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17화
뿌린 대로 거둔다 (24)
아니, 네가 도대체 여기서 왜 나와.
[이, 이기영 후배구나. 휴… 휴우… 다행이네. 갑자기 눈을 떠보니까 이상한 곳이라서 엄청 깜짝 놀랐는데. 나는 또 위에서 잡으려고 온 줄 알았다니까!]
얘는 진짜….
[우리 독립하는 데 문제가 조금 있었기는 했잖아. 대충 정리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찜찜하기는 했었으니까. 이기영 후배는 몰라도… 나, 나 같은 경우에는 개인 채무도 조금 남아 있었고… 최근 이자 내는 걸 깜빡해서… 아 아무튼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갑자기 소환당하는 사태가 있을 수도…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
[근, 근데 난 왜 여기에 온 거지? 이, 이상하네.]
“오랜만이네.”
어째서 알타누스 대신 베니고어가 튀어나왔는지는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네.’
“…….”
‘이제 알타누스는 없으니까.’
알타누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회차를 되돌리며 의지만을 남기며 소멸했으니까.
혹시라도 알타누스와 한 번 더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생각한 이쪽으로서는 다소 아쉬운 결과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눌 이야기들이 많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리해야 할 것도 많았고….’
물어볼 것도 꽤 있었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너무 얽혀 있는 것들이 많아 무슨 말을 먼저 건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을 정도.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눈앞에 있는 베니고어를 통해 이쪽의 궁금증을 대충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타누스가 괜히 얘를 여기로 불러온 건 아닐 거 아니야.’
아직도 커다란 눈을 꿈뻑이며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선보이며 쓸데없는 농담을 건네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알타누스의 의지가 스며들었을 거라고 믿는다. 일시적이든 일시적이지 않든 간에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까 벨 이사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더라구.]
“…….”
[생각해 보니 이기영과 아주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더군. 이러면서 말이야. 흐음… 그렇게 된 건가. 라고 중얼거리던데 기분 좋아 보이더라니까.]
일단은 이상한 소리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베니고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뭔가 할 말이 없냐는 듯이 계속해서 눈치를 주자 눈에 띄게 텐션이 내려간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
[어….]
“…….”
[어… 그, 그러니까.]
얼굴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심지어 슬슬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휘파람을 불면서 중얼거리고 있는 꼴은 가관.
여느 때 보던 베니고어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마치 실수한 강아지가 주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베니고어는 있는 힘껏 분위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으… 러니까… 역시 이기영 후… 후배는 대단하더라구. 던… 던전의 난이도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라… 으응….]
“…….”
[내… 내가 잘못한 거지? 나… 나 안 버릴 거지?]
“…….”
[미, 미안해. 이기영 후배. 사… 사실 일이 이렇게 힘들게 될 거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그러니까. 그… 그게 왠지 이렇게 해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달까… 근… 근데 이기영 후배도 알고 있잖아! 어차피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는 던전화가 진행 중이었다구. 만약에 사전에 던전화를 해놓지 않았다면 더… 더! 커다란 위협이 닥쳐왔을걸!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는 이 대륙의 주요 서사였으니까 어차피 한 번쯤은 해결해야 했어! 그대로 놔뒀으면 언젠가 터질 폭탄이었다구! 그… 그리고 타이밍도 딱 맞았구….]
“…….”
[이기영 후배가 화난 것도 이해하지만… 어, 어쩔 수 없었다니까. 결… 결국 이번 이야기에도 이기영 후배가 필요했었던 거야. 지금의 이기영 후배가 있기 위해서는 예언의 사제가 있었어야 한다는 거지. 나… 나는 당당해. 그… 그래도 이기영 후배가 너무 고생한 것 같아서. 미… 미안.]
“언질 정도는 해줄 수 있었던 거 아니야?”
[이기영 후배도 알고 있잖아! 언질을 할 수 없었던 거야. 관리자가 너무 개입하게 되면 시스템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구. 난이도가 더 올라갈 수도 있었던 걸 생각해야 돼. 내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모두 이기영 후배를 위해서였다니까. 이기영 후배. 혹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이걸 내놓은 다음에 이기영 후배가 알아서 해주겠지.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과자나 먹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내,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기나 해?]
“…….”
[물… 물론 개인적인 욕심이 있기는 했어. 나… 나는 알타누스가 아니지만 그… 그래도 뿌리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으니까. 그래도… 큼큼….]
“…….”
[내 이름을 지어준 건 이기영 후배였구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정확히는 알타누스의 의지가 네게 이름을 내린 거라고 보는 게 맞지만….”
[그래도.]
“사실 내가 초대장에서 보낸 과거가 맞는 미래인지도 모르겠어. 내가 너를 베니고어라고 불렀기 때문에 네가 베니고어가 된 건지, 아니면 본래부터 베니고어였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예언의 사제가 뿌리내린 과거가 원래의 과거였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야.”
[아니. 중요한 것은 결과야. 이기영 후배. 본래의 과거라는 건 이제 존재하지 않아. 지금, 이기영 후배가 만든 게 바로 결과야.]
‘얘는 맹해가지고….’
가끔 인간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드러낼 때면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본래의 과거, 변화된 과거, 예언의 사제가 과거에 있어야 했는지, 없는지가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쓸데없는 과정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결과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베니고어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그녀가 베니고어가 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나는 알타누스와의 첫 만남에서 그녀를 베니고어라 불렀고, 그 과거는 현재에 자리 잡았다.
남은 것은 결과밖에 없다는 거다.
“그래서 궁금증은 해결했어?”
[응. 그리고… 알타누스도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거야.]
“너는 네가 알타누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는 알타누스가 아니야. 이기영 후배.]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베니고어.”
[으… 응. 처음에는 몰랐어. 알타누스의 의지가 나에게 계승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알타누스와 내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건 모르고 있었거든.]
“그래?”
[응.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정확히 언제 깨달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깨달은 것도 아니야. 그냥 의구심이라고 말하는 게 정답이겠네. 이…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깨달은 거지. 그녀와 내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걸 말이야.]
“지금은 어때. 나는 네가 여기로 온 이유가 궁금한데. 지금 혹시 알타누스의 의지가 느껴져?”
[…….]
“…….”
[앗! 아아앗!]
‘시바. 이럴 줄 알았어.’
[응. 느껴져… 이기영 신도. 미약하지만 느껴져.]
‘이거 말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음… 음…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베니고어를 보니 울화통이 터지기는 했지만 조용히 그녀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작은 의자를 하나 만든 이후 앉은 이후에 곰곰이 의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음… 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직후,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베니고어는 중얼거렸다.
[알타누스는….]
“응.”
[알타누스는 이기영 후배를 사랑했나 봐.]
“그건 또 뭔….”
[아니야. 아니. 사랑한 건 아닌가? 아니… 사랑한 거라고 보는 게 맞나? 애증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아니야. 역시 사랑했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네. 사랑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니까. 알타누스가 이기영 후배를 향해 느끼는 감정은 그것 말고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 같아.]
“…….”
[그녀가 철의 처녀로 들어간 것은 이기영 후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녀는 자기의 운명을 대충 알았던 것 같기도 했거든. 이기영 후배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냥 책임감 때문이었나 봐. 알타누스는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흐음….”
[물론 이기영 후배에게 감사하고 있데. 이기영 후배 덕분에 즐거웠다고도 생각했었던 것 같아. 알타누스는 즐거울 만한 일이 별로 없었어. 철의 처녀에 들어간 이후로 알타누스가 떠올릴 수 있었던 추억은 이기영 후배와 만났던 것 정도가 전부였던 것… 응… 그랬을 거야. 알타누스는 꽤 오랫동안 철의 처녀에 갇혀 있었잖아?]
만약 내가 철의 처녀에 들어갔었다면 파란 길드원들이나 율하, 그리고 지구에 놔두고 온 친구 하나와 함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즐거운 일 정도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떠올릴 게 예언의 사제와 함께한 추억 정도밖에 없다면, 그녀가 스스로가 느끼기에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왔을지 예상이 되지 않는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하늘을 바라보지 못한 성녀.
빛과 만나는 순간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성녀.
‘그 빛이 나였나 봐.’
소름이 돋는 사실이었다.
[이기영 후배가 예상했다시피 그 뒤로 대륙은 멸망의 길을 걸었고… 루키페르의 뒤로 알타누스가 이 세계의 관리자의 자리 잡았어. 알타누스는 멸망한 대륙을 본래대로 돌리고 싶었나 봐. 대륙이 천천히 수복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 같은 희생자가 생겨나지 않기를 바랐대.]
“그래?”
[그래서 지구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야.]
“소환의식은 그녀가 생각한 거구나.”
[정확히 말하면 메텔 수호자와 함께. 알타누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 지금의 대륙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어떤 시스템인지 깨달았던 거야. 루키페르로부터 아무것도 인계받지 못한 알타누스가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겠어? 여신의 손거울에 있었던 데이터. 내장되어 있는 더미월드와. 프로그램들. 수호자 메텔에게는 열람하는 게 불가능했었지만 알타누스는 거기에 있었던 게 뭔지 알고 있었어.]
[대륙이 번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이기영 후배가 남긴 족적이 제시하고 있었던 거지. 개인적으로 그녀가 지구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건. 이기영 후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기영 후배가 이곳으로 소환된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도 그때 즈음이었거든.]
[알타누스는 이기영 후배가 궁금했나 봐. 알타누스는 이기영 후배에게 인도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기영 후배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기영 후배를 그리워했었어. 이기영 후배가 들어온 이후에는 이기영 후배를 바라보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다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분노하면서. 이기영 후배의 일대기에 함께한 거야. 긴 시간 동안 말이야. 그녀는 이기영 후배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그 누구보다 바랐고… 이기영 후배와 만나고 싶어 했고… 이기영 후배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고… 이기영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었어. 자신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금은?”
[재미있게 보고 있대.]
“…….”
[고맙다고 전해달래.]
“…….”
[이렇게 찾아와줘서. 약속을 지켜줘서.]
“…….”
[자신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줘서.]
“…….”
[그리고.]
“…….”
[너무… 쓰레기 같이 살지 말라고… 하네.]
솔직히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들어온 탓에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직 궁금한 것 역시 남아 있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한 그녀를 보고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 이제 끝났나 봐. 이기영 후배. 너… 너무 짧은 거 아니야?]
“…….”
[아앗… 뭐… 뭐야. 나 죽는 거 아니지? 그, 그냥 여기에서 사라지기만 하는 거지?]
“…….”
[이. 이기영 후배! 나… 나 사라진다! 나 사라지고 있어. 흐어어어엉… 이기영 후배! 도와줘! 도… 도와달라고.]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사람아.’
베니고어라 생각하면 낯간지럽기는 했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맞는지.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이게 맞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기영 후배! 이기영 후배에!]
“…….”
“고마워. 알타누스.”
[어….]
“고맙다. 알타누스.”
다시 한번 시야가 반전되고.
[등급외 던전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의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
알타누스의 상처 입은 몸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