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06화
뿌린 대로 거둔다 (13)(삽화)
‘그래. 네가 있었지. 우리 든든한 템플러 제니. 나의 충성스러운 템플러 젠.’
잠깐 잊고 있었어.
‘몇만 년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예언의 사제였을 때도 명예추기경이었을 때도.
언제나 나를 지켜주려고 했던 우정의 기사. 힘들고 외로웠을 때, 의지할 곳이 하나 없었을 때, 자신의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기꺼이 나를 따라와 준 진정한 친우.
성직자가 신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는 것처럼 너 역시 내게 맹목적인 믿음을 보내줬었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게서 등을 돌릴 정도로 너는 명예추기경을, 예언의 사제를 위해 살아왔었어.
물론 꿀꿀이죽과 빗물이 새는 방구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리를 지른 것만 생각하면 당장 손절해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너는 너만의 방식으로 명예추기경을 도와줬었지.
그런 녀석을 내가 잊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우정의 시간과 추억은 이미 영혼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었다.
‘잊지 않았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야.’
녀석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리라. 대주교 드락타리스와 함께, 언젠가 찾아올 그 날을 기다리며 녀석 역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물론 잘못된 길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녀석은 악마와 계약한 것만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역겹고 더러운 바하무트가 자신의 음흉한 계획을 위해 악마의 씨앗을 받아들였을 때, 녀석 역시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템플러 시몬이 거미처럼, 템플러 엑스트라의 황소처럼 변한 것처럼 녀석 역시 자신의 몸을 악마에게 내어준 것이 분명하리라.
물론 템플러 젠과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다른 악마 셋과 템플러 젠은 명백하게 차이점이 존재한다.
가슴 속에 빛을 품고 있었다는 것.
예언의 사제를….
희생의 천사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는 것.
악마가 자신을 좀먹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템플러 제니가 저 힘을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하나.
템플러 바하무트에게… 진정한 악에게 대항할 힘을 가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템플러 제니의 뒷모습이 씁쓸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아니… 예언의 사제님.”
“템플러 제니….”
“이런 모습으로 인사드리게 되어… 진정으로 죄송합니다.”
“템플러 제니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모습은….”
“너무나 오랜 시간을 잊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였어? 그럼 나야 땡큐지.’
“이제는 기억…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템플러….”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젠….”
“옆에서 도와달라는 명예추기경님의… 예언의 사제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구나?’
“아닙니다. 템플러 젠. 그렇게 죄송하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미안한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죄송할 것이다.
언제나 명예추기경은 녀석의 곁을 맴돌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이 희생의 천사는 템플러 젠의 근처에서 그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놀랍게도 내가 짠 설정은 아니다.
‘스스로 짠 것 같자너.’
녀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명예추기경은 내 곁에 있었다고, 단지 자신에게 해가 될까 전생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라고.
언제나 자신을 지키려고 했었다고 말이다. 얼마나 굴욕적이었을까. 녀석이 얼마나 좌절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힘이 부족했던 몇만 년 전처럼 이번에도 이 희생의 천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픈 비밀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무력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이 상황을 바라볼 뻔했다.
“모든 것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템플러 제니. 지금 이렇게 와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이번에는 자신이 이 희생의 천사를, 예언의 사제를, 교국의 명예추기경을, 희생과 부활의 신을 지켜야 할 때.
‘이번에야말로 지켜야 할 때야. 그렇지?’
“이번에야말로…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때.”
녀석은 중얼거린다.
왠지 모르게 처연한 얼굴을 하고선 말이다.
‘이 멍멍이 쉑. 제법 강해. 왠지 모르게 진화의 결이 달라.’
어둠진화라면 어둠진화다. 아니, 명백히 어둠진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형태와 마력이다.
템플러 거미와 템플러 엑스트라, 또 저 바하무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외관의 역겨움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그나마 늑대인 탓에 조금이라도 멋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녀석은 짐승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모습.
찬란한 신성력 대신 구역질 나는 마력이 자리 잡았고, 붉은색 혈액 대신에 검은색 혈액이 흘러내린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능이 정상이야.’
녀석은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둠둠현성조차도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둠현성일 때에는 그게 가능했지만 김현성조차 얼굴과 함께 이성을 날려 버렸다.
악마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녀석에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더 강한 걸지도 몰라.’
템플러 젠이 악마화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녀석에게는 어째서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저 힘을 이성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메리트는 크다. 제어할 수 없는 무기를 제어할 수 있게 된 셈.
템플러 젠과, 템플러 제니가 희생과 부활의 신에게 가지고 있는 신앙, 그 빛에 대한 믿음이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닐까.
내가 알지 못하는 정신적 성장이 있었을 것이고, 템플러 제니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각성 단계를 밟고 올라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거지.
‘든든해. 우리 제니.’
당연하지만 나 역시 녀석의 처절함과 성장에 공감해야 한다.
“템플러 젠.”
빛과 함께 살아가던 녀석이 어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대한 공감.
“흐윽… 흐으으윽….”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배덕감을 이겨내면서까지 성장한 녀석에 대한 대견스러움.
“젠 위험해요!”
저 모습으로 내게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숨기지 않은 용기에 대한 눈물.
“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혼란에 빠졌던 전장은 곧바로 본래의 기능을 되찾기 시작한다.
메인으로 녀석의 시선을 깔아줄 수 있는 괴물의 등장에 조금 당황한 것 같기는 했지만 진 군사는 멍하니 상황을 지켜볼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다.
녀석은 지원할 수 있는 수단은 여러 가지, 템플러 바하무트를 압박할 수 있는 수단도 많다.
늑대의 형태를 한 괴물은 손톱으로 마력을 날리거나 재빠르게 움직이며 녀석의 시선을 끄는 중.
손톱을 휘두르는 방식이나 모양새가 마치 검술을 사용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신성력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커.’
[우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예상외의 적의 등장에 바하무트 역시 당황한 분위기. 두 괴물이 몸을 부딪치자 공기의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한 번의 부딪침으로 인해 힘으로는 안 될 것 같다는 깨달은 늑대는 뒤로 몸을 내빼지만 역겨운 녀석 역시 느리지 않다.
이점은 이성이 있다는 것 하나.
전장에 안개가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개 소환사. 천관위.’
그러고 보니 이 새끼는 요즘 뭐 하고 있었어?
“희라 누나.”
‘아, 이 누나 이미 갔구나.’
붉은 용병의 전사 두 명이 곁에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이쪽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모양.
저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붉은 마력의 전신 역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역겨운 바하무트와 거의 엇비슷한 크기로 형태를 갖춘 붉은 전신은 주먹을 휘두르자 커다란 소리와 함께 녀석이 벽을 뚫고 튕겨 나간다.
순간 거대한 마력 폭탄이 녀석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 사방이 굉음과 함께 소멸되듯 분해된다.
‘하얀이야.’
거대한 늑대는 녀석의 목덜미를 문 채로 발버둥 치고 있지만 바하무트가 손을 휘두르자 튕겨 벽 너머로 나가떨어진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굉음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드락타리스의 망령들은 신성력을 계속해서 뿜어내고 바하무트는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 파편들과 함께 신성력을 튕겨낸다.
정형화된 전투라고 부르면 안 될 것만 같은 전투에 주변이 점점 폐허가 되기 시작했다.
“이… 이걸… 이걸 인간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저 멀리서 갤러리 한 명이 중얼거린 그대로.
마치 개미의 입장에서 인간들이 싸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저들이 휘두른 팔에, 저들이 휘두르고 있는 마법에, 저들의 발걸음 하나에 지형이 뒤바뀐다.
최고 티어의 모험가들의 싸움이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느껴진다. 초월자들 이외에는 이 전장터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색해질 정도.
실제로 불필요한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회군하고 있는 원정대원들이 보인다.
“죽어어어어어어!! 죽어!!! 죽어!!! 이 역겨운 괴물!! 죽, 죽, 죽어!!”
마력의 심장으로 마력을 회복한 정하얀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수백 수천 개의 창이 내려꽂히는 중.
녀석은 자신에게 꽂힌 창들을 마구잡이로 떨쳐내고선 붉은 전신에게 몸을 부딪쳤다.
“하하하하하핫!”
[우으어아아아아아아! 우어아아아아아아아아!]
몸을 가까이 붙인 채로 입에 검은색 마력을 모으던 녀석은.
“희라 누나! 브레스! 브레스!”
템플러 젠의 발차기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붉은 전신을 빗겨나간 검은색 마력에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 여파로 지면이 무너지고 초월자들은 다시 한번 한 층 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내 몸에는 순간적으로 보호마법과 함께 부유마법이 걸린 것은 당연지사. 이미 하얀이는 내 쪽을 캐치하고 있겠지.
문제가 있었다면 아래층도 레이드를 진행 중이었다는 것.
순간적으로 떨어져 내린 후퇴 명령에 스미스 대령을 포함한 인원들은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황소의 형태를 한 괴물은 그렇지 못했다.
템플러 바하무트는 곧바로 녀석의 몸을 잡아 뜯은 이후에 검은색 혈액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이 역겨운 새끼.”
부하의 생피를 받아 마시면서까지 추구한 역겨운 강함.
점점 더 거대해지고 흉측해지는 놈의 몸에는 커다란 뿔이 돋아나고 등 뒤로는 거대한 팔 두 개가 등을 뚫고 나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하무트… 님께서… 너희들을….”
황소는 목이 뜯긴 상태에서도 중얼거리고 있다.
[우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행동은 빠르다.
주먹 한 번에 붉은 전신이 날아가고 녀석이 내뿜은 마력에 늑대는 벌집이 된다.
푸른색 빛을 띤 정하얀의 마법을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지만 내구도는 도무지 깎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괴물이 굉음을 내지르자 지하신전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여파는 현재 전투를 진행하고 있는 초월자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강대한 적.
“바하무트 님! 바하무트 님! 흐윽… 제발… 제발 악마에게서 벗어나세요. 이겨내셔야 합니다!”
나는 정신공격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겨내세요! 지지 마세요! 당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
정하얀이 내게 걸어준 원 형태의 보호막을 두들기면서 말이다.
마치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때.
저 멀리서 노을빛이 비쳐오기 시작했다.
*다음 페이지에 이기연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별첨)
흙수저 : 이기연 웨딩드레스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