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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07화 (99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07화

뿌린 대로 거둔다 (14)

희미하게 비쳐오기 시작한 노을빛이 점점 더 밝아진다.

천천히 그라데이션이 생기는 것 같았지만… 한순간에 장내를 환하게 만든 주황색의 빛이 안개들을 몰아내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늘을 볼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모든 게 벽으로 막혀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위를 바라보게 된다. 하늘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느껴질 리가 없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어처구니없었지만 다른 공간에 들어온 것은 아닌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저 멀리서부터 시작한 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곳까지 뻗어오기 시작.

마치 중요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했을 때 일어나는 특수효과처럼, 노을빛은 이 공간 전체를 포용하고 있었다.

바하무트가 정확히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깐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 왔어?’

아무리 시선을 떼고 있었다고 하지만 바로 뒤까지 다가오는 걸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상태.

처음부터 옆에 있었던 것처럼 녀석은 자연스럽게 주저앉은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 보니 과거로 도망친 이후에 실제로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었지? 그때는 제발 가지 말라고 질질 짜던 울보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의 얼굴은 뭔가 다른 것처럼 보여.

‘이미 돌아왔다 이거지? 이제 과거로 갈 일 없다 이거지?’

화가 난 것 같은 표정,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

당장에라도 한마디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이 순진한 김현성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친우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현성 씨….”

라고 중얼거리자 분노 조절이 된 것인지 한층 더 차분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는 이미 주황빛의 뿔이 돋아나 있다. 등 뒤에도 노을빛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대충 알고 있었던 만큼 이미 전투태세로 진입한 모양, 하지만 당장 전투로 진입할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이쪽을 챙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겠지.

“어째서…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하셨던 겁니까.”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질문이다. 탓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성난 어조는 아니었다.

다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어.

“짐을… 짐을 들어드리고 싶어서….”

명대사의 표본.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녀석의 짐을 덜기 위함, 김현성이 압박감에 얼마나 괴로워했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단.

다시 한번 김현성이 괴로워하지 않도록, 두 번 다시 녀석이 눈물 흘릴 일이 없도록,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도 다시 한번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얼굴이 보인다. 화를 낼 타이밍이다. 이쯤에서 김현성은 항상 흥분하며 화를 냈었지만 상처 입은 성자에게 소리 지를 정도로 모질지는 않다.

과거의 이기영은 온몸이 피투성이였었고, 지금의 이기영 역시 모습이 성치 않다.

다만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과 거친 호흡이 얼마나 녀석이 분노했는지를 알려주는 것만 같다.

‘나도 조금 쫄았어.’

지금 화냈으면 솔직히 조금 무서웠을 거야.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 역시 무섭다. 녀석의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살기가 마력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지금 바하무트에게.

녀석은 틀림없이 주황빛의 악마로 비치고 있으리라.

‘시바. 시바. 시바.’

[우으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바. 시바.’

역겨운 괴물 역시 김현성을 직시하고는 괴성을 내질렀다.

그게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화를 내고 있는 것 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겁을 먹은 짐승이 더 크게 짖는다는 격언을 차용하기에는 놈이 너무나도 이질적인 형태로 보인다.

[우으아아어어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만 좀 해. 그만 좀 울어 진짜.’

제발 쟤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눈이 붉어지고 덩치가 조금 더 커진 것만 같다.

2차 진화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녀석은 곧바로 3차 진화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이래서 김현성은 부르고 싶지 않았던 건데.’

온몸에는 울퉁불퉁하게 흉측한 핏줄이 서고 터질 듯한 근육이 더욱더 부풀어 오른다.

압도적인 폭력을 담은 것 같은 몸, 크고 굵은 팔과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거대한 몸체.

계속해서 뿔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푸확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로 거대한 날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저걸 날개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근육과 핏줄 덩어리를 엮어서 만든 무언가처럼 보였으니까.

‘얘가 미쳐요, 안 미쳐요? 트라우마에 박힌 상대를 만났는데 얘가 안 미치고 배기겠어?’

누가 봐도 광란 상태로 접어든 것 같은 모습.

‘김현성이랑 마주치면 이 지랄 날 거 알고 있었는데….’

순간,

아무 전조도 없이 쏟아진 검은색 마력이 녀석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땅을 가르고 벽을 뚫고 올라간 검은색 마력은 기어코 천장 위로 올라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형체도 남지 않고 녹아버린 던전의 외벽은 결국 던전 밖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김현성은 녀석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몇몇은 그렇지 않다.

차희라의 붉은 전신은 반쪽이 날아간 상태, 마력으로 애써 형태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그 이전보다 형태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은 앞으로의 전투에 치명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템플러 젠 역시 마력에 휩쓸린 것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고, 정하얀 역시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이라고 생각한 모양.

그 가운데 괴물은 발을 굴렀고,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르는 김현성을 막아선 것이다.

‘뭐가 저렇게 빨라.’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굵은 선으로 녀석들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현성이 반응은 늦지 않았지만….’

곧바로 눈을 빛낸 것은 당연지사. 신화 등급의 특성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발동한다면 최소한 시야에 대해서는 유리한 상황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성 씨?

-…….

-현성 씨! 지금….

-…….

녀석이 이쪽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는 것.

‘뭐야.’

너 왜 나 차단해.

“현성 씨!”

왜 이 악물고 무시해?

너 혼자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아까 짐을 들어드리고 싶다는 발언 때문에 삐졌어? 이 정도는 혼자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야?

당장 생각나는 이유는 그것뿐. 이해야 간다. 이 문제는 김현성에게 중요한 것일 테니까.

역겨운 바하무트가 거대한 팔을 휘두르고 노을빛의 검사는 검을 휘두른다.

온 세상이 주황빛과 검은색으로 뒤덮이는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폐허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언제나 먼저 사그라드는 것은 주황빛 쪽.

붉은 전신이 흙먼지 속에서 나와 커다란 도끼를 녀석의 어깨에 박아 넣었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고 몸통으로 붉은 전신을 밀어붙인다.

붉은 전신은 다시 한번 반대쪽 벽으로 튀어 나가고 마치 선수 교대를 한 것처럼 등장한 검사의 검은 녀석의 외갑을 뚫지 못한다.

검은색의 혈액이 노을빛의 마력을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제로도 노을빛에 치명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녀석이 악마의 씨앗에 숨은 것은 모두 주황색의 악마 때문이 아니었던가.

김현성에 대한 대책 한두 개쯤 준비해 놨다고 판단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저 몸 자체가 노을빛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리라.

‘체급 차가 너무 심해.’

신체 스펙은 녀석이 압도적으로 높다. 다른 방법으로 방법을 풀어야 할 김현성에게 놈의 크기는 커다란 벽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으아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제길.”

왜 녀석은 꼭 중요할 때 삐뚤어져서 이럴까.

실컷 얻어맞고 있는 주제에 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물론 충격적이기는 할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당연히 김현성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이기영의 과거행이 자신의 무능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폐를 끼친 것 같았을 것이고, 자신이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으아아아!!!!”

[우으어어!!!!]

‘그래도 힘들어.’

최소한 지금의 바하무트는 김현성보다 강하다.

‘이렇게 꼬이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으며 바닥에 누워 있는 차희라.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하며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정하얀.

이빨을 으득거리며 검을 휘두르지만 제대로 된 유효타를 날리지 못하고 밀리기 여념이 없는 노을빛의 불효자.

‘이건 안 돼.’

애초에 이런 엔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드락타리스를 끌어들인 것은 이쪽에게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이점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바하무트가 악마의 씨앗을 개화시킨 것은 의외였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면 적의 능력치를 너프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교회는 실패 아닌 실패였지만 분명히 목이 날아가 버리는 엔딩을 피한 것만은 확실했다.

‘시바. 그 대신이 피떡 엔딩인 건 조금 그렇잖아.’

[바하무트 님… 바하무트 님… 흐으으윽… 바하무트 님!]

‘너무 미쳐 있어서 그런지 정신 공격도 안 들어가나 봐.’

역겨운 짐승한테 기댄 것 자체가 수치스러울 지경.

‘저러다 우리 현성이 죽겠다, 진짜.’

진짜로 죽겠어.

“그만하세요! 바하무트 님!”

내 새끼 죽는다. 시바.

여리여리한 몸으로 폭음 속을 뚫고 발걸음을 옮긴다.

바하무트가 손톱을 들어 김현성을 찢어발기려고 할 때 난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황색과 검은색의 향연을 뚫고 들어온 빛.

비틀거리며 바닥에 처박혀 있는 김현성에게 손톱을 휘두르려고 할 때,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그 희생 중독자.

바하무트의 동공이 커진 것이 보인다. 잠깐이었지만 녀석의 눈이 붉은색에서 본래대로 되돌아온 것 같다.

“기영… 씨….”

하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영 씨!!!”

그다음에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김현성보다 내 앞에서 녀석의 손톱을 막아준 우정의 기사 템플러 젠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으니까.

“템플러 젠….”

내 몸이 녀석의 검은색 혈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솔직히 알고 있었어. 이 새끼가 대신 맞아줄 거라는 거.’

점점 더 작아지는 제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죄송… 합니다….”

커다란 손톱을 온몸으로 막은 늑대는 곧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거린다.

몸의 반 이상이 구멍이 뚫려 있는 모습, 녀석은 마지막까지 나를 위해 싸웠다.

우정의 기사라 불릴 만했지. 명예로웠어.

“템플러 제니… 아아아아….”

“예언의 사제… 님… 아니… 희생의 천사…. 아니… 명예추기경님….”

“아아아아아… 아아아악!”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았… 는데….”

“흐윽… 흐으아아아아….”

“언제나… 항상… 감사… 했….”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흐윽… 제니… 제니!”

“이전에도… 지, 지금… 도… 모실 수 있게 되… 영광… 이었….”

너한테는 조금 미안한 것 같기도 해.

근데 나한테는 너보다 중요한 게 많은 것 같더라.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은 해줄게.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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