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13화
뿌린 대로 거둔다 (20)
템플러 바하무트, 과거의 영웅이자 충실한 루키페르의 신도, 그는 빛과 함께 하는 생을 살았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신앙은 그의 삶이자 목표였으며, 평생을 악을 멸하고 정의를 관철하는 것에 열정을 쏟았던 사람이었다.
대륙을 지키기 위해, 빛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녀석은 물러선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신께서 주신 선물이라 생각했으며 결코 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언제나 진실한 신앙을 품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영웅.
그 고대의 영웅이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흐으윽… 흐으으으윽….]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 누구보다도 그의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선택을 지지해 주고 싶었지만 그의 친우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결말.
그의 이해자로서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결말이었다.
[…….]
[아흐으으윽… 흐으으윽….]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저질렀던 한순간의 실수를 잊지 못하는 바하무트.
자신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는지는 그 누구보다도 녀석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
한때 신의 전사라고 불렸던 그가 악마에게 혼을 팔고 육신을 버렸다.
찬란한 신앙 대신 자기혐오와 구역질 나오는 어둠의 힘을.
올곧은 눈은 색이 바랬으며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됐다.
현명한 지성은 바닥으로 꼬꾸라져 빛을 잃고, 결과적으로 녀석은 본능만을 탐하는 짐승이 되어버렸다.
신께서 선물한 붉은 피는 탁해졌으며 그 피에 취해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참혹한 짓들을 저질렀다.
‘이걸 살려고 하면 진짜 사이코패스지….’
드디어 정신을 차란 바하무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감당하기 힘든, 아니 감당해서는 안 돼는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라고, 이걸 떠안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울… 울지 마십시오. 예언의 사제님….]
[흐윽… 흐으으윽….]
바보 같은 사람.
[울지 마십시오….]
[흐으으윽… 흐아아아… 흐윽….]
[슬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저지른 죄는….]
[…….]
[제가 저지른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사제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흐윽… 바하무트 님… 이건 바하무트 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
[바하무트 님의 잘못이라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바하무트 님에게 죄가 있다면 제가 그 죄를 대신 짊어지겠습니다. 함께… 함께 마주하고…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일어나 주세요. 부디… 부디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예언의 사제님은… 언제나… 언제나 상냥하시군요.]
[…….]
[너무나도… 상냥하십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분명 예언의 사제님께서는… 상냥하셨지요….]
[…….]
[그때가… 그때가 기억이 납니다. 처음 뵌 날이 아직도 생생한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래요. 바하무트 님… 저도 분명히 생생합니다.]
[다소 무례했었지만… 말입니다. 힘겹게 건넨 첫 마디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것 같습니다.]
[아니요. 바하무트 님께서는….]
[잠깐이었습니다. 정말로…. 찰나 였습니다만… 그때 저는 예언의 사제님의… 아니, 희생의 천사님의 모습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본 것 같았습니다….]
[…….]
[순백의 날개를 펼친 채로… 금안을 빛내며… 저를 바라보는 모습… 말입니다.]
[바하무트 님….]
[순간적으로 제가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군요….]
녀석은 숨을 커다랗게 헐떡이고 있었다. 재생하는 것이 자신의 의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재생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 같은 검은색 혈액이 침묵하고 있는 모습은 한층 더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바하무트 님.]
슬그머니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해서 놈에게 공감해 주는 것이 이쪽의 역할.
침통한 기색을 숨기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언의 사제는 씩씩함과 꿋꿋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애써 슬픈 모습을 감추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스탠드가 필요한 시점.
마치 바하무트가 죽지 않을 것처럼,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처럼,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믿는 낙천주의자처럼… 바보 같은 웃음을 보이며 긴장감을 덜어준다.
누가 보기에도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모양새. 최악의 상황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기도하는… 바보의 모습이었다.
[기억하십니까? 사제님…?]
물론 바하무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방금까지 눈물을 흘리던 예언의 사제가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녀석은 내색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지막을 희생의 천사와 함께하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겠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하무트 님. 기억하고 말고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답니다. 바하무트 님께서 말씀하신 말 한마디도 말이에요.]
[저도… 저도 그렇습니다.]
[함께 산책을 다닌 일이나… 아! 바하무트 님과 함께 나눈 심도 깊은 이야기들도 말입니다.]
영겁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긴 시간이다. 몇 년 전에 일어난 일도 정확히 기억하기 힘든 것이 인간의 기억력이지만 어째서인지 바하무트 님과 함께한 시간은…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생생하다.
[걸… 걸어다가 크게 한번 넘어질 뻔한 일도요.]
[하… 하하… 네. 그런 일도 있었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항상… 항상 모든 일에 완벽할 것 같았던 사제님께서 의외로 덜렁인다는 것도… 처음 알았….]
[그, 그때는….]
[한… 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잡아드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기억력이 너무 좋으시네요. 그, 그… 그런 추억은 조금 잊어주셨으면 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검술 훈련도… 큭… 큭큭….]
‘살인 검술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우스워?’
[사제님께서 검을 들고 허둥지둥 대는 모습이라니… 하… 하하하….]
[저는 어디까지나… 그…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는데… 분, 분명히 바하무트 님께서도… 열심히 하면 성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하… 하하하… 큭… 하하….]
[거짓말… 이었군요!]
[죄… 송합니다. 하… 하하….]
[정말!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사제님께서… 너무 진지한 모습이라… 차마… 차마 진실을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너무해요.]
[그리고….]
[네?]
[사제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도 편했고 말입니다.]
[…….]
[처음이었습니다.]
[…….]
[지하신전에서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것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도, 말입니다. 누군가와 그토록 오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윽… 평소에…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저는 마치 구원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
[지하신전을 거닐며 웃을 수 있다는 것도….]
[…….]
[시덥지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사교회를…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처음 느껴본 일이었습니다. 모두…. 하하… 기억하십니까?]
‘자꾸 왜 기억하냐 마냐 그래.’
물론 과거를 훑어보고 싶은 녀석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곧 세상을 떠나기 전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수도 있지.
오랜만에 만난 만큼 여러 가지 못다 한 이야기들을 전부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너무 세세했다는 것.
대화가 점점 길어질수록 이쪽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집중하려고 해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
‘이 새끼. 이러다가 뒈지기 싫다고 벌떡 일어나는 거 아니야?’
확률은 적지만 불안한 마음이 앞 선다는 것은 부정 못 하겠다.
‘진도 좀 빼자. 진짜.’
[지루한 사제들을 피해서 테라스로 도망친 것 말인가요?]
[네.]
[당연히 기억해요. 바하무트 님. 도망친 거라기보다는 바하무트 님을 도망치게 도와드린 거지만… 너무 빠져나가고 싶어 하시는 게 눈에 보여서 말이에요.]
[들켜 버렸군요….]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답니다. 함께한 순간 전부요. 물론… 마지막… 순간도….]
[…….]
[마지막 순간도 기억하고 있어요.]
마지막 이야기로 빨리 넘어가자는 불굴의 의지. 자연스러운 빌드업에 녀석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직후였다.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것만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겠지만 전부 말할 수는 없겠지.
악마의 씨앗을 받아들였다느니 악마와 계약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희생의 천사에게 하기에는 면목이 없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인사드리게 되어서 말입니다… 사제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니요. 어쩔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저는… 저는 바하무트 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상관없어요. 빛을 등지게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바하무트 님이 바하무트 님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
그러니까.
[많은 일이 있었겠죠. 견디기 힘든 일이시라는 걸 이해하고 있답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도…. 전부 알 수 있었어요.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여전히… 여전히 바하무트 님께서는 예전과 같이 상냥하고… 자상한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하지만….]
[그건 바하무트 님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바하무트 님의 탈을 쓴 무언가였습니다… 그러니….]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제님….]
[……]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용서를 받을 자격도 없는 멍청한 저를…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녀석은 움직이지 않는다. 눈물도 흘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흐느끼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눈물일까.
아니, 녀석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주황빛의 악마를 쓰러뜨렸고, 자신이 원하는 엔딩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희생의 천사는 결국 그에게 해방됐고 세상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옳은 방법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녀석은 주황빛의 악마를 극복해 냈다.
그 대가로 많은 것을 희생했지….
바하무트는 분명히… 분명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두에게 용서받을 수는 없지만… 한 사람에게는 용서받고 싶었을지도….
[…….]
[…….]
잠깐 동안 침묵에 휩싸였을 때… 바하무트는 자신의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것 같았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예언의 사제는 바하무트와 이야기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그냥 즐거웠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으니까.
이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사제님께서 해주셨던 이야기가 떠오르는… 군요….]
[네?]
[여기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었죠. 정말로…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네제스카 공국에서는 항상 일이 끝난 이후에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했다고 말입니다. 새까만 하늘에 별이 수놓아져 있는 모습은 하루의 피곤을 날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해줬다고… 그게 마치 습관처럼 되어버려.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위를 올려다보고는 했다고 하셨지요.]
[정말로 다 기억하고 계신 건가요?]
[저 새까만 천장이 예전에 보던 것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하무트 님도….]
[사제님. 지금… 지금 보고 계시는 하늘은 어떻습니까?]
원하는 것이 그것일까. 목소리로 천천히 감상을 내뱉는다.
[까만… 까만 하늘이 보이네요.]
노을빛 하늘이 보인다.
[네….]
[너무나도 아름다운 하늘이 보여요.]
[그렇… 습니까? 그렇군요. 아름답군요.]
[바하무트 님도 함께 볼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하… 하….]
[별이 반짝이는 것 같은… 그때 바하무트님과 함께 보았었던… 하늘….]
[네….]
[마치 흑요석 같아요. 야명주들은 별처럼 보이고… 무척 넓고… 한여름 밤 같은… 이상하네요. 분명히… 분명히….]
[…네….]
[네제스카 공국이 생각나네요.]
[…네….]
[언젠가 함께… 네제스카 공국으로 가서….]
[…….]
[물론 지하신전에서도….]
[…….]
[듣고 계신가요? 신기하네요. 얼룩진 것이 마치… 오로라처럼 보여서…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
[그러고 보니 말이에요. 바하무트 님….]
[…….]
[바하무트 님?]
[…….]
[바하… 무트… 님….]
[…….]
[바하… 바하무트… 흐윽… 바하무트 님….]
[…….]
[흐윽… 흐으으으윽….]
[…….]
[바하무트 니임….]
슬픔은 언제나 남겨진 자의 몫.
너무나도 길었던 시간이었지만 서로에게는 찰나와도 같았던 시간.
지독히도….
너무나도 쓸쓸하고….
슬펐던….
여름….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