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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11화 (99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11화

뿌린 대로 거둔다 (18)

언제나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

빛과 어둠, 어둠과 빛.

이 두 가지 속성은 공생할 수 없다.

오히려 대립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당연히 대륙의 기본적인 법칙에도 이 공식은 들어맞는다.

신성력은 부정한 마력에 영향을 끼치고, 부정한 마력 역시 신성력에 영향을 끼친다.

말 그대로 이것은 공식이다. 불과 물이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마법, 신성주문, 주술, 연금술, 마도과학, 마법공학, 대륙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을 공부하거나 실험할 때에도 가장 먼저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는 원리. 이미 대륙에서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법칙.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이 세계에 일찍이 자리 잡은 공식이었다.

이 거신의 힘이 내 예상보다 훨씬 강했던 이유는 기존에 존재하던 법칙을 초월했기 때문이라 판단하는 것이 옳다.

서로 대립하는 힘이 합쳐지며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은 이런 종류의 서사에서 일찍이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아니었던가.

‘클리셰지. 클리셰야.’

공생할 수 없는 힘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이유는 당연히 김현성과 내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

녀석과 내 이어짐은 일반적인 공식으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해 있었고, 다른 어떤 법칙들보다도 상위에 서 있다.

긴가민가했었지만 이번 건으로 그것이 증명된 것이리라.

녀석과 내 유대감이 법칙의 위에 있다는 게 말이야.

‘좋은 울림이야.’

하얀 어둠을 밝히는 노을빛의 거신, 좀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그 거신이 점점 더 형태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신성해 보이는 노을빛의 뿔, 하얀 어둠을 보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노을빛의 촘촘한 갑주.

뱀의 형태를 하고 있는 손잡이와 그 위에 길게 뻗어 있는 노을빛의 검신.

거신의 두 눈은, 녀석과 내가 합쳐진 증거라는 것마냥 양쪽 둘 다 금안을 하고 있었다.

[우으어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자신의 잘려 나간 팔을 붙잡고 있는 역겨운 괴물은 위험을 감지하고 있다.

순식간에 잘려 나간 팔은 곧바로 재생되기는 했지만 아마 적잖이 놀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거신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게 당연할 테니까.

‘사이즈만 맞춰지면 돼.’

김현성은 검술의 신이자너.

김현성의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굳이 우리 현성이의 상태를 판단하자면 자기의지를 가지고 있는 꼭두각시. 최면에 걸리기는 했지만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상태라고 판단할 수 없다.

녀석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평소보다 더 맹목적으로 말이다.

거대한 팔이 거신을 향해 쏟아진다. 거신은 힘겨루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스듬히 뉘어진 검은 이해할 수 없는 각도로 휘둘러지며 녀석의 팔을 튕겨낸다.

마치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마찰음이 들려온 이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균형을 잃은 괴물, 곧바로 중심을 잡은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검격은 그대로 이어진다.

처음부터 한 동작이었던 것처럼 막기와 베기가 그대로 전환되는 모습은 놀라운 수준을 넘어 아름답다.

노을빛이 공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거신이 휘두른 검은 궤적이 노을빛으로 남아 있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역겨운 바하무트 역시 인지하고 있으리라.

녀석이 선택한 것은 거대한 뿔로 검을 막아내는 것, 본능스러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우으.]

‘팔도 잘라냈는데. 뿔은 못 잘라내겠어?’

하지만 영리한 행동은 아니다.

콰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친 노을빛의 검과 괴물의 뿔, 거신은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는다.

‘이제 잘리겠네.’

녀석의 꼬리가 거신의 머리를 향해 쇄도한 것은 바로 그때.

‘아까워.’

다시 한번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하얀 어둠을 밝히는 노을빛의 거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쇄도하는 꼬리를 그대로 팔을 들어 검의 손잡이로 쳐낸다.

쿠웅.

충격을 받은 꼬리는 땅에 떨어지자 발악하듯 팔을 휘두르는 녀석. 막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 눈은 전부 저걸 보고 있으니까.

이빨과 뿔, 폭력적인 몸과 네 개의 팔, 부정한 힘의 마력을 형상화하는 와중에도 몸을 멈추지 않는다.

콰득 파득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간이 찢어질 정도로 강하게 휘두른 공격은 김현성은 차분히 막아내고 있었다.

생각과 시야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곡예, 보이지 않는 속도로 거신의 주변을 돌며 묵직한 공격을 퍼붓는 녀석이 커다란 괴성을 내지른다.

몸 곳곳에서 꼬리와도 같은 기관이 튀어나와 거신을 향해 쇄도했지만 그것 역시 허무할 정도로 쉽게 땅바닥으로 처박히거나 잘려 나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거울을 통해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갤러리들도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노을의 검이 남긴 주황빛의 궤적, 이 어두운 지하를 밝히고 있는 궤적이었다.

‘강해. 시바. 현성아 너 왜 이렇게 세니.’

망설임이 사라져서 그런가. 아무튼 바하무트도 참 안됐어.

‘검술 대결이었으면 그나마 할 만했을 텐데. 말이야.’

녀석이 이성이 없는 괴물로 변한 것이 우리에게 득이 된 셈이다.

[현성 씨….]

조용히 입을 여니 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

[너무 잘하고 계시네요.]

“감… 감사합니다. 기영 씨. 감사합니다.”

[그런데… 잘하고는 있는데… 너무 심심하다.]

“네?”

[너무 심심하다고요.]

조금 즐겁게 해보라 이거야.

“아….”

못 알아들었어? 조금 싸늘하게 다시 한번 입을 열어보자.

[심심하다는 말 못 들었어요?]

재주가 있으면 시바 부려보라 이거야.

“죄… 죄송합니다. 열심히… 더 열심히….”

안개처럼 흐릿하게 최면 상태에 들어간 녀석이라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다 꺼내보라고.

아직 거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정확히 정립되지 않았다.

이론으로만 가능했었던 재주들 한두 개쯤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거 보여달라니까. 스킬이나 필살기 같은 거 보여줄 수 있잖아.

멍한 눈을 한 주제에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궤적으로 남아 있던 노을빛의 그림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노을빛의 검이 허공을 그리며 남긴 궤적이 뒤늦게 움직이고 있다.

거신은 검을 휘두른다. 녀석의 공격을 흘리기 위해서,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서, 혹은 틈을 만들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

한참이나 지워지지 않은 주황빛의 형상은, 거신이 양손으로 검을 휘두른 직후에 녀석에게 쇄도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식간에 놈을 향해 날아간 검은 계속해서 엄청난 소리를 내며 녀석의 몸을 베어낸다.

온몸을 웅크리고 부정한 마력으로 방어하기 여념이 없는 녀석, 방금처럼 팔이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괴물의 몸은 쇄도하는 검격에 뒤로 밀려나는 것으로 모자라 파묻히기 시작한다.

이윽고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멋있기는 해.’

흙먼지에 뒤덮인 현장, 놈이 비명을 저지르며 먼지를 뚫고 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보고 있었지만 대처는 늦다. 거신과 괴물은 서로 뒤엉키며 반대쪽 벽면에 부딪힌다.

[하아….]

“죄… 송합니다. 정말로… 죄송… 윽….”

콰드득!

콰아아아앙!

콰직!!

두 번은 없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저 괴물은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양손이 거신을 붙잡은 사이 등 뒤에 돋아난 팔은 마구잡이로 거신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괴물이기는 해.’

내구력, 재생력, 힘, 민첩성, 무엇보다도 호전성과 지치지 않는 체력이 인상적이다.

원정대를 이용해서 먼저 녀석의 내구와 체력을 깎아놓고 시작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번에 땅바닥으로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는 것은 노을빛의 거신 쪽.

마구잡이로 녀석을 내려찍는 바하무트의 주먹이 한 번 내리꽂힐 때마다 던전 전체가 뒤흔들리는 느낌이 든다.

직접적인 대미지는 없지만 거신의 갑주가 계속해서 깨지고 있다.

[하… 진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기영 씨….”

아냐. 네 잘못은 아니야. 괜히 내가 재주 보고 싶다고 해서 이 사달이 난 것 같기도 하고… 굳이 나한테 죄송할 필요도 없는데.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이를 악문 거신이 자신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양팔을 잡는다.

괴물의 주먹이 머리에 박히려는 찰나 고개를 들어 피하고 한쪽 팔을 떼어내며 몸을 일으킨다.

다시 한번 자세를 잡은 괴물이 달려들려고 했을 때는 이미 노을빛의 검이 거신의 손에 잡힌 이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을 세차게 구른 거신이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마찰음이 들려오며 이번에는 괴물이 검을 튕겨낸다.

녀석은 김현성의 움직임을 흡수하려는 듯 방어과 공격을 병행했지만 다시 한번 왼쪽 발을 구르며 휘두른 검에 놈의 팔이 튕겨 나갔다.

훤히 내보인 가슴.

검이 놈의 몸통을 지나간다.

[우으어어아아아아아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온다. 길게 난 상처에서는 검은색 혈액이 흩뿌려진다.

최악의 상황을 직면한 역겨운 괴물이 선택한 것은 물러나는 것보다 전진하는 것.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발을 구른 녀석은 커다랗게 팔을 휘둘렀다.

고통으로 이성을 잃은 것일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공격이었지만 저건 함정이다.

이전에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혈액이 형태를 갖춰 거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김현성은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 정보가 들어와 있었으니까.

전장의 모든 상황을 밝혀주고 알려주는 시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이지 않는 공격을 받아낸다.

이를테면,

이를테면 검은색 혈액의 뒤로 다가오는 녀석의 긴 꼬리라든가.

화아아아악!

가장 기본적인 법칙마저 무시할 수 있는 영혼의 이어짐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놈에게 전달한다.

재주.

김현성이 아까 보여줬었던 그 재주.

거신은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

검은색 혈액을 베고, 곧바로 놈의 몸에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검로.

흩뿌려진 혈액에 숨어 뒤를 노리는 꼬리는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겨 괴물에게 파고든다. 자연스럽게 꼬리 역시 경로를 뒤바꿔 거신의 목을 노리지만 공격은 목이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주황색 궤적에 막혀 그대로 갈라져 버렸다.

[우으아어어어어아아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아!”

회심의 검격은 녀석의 몸통에 박힌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김현성은 어울리지 않는 기합을 내지른다. 그만큼 녀석의 몸통을 가르기 힘들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해서 나아가던 주황빛의 검신은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척추? 아니, 근육에서 막혔나? 시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건가?

[조금만… 조금만 더요. 현성 씨. 조금만 더!]

“으윽… 네.”

[조금만 더… 빨리! 빨리! 시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쪼끔마안 더어요오!]

“네! 으득.”

[힘 좀 줘봐요! 힘 좀 내라니까요? 시바! 너 이 새끼! 시바 이것밖에 안 돼? 이것밖에 안 되냐고!]

“네… 네? 아, 아닙니다!”

[멈추지 마! 멈추지… 시발! 마! 조금만 더… 멈추지 말라고! 이 새끼야! 아! 그래! 그거야! 아아!! 시바!!! 멈추지 말라고 했잖아!]

녀석의 몸통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던 검은 중간에 멈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시바. 시바. 부족해. 아직 부족한데.’

녀석의 재생력을 떠올리면 절로 초조해질 수밖에 없는 시점. 설상가상으로 김현성의 검을 양손으로 꽉 잡은 괴물의 입에서 검은색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바하무트… 바하무트 니임!]

‘깨어나세요. 용사여. 깨어나세요! 시바! 깨어나세요! 용사여!!’

[바하무트 니임!]

‘일어나세요. 용사여! 괴물의 굴레를 벗어던져 버리고! 어서 빨리 와주세요.’

역겨운 괴물의 눈이 잠깐 동안 듬직한 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기분 탓일까.

‘일어나세요. 제발! 당신의 모습을 잃지 마세요! 나의 바하무트!’

녀석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 같이 느꼈다면… 기분 탓일까.

시바 나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지금이에요. 지금! 지금! 현성 씨! 지금!! 지금이라고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막혀 있던 검이 천천히 나아간다. 귀를 울리는 거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지만 검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나아간다.

빠르게 나아간다.

[시바! 시바! 이거야! 이거라고! 현성아아아!! 현성아아아아아!!]

거침없이 놈의 살결과 뼈를 찢고 나아간다.

“허억… 허억… 허억….”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쳐지지 않는 평등한 저울처럼 두 사람의 뜻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승리.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바하무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절대로 끊어지지 않은, 않을 유대감의 승리.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정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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