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16화
뿌린 대로 거둔다 (23)
“그 새끼는 안 돼.”
“네, 네가 뭔데.”
“혜지나. 걔 나이가 몇인 줄 알아?”
“일단은 엘프니까… 나이는….”
“엘프여서 나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 나이 될 때까지 혼자였다는 게 문제인 거지. 연애 시장은 거짓말을 안 해. 하자가 있으니까 매물로 풀린 거라니까. 십 년도 아니고 이십 년도 아니야. 무려 몇백 년 동안 매물로 남아 있었다 이 말이야.”
“…….”
“객관적으로 보면 외모는 나쁘지 않기는 한데… 현성이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봐줄 만하기는 하자너. 그건 인정해요. 근데요, 혜진 씨. 그래서 더 의심이 가는 거예요. 심지어 왕국 내에서도 결혼하라고 난리래.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니까 시장에 나와 있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능력 좋고 얼굴 나쁘지 않고 배경 좋은 양반이 왜 아직도 그러고 있겠어?”
물론 어쩔 수 없는 특수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엘리오스 같은 경우에는 그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누가 봐도 객관적인 판단.
조혜진 역시 조용히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 사람이 이토록 오랫동안 시장에 나와 있었을까. 그토록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어째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쓰레기라서야. 엘프 왕국에서 소문난 난봉꾼일지도 모른다구.’
예복이 대충 정리가 된 것은 조혜진 안에 생겨난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을 때였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조금 더 해보자고.”
“으… 응.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물, 물론 뭐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연애하기에는 바쁘기도 하고… 지구에 있었을 때도 연애 같은 건 질릴 정도로 해봤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 집착하는 것도 웃기고… 그냥 네 의견을 물어보는 정도면… 뭐….”
‘암요. 혜지니 말이 맞구요. 괜히 우신여고 테크니션이겠어.’
시험을 전부 통과한다면 고려해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
물론 계획들을 실행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굳이 실행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벌써부터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야 했지만….
‘혜지니는 소중하니까. 누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스토리도 만들어줄 거야.’
조혜진에게는 다시 한번 읊조린 이후에는 부축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하지.’
“그래서 던전 공략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이런 예복이 필요해?”
“종교의식 같은 거야. 만나러 가는 격식을 차린다는 의미도 있고….”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시선도 많이 달라지니까.’
색기영 때문에 훼손된 이미지도 세탁해야지.
철의 처녀를 열면 던전이 공략된다.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그걸로 이런 중요한 이벤트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무려 등급 외 던전이 공략된 첫 번째 사례였고, 신화적인 업적을 이룩했던 원정대원들의 대륙의 승리였다.
이야깃거리가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후대에서 후대로 이어지는 신화에 걸맞은 마무리가 필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까이 다가오지 마.”
“뭐?”
“별건 아니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가 하는 거 지켜보라는 이야기야.”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긴다. 물론 맨발로 말이다.
던전의 공략을 완료한다는 소식은 이미 퍼졌는지 원정대원들은 대부분 바깥에 나와 있는 중.
환호성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지만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장내가 시야에 비쳐왔다.
분위기 때문이다.
빛의 화신과도 같은 대륙의 명예추기경이 엄숙한 표정을 내보이고 있다.
마치 종교의식 같은 분위기에 모두가 숨을 멈추고 이 의식을 바라보고 있다.
파란 길드 역시 다르지 않다. 밖으로 나간 조혜진이 조용히 뜻을 전달하기는 했지만 아마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분위기에 압도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물론 다른 시선들도 존재한다.
색욕과 영면의 군주를 목도한 일부 간부들은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품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
자신들의 눈으로도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은 장면을 기억에 담은 탓일까.
하지만 두려움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담은 이들의 얼굴이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불안해 보이는 걸음걸이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 누가 봐도 지친 모습으로 힘겹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는 모습은 이전에 봤었던 색욕과 영면의 군주와는 거리가 멀다.
발을 헛디딜 것처럼 비틀거리자 움찔하는 얼굴들도 눈에 띈다.
‘동정심.’
저들은 명예추기경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전에 느꼈던 공포보다도 눈앞에 보이는 불쌍한 한 인간에 대한 희생과 성스러움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나 험난하다고.
명예추기경이 과거에서 고행을 겪고 왔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저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었고, 저들이 모르는 서사들이 숨겨져 있다. 이번 한 번으로 색기영 의혹을 잠식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일부에게는 이 감성이 먹혀들고 있었다.
“베니고어시여….”
“희생과 빛의 성자시여….”
“빛의 아들이시여….”
모두가 저마다의 통일된 호칭으로 의식의 시작을 알린다.
‘고행의 순례길.’
캠프 밖을 벗어나 첫발을 디디자 발밑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발바닥에 여러 파편이 박혔을 것이다. 지금의 던전은 폐허나 다름없었으니까.
유리 조각이나 깨진 대리석, 날카로운 무기의 파편이나 건축물의 잔해.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발바닥이 고통을 받기에는 충분하겠지.
“아….”
“아아….”
‘시바 욘나 아퍼.’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의 고통. 아니 순간적으로 야단법석을 떨 정도의 통증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 고행의 순례길을 멈출 수는 없다.
여기저기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온 것은 당연한 수순. 물론 파란 길드는 그 반응이 조금 더 격정적인 편이다.
김현성은 이를 악물고 있었고, 정하얀과 박덕구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신입 길드원 벨리에 마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분노하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명예추기경이 걸어온 길 위로 신성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기만 하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시바. 시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튀어나왔지만 굳이 참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정도 타이밍에 흘려주는 게 적절하다.
‘그래 누가 이걸 고통의 눈물이라고 생각하겠어?’
이곳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 고통받은 모든 이들을 위해 흘리는 성자의 눈물.
사제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대열을 짜 명예추기경을 위한 의식에 엑스트라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야. 그렇게 하는 거라구.’
신성력을 일으키며 길을 거니는 사제들은 조용히 목소리를 높여 찬송가를 부르짖는다.
그 경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한 소절, 한 소절에 신성력을 담아. 그들의 진심과 염원을 담은 노랫소리는 지하신전을 가득 메웠다.
신앙에 심취한 일부 신도와 모험가들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신에 대한 예우를 갖추며 고행의 순례길에서 빛의 족적을 남긴다.
심지어.
‘뭐야.’
곳곳에서 망령의 사제들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신성한 빛이 태양마냥 계속해서 내리쬐는 곳에서 일어나는 고행의 행군은.
그 누가 느끼기에도 신화 속, 역사 속에 한 장면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 증거로 함께 따라나선 애들 울기 바쁘자너.’
파란 길드원들 역시 멍하니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고.
모든 원정대원들이 빛에 대한 감사함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 고행길에 함께하고 있다는 자부심, 이 기적 같은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는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
“…….”
‘사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단순한 보여주기식 연기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릴수록, 점점 더 모양이 갖춰질수록, 이 행군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
‘그러니까….’
이 쓸데없는 의식이 정말로 알타누스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지 뭐.’
실제로 그녀는 내가 느끼는 고통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발바닥이 찢기고 망가진 정도로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비참하게 죽어간 여신을 위로하는 종교적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너무나도 황폐해진 주변과 그녀의 무덤과도 같은 것들을 거닐면 거닐수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베니고어가 왜 날 여기로 이끌었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베니고어 흑막설까지 떠올릴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명예추기경의 통수를 쳐, 이 세계 유일신으로 거듭나려는 베니고어의 사악한 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큼… 이 던전의 난이도와 출현 시기가 의뭉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베니고어시여….”
“아아….”
물론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 추론이 엉터리라는 것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근거로는 어차피 던전화가 진행될 곳이었다는 것.
두 번째 근거로는 과거의 역사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예언의 사제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기인했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간에 베니고어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만약 베니고어가 알타누스의 의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고… 그녀에게 공감하고 있었다면….
‘그냥 위로해 주고 싶었을지도 몰라.’
철의 처녀 안에 들어가 있는 알타누스를 해방시켜 주기를,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아온 그녀를 위로해 주기를,
개인적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게 가장 베니고어답다.
‘또 다른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엄청 찜찜했을 거야.’
“…….”
“…….”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길고도 길었던 목적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뭐야. 여기 길 막혀 있었어? 옛날에는 안 이랬는데.’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눈앞에 벽이 빛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력이나 주문으로는 탐지할 수 없는 종류의 결계. 어째서 지금까지 원정대원들이 이 공간을 찾지 못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네.’
알타누스는 내가 문을 열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이미 한참 전에 폐허가 되어 있는 공간 안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철의 처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짧은 기도를 마친 이후에는 천천히 철의 처녀로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혹시나 해골이라도 튀어나오는 것은 아닌가 조금 긴장하기는 했지만 앞에 있는 것은 몇만 년 전에 봤던 알타누스의 모습 그대로.
손을 모으고 조용히 눈을 감은 그녀가 드디어… 한눈에 들어왔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빛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
모든 것이 백색으로 물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이동된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제로도 이동되었을 것이다.
정신만 이동한 것인지,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주변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함께 의식을 치르던 사제, 또 다른 길드원들이나 원정대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확인되는 것은 오직. 모든 것이 백색으로 물든 공간에서 눈앞의 알타누스가,
천천히….
입을 여는 모습이었다.
[깜… 깜짝이야. 어? 어?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여기 어디야? 어? 어??]
“…….”
[뭐야… 갑… 갑자기!]
“…….”
[설… 설마… 죄송해요. 죄… 죄송해요. 이… 이자는 꼭 제대로 갚을 테니까! 그러니까….]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어? 이… 이기영 후배?]
눈앞에 있는 것은 알타누스가 아니라 베니고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