
‘그래, 돌아온 거 맞아.’
“자기? 어디서 뭐 하다가 왔어?”
‘희라 누나 오랜만이야.’
“아아… 감사합니다. 엘룬이시여. 정말로 감사합니다.”
‘엘레나 님도 오랜만이에요.’
“이기영 님….”
‘희영이두. 안녕.’
“멍!”
‘흰둥이 갑자기 기운차졌네.’
당연히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쏟아진다. 일일이 대응하지 못해 아쉽다는 감정마저 느껴질 정도.
대충 보니 여기에 처박힌 와중에도 원정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얘네들은 본대랑은 별개로 계속 레이드를 진행 중이었겠지만….’
이들에게도 악마 소환사가 짜놓았던 비열한 계책이 전달됐겠지.
납작 엎드려 있는 녀석을 뒤로한 채로 한차례 눈인사를 건넨다. 모두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박덕구는 이미 울음이 터졌는지 엉엉거리고 있었고, 희라 누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는다.
‘라인업은 내 말대로 들여보냈구나.’
기도실에 있는 인원들은 영웅 등급의 퀘스트 기도실의 대주교를 클리어를 위해 추천했던 인선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었는지, 밀리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 기도실에서 격렬한 전투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솔직히 드락타리스가 가지고 있는 저력에 조금 놀랐을 정도였다. 다른 인선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차희라와 라파엘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좋은 사제들을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역으로 당한 것은 원정대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스쳐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만들어진 장면이 더욱더 의미 있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파티의 위기를 구한 사제. 말 한마디로 보스 몹을 무릎 꿇린 성자. 부정한 이들도 빛으로 정화해 버리는 신성의 결정체.
그 성자가 다시 한번 말을 내뱉는다.
“흐윽… 흐으윽… 드락타리스….”
-당신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오실 날을 위해. 인내하며… 또 인내하고… 살아왔었나이다.
“드락타리스 님….”
-…….
“아아… 드락타리스 님.”
-…….
“어찌… 어찌…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훤칠했던 그 역시 세월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찌하여… 이런 모습으로….”
바하무트와 템플러들이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있었을 때도, 그는 세월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 곳곳에는 주름이 보인다. 턱에는 정리되지 않은 하얀색 수염이 자리 잡고 있었고, 매번 꼿꼿했던 등 역시 굽어 있다.
이전의 모습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자세하게 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많은 시간이… 정말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언의 사제시여.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망령으로 자리해 있다. 육신은 이미 움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찌… 어찌 이렇게 변하셨단… 흐윽… 말입니까.”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의 사제시여. 하지만 언젠가… 언젠가 당신께서 찾아오실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있었나이다. 지하신전을, 이 대륙을, 루키페르 님을 구해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나이다. 아니, 예언의 사제님께서 직접 대륙을 밝혀주실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안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면목이 없어 차마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하지마안… 흐윽….”
울음 섞인 목소리.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변하시다니….’
-여전히… 상냥하신… 마음씨를 가지고 계시….
“…….”
-눈물을 보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언의 사제시여… 저는… 저는… 이렇게라도 사제님을 만나 뵙게 되어… 루키페르 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멈추려고 해도… 시바 눈물이 멈추지 않아.
-정말로 두려웠던 것은 이 몸뚱이가 늙어가는 것이, 힘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의 사제님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흐윽….
“드락타리스 님….”
-꺼윽…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날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작은 방에 숨어 그 폭풍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기만을 기다리던… 제 자신이 얼마나 추악하게 느껴졌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아… 꺼으윽….
“…….”
-그렇게 예언의 사제님을 보낸 이후에… 얼마나… 얼마나… 평생을… 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나이다.
“…….”
-어째서 사제님을 잡지 못한 것인지… 훗날을 도모한다는 말에 숨어… 겁쟁이처럼 방 안에 틀어박힌 저 자신을… 갈가리 찢어 악마들에게 던져주고 싶었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당연히 살아 있어야지.’
-제 유일한 희망은… 언젠가… 언젠가 다시금 돌아와 주실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언의 사제시여.
“…….”
-당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신발에 입을 맞춘 이후 아직까지 무릎을 꿇은 채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회한이 서려 있다. 드락타리스는 과거에 있었을 때도 나를 존중해 준 사람이었지만….
‘신격화하고 있었나 보네.’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비상식적인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이게 당연하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예언의 사제라 자신을 칭한 자.
지하신전과, 대륙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스스로 희생해 빛이 된 자.
당시 지하신전이 이기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드락타리스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약속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언의 사제를 믿고, 그가 한 말을 가슴 속에, 마음속으로 새기며 모두가 원하는 훗날이 오기를,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녀석의 마음 속에서는 예언의 사제의 존재가 점점 커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기다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녀석이 지치면 지칠수록, 드락타리스는 예언의 사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겠지.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을 때도, 육체적으로 한계를 맞았을 때도… 녀석은 언제나 예언의 사제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녀석에 대한 죄책감이 온몸을 뒤흔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바 기분 째지자너. 뿌린 대로 거두자너.’
녀석을 선택한 것이 실수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거 상한가 칠 줄 알았어. 분명히 알고 있었다니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녀석을 일으켜 세운 이후, 녀석을 날개로 안아주는 것밖에는 말이다.
대주교 드락타리스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는… 이제는 괜찮습니다. 드락타리스 님.”
지금 녀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꺼흑… 믿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오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예언의 사제님.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드락타리스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
“이 모든 게 부족한 제 탓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해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녀석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몸에 난 상처들이 순식간에 회복된다.
‘신성력 봐. 시바.’
평범한 신성력이 아니다.
이건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저들은 저의 사자들입니다.”
혹여나 원정대원들을 잊지는 않았을까 싶어 재빠르게 입을 열자. 그들까지 신성력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녀석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억겁의 시간 동안 마음의 짐을 쌓아놓았던 사제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때가… 때가 왔노라.
“…….”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찾아왔노라.
“…….”
-약속의 날이. 심판의 날이 찾아왔노라. 악마에게 영혼을 판 저 간악한 이들을 벌하기 위해, 대륙을 다시 한번 빛으로 물들기 위한 예언의 날이 찾아왔노라. 우리의 믿음을 담은 성스러운 빛이 아직 이 땅 위에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날이 찾아왔노라. 예언의 사제가 말한 그 날이 드디어 찾아왔노라.
땅이 울린다.
쿵!
-깨어나라.
다시 한번 땅이 울린다.
쿵!
-일어나라 빛의 아들들아. 일어나 너희들의 마지막 사명을 완수하라.
쿵!
-악마에게 혼을 판 이들에게 신의 철퇴를!
-아아아아아아!!
쿵!
-악신에게 자신을 바친 이들에게 영겁의 분노를!
쿵!
-이 땅 위에 다시 빛을 찾아오리라는 약속의 때가 밝았노라! 우리의 오랜 숙원을… 풀 때가 왔노라! 예언의 사제의 희생에 대한 보답을! 우리의 영혼을 바쳐 증명할 때가 왔노라!
쿵!
-깨어나라 빛의 아들들이여! 약속의 때가 왔노라!
-약속의 때가 왔노라!
-약속의 그 날이 왔노라!
-빛이 이 땅 위에 있음을 우리들이 증명하리라!
-그의 희생에 보답하리라!
기도실 전체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아니, 기도실 밖에서도 망령들이 모여들고 있다.
내가 아는 얼굴도 모르는 얼굴들도 보인다. 사제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기사들은 발을 구른다.
‘대박 터졌다.’
-예언의 사제를 위하여!
‘너 이 새끼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거야. 드락타리스야.’
-예언의 사제를 위하여!
‘얼마나 존버 했던 거냐구.’
단위가 만년 단위니까. 뭐가 달라도 단단히 다르네.
몸이 바들바들 떨려올 지경, 빛의 성자, 한때 예언의 사제라고 불렸던 빛의 아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을 바라보며….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슬픈 미소를 내보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