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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21화 (1,00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21화

뒷정리 (4)

“아주 눈에 꿀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혜지니가?”

“아니요. 우리 혜진이가 그랬겠어요? 엘프 늙은이 쪽이죠.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하던가. 창창한 우리 애 앞길 막으려고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이미 소문 다 난 거 알죠? 엘리오스가 파란의 신창에게… 어쩌구저쩌구… 둘의 연애 전선 이상이 없다느니… 이딴 기사도 나오고 있다니까.”

“…….”

“남의 앞길 막아도 제대로 가로막은 거지. 장담하는데 이 엘프 늙은이 분명히 노렸을 거예요. 엘프들이 인간 사는 거에 무지하다는 것도 일이 년 전 이야기지. 요즘 엘프들이 얼마나 약았는데. 분명히 모든 게 계산되어 있는 행동일걸요.”

“일단 언론부터 뒤흔든다 이거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주변 라이벌들도 좀 쳐내겠다는 심산 같고… 마침 분위기도 좋은 타이밍일 테니까. 내 말 맞지 누나?”

“그러니까요. 유통기한 다 지난 놈이 어딜 들이대려고.”

‘이 누나 말이 조금 심하기는 해. 아무리 그래도 유통기한은 너무 했어.’

“그러게. 무슨 면목이 있다고… 전령 겔크한테 한 대 맞고 뻗은 주제에 염치가 있어야지.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고 있어? 걔네는 일 없대? 뒷정리는 제대로 하고 한가롭게 커피 마시는 거야?”

“저도 혹시나 해서 파 봤는데 그쪽은 문제없어요. 종족 차별 발언하는 건 아닌데 엘프들이 워낙 고지식하잖아요. 제 얼굴에 침 뱉기 같아서 민망하기는 한데… 문제가 되는 건 오히려 이쪽이에요.”

“왜?”

“내가 말 안 했었나? 아직 뒷정리도 못 끝냈다니까.”

“그게 말이 돼? 아니, 던전이 워낙 크니까… 이해가 되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정리가 전부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 목록에 있는 아이템들이 끝이 아니라는 소리야?”

“네. 물론 중요 성과들은 거의 대부분 나왔다고 보는 게 맞지만… 아직 전부 수색하지는 못했어요. 몇몇 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봐야죠.”

“하얀이가 워프게이트를 설치 안 했나? 그래서 속도가 더뎌진 건가?”

“워프게이트 설치야 공략 첫날에 다 했죠.”

“그런데 뭐가 문제야?”

“다들 눈치싸움 한 거죠. 뭐. 위원회에서 중재하려고 해도 중재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애초에 이건 위원회 소관도 아니었고… 이제 와서 숟가락 얹어 보겠냐는 것처럼 느껴졌었나 봐. 중재한다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지들이 알아서 해보겠다는데… 매번 회의할 때마다 뒷정리 업체 컨택하는 것부터가 난항이었어요.”

“맨날 쓰던데 있잖아.”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까. 거기 하나로는 안 되죠. 업체가 중간에 성과들을 가로챌 수 있다고 서로 견제하는 거 있죠? 아마 로비 받은 놈들도 있을 거예요. 이 업체, 저 업체, 전부 다 튀어나오고, 감시 위원회를 설치해야 하니 어쩐다느니 이럴 때는 또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중간에 빼먹는 놈들이 없나 자원봉사로 감시 좀 해달라 이거죠.”

“파이가 커서 그런가….”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는데….’

“다들 어디서 주먹깨나 쓰시던 분들이라 그런가. 자존심도 세고… 그리고 성과가 성과잖아요. 그냥 조용히 있는 사람들도 많기는 하지만 슬쩍 욕심부리는 놈이 하나 나타나니 개판이 나는 거죠. 인맥으로 뭉치는 놈들도 생기고….”

“파란 길드는?”

“여기서 파란 길드가 왜 나와요? 이건 대륙 비상사태가 아니라 던전 공략이었잖아요.”

“아!”

그제야 일이 어째서 이 지경이 됐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파란 길드 소유가 아니었구나.’

나도 모르게 깜빡한 사실이었다.

대륙법상으로도 던전의 소유권이라는 건 매번 논란이 되는 소재였다.

깊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머리 아픈 소재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해당 던전이 발견된 토지의 소유권자와 최초 발견자가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

교국은 친 모험가적인 성향이 강해 최초 발견자에게 더 많은 지분을 주고, 공화국은 토지에 주인에게 더 큰 지분을 주는 차이점이 있을 뿐,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번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던전이 발견된 지역은 교황청의 안이었고.

논란의 여지는 있을 수 있지만 던전의 최초 발견자가 누구냐 따져보면 라파엘 파티가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초로 일어났던 던전의 이상 현상을 현상을 조사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결국에는 던전을 발견한 것에 커다란 기여를 했으니 라파엘 파티의 이름이 빠지는 것이 이상한 상황.

도우미 이기영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나는 파란 길드의 이름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와 교황청의 이단심문관, 그 밖에도 여러 협력집단이 발을 걸치기도 했지.

하지만 전자 둘은 이익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논외.

결국 가장 높은 지분을 어디서 가지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면 라파엘 파티와 이기영 개인, 마지막으로 교황청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복잡하게 됐네.’

교황청 같은 경우에는 종교적 상징물과 공략이 완료된 빈 던전의 소유권의 대부분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을 거고….

‘난리 났겠는데?’

결과적으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쪽은 라파엘 파티라는 소리가 된다.

물론 소유권을 가진 쪽이 모든 아이템과 보화들을 독식하는 것은 아니다. 돌아가는 게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이번 던전 공략의 보상은 기여도로 책정하기로 계약을 했었으니까.

사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라파엘 파티가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은 이미 확정된 수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배를 해야 하는 집단이 라파엘 파티라는 것에 있다.

대륙에 내놓으라 하는 무력집단들이 떼를 쓰고 난리를 치는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전직 병아리 파티란다.

무력적인 면과 명성은 크게 성장했을지도 몰라도, 걔네가 괜히 성검용사 길드가 아니라 파티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행정지원 업무를 도와줄 수 있는 인원은 없고, 이런 상황을 타개할 만한 경험도 없다.

‘가진 건 맨몸뿐이자너.’

가진 거라고는 튼튼한 몸뚱이뿐이고, 당연히 이런 정치적 상황에 휘말린 적도 없을 것이다.

라파엘 파티는 순수하게 모험을 즐기는 파티의 전형이었다.

따로 하우스를 두지도 않을 정도로 전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모험을 하고 이득이니 소유권이니 하는 머리 아픈 문제들은 생각해 본 적조차 없는 순수한 모험가 파티.

소유권을 가지고 중심을 잡아줘야 할 집단이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기 딱 좋은 상태라면 여기저기서 하이에나들이 침을 흘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오빠는 교황청의 명예추기경이기도 하고, 라파엘 파티를 도와 던전을 발견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니 중재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있죠. 희생과 빛의 성자로서의 상징성뿐만이 아니라 명분도 가지고 있는 거예요.”

“…….”

“저는 그래도 진 군사가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삐졌나 봐. 자기도 속이 근질근질할 텐데 무언의 시위라도 하고 있는 것마냥 사태를 관망하기만 하고….”

“걔야 원래 그렇잖아… 아무튼 그쪽은 죽기 일보 직전이겠다. 누나.”

“라파엘이요? 당연히 그렇죠. 걔 오빠 병문안도 안 오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녀석도 양반은 되지 못하는 모양.

“부길드마스터. 라파엘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곧바로 누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들여도 되냐고 무언의 질문을 보내자.

“들어오라고 해요. 어차피 생각 있는 애들은 슬슬 모일 시점이네.”

“바로 들여보내 주세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의 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혀… 형….”

‘고생이 많았나 보네.’

“제가… 병문안도 못… 건강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형.”

‘얘가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상황은 대충… 들으셨죠?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똑똑했다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다크써클 좀 봐.’

겉모습은 멀쩡했지만 멀쩡한 것은 겉모습뿐이다. 마치 고위 흑마법사의 저주라도 받은 듯한 모습, 영혼이 썩어 문드러진 느낌이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안 그래도 모험 외에는 다른 정치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녀석이 순식간에 정치 소용돌이 속에 제 발로 들어가 버렸으니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게….”

“…….”

“잘 해보려고 했는데… 폐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잘 풀리지 않더라고요.”

‘그래. 다 이해해. 네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물타기, 논점 흐리기, 정론인 척 궤변 늘어놓기. 아니, 이 정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몇몇 집단이 서로 손을 잡고 파티를 압박하기만 해도 라파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칼부림이 나는 회의실 안에서 얘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어버버. 어버버. 정… 정숙을… 어버버… 정숙해 주세요. 어버버. 하다가 말았겠지 뭐.

“지난 회의 로그들이랑 각 길드 요구사항들 취합해서 가져오셨죠?”

“네… 형. 제대로… 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마리엔이 최대한 열심히 해줬어요.”

‘기적의 사제 마리엔? 안 봐도 뻔하네. 무조건 양만 만다고 좋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묵직해?’

본인 나름대로 잘 정리했다고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이런 종류의 보고서들은 각 길드마다 규격과 정형화된 법칙이 있는 법이다.

그냥 마구잡이식으로 나열해 놓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는 거다.

길드 생활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애송이가 대충 눈대중으로 만든 보고서.

‘진짜 그지같이 해놨네.’

회의 로그들은 더욱더 가관이다. 발언권도 없이 무작정 발언한 놈들도 있었고 회의 진행자를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 놈들도 부지기수.

라파엘 파티가 만만하게 보인 것은 맞지만 기본적인 절차와 예의는 무시하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이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아니,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야.

괜히 경매에 매물로 던전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규모 파티가 무리하게 공략을 진행하고 용병들을 모아 공략을 완료한다고 한들, 현재의 라파엘 파티 꼴밖에 나지 않는다.

약하면 잡아먹히고 물어뜯기는 것이 이 바닥의 법칙이 아니었던가.

‘회의 들어온 다른 놈들도 많이 답답했겠네.’

“혹시… 문제가 될까 봐. 타 길드한테 협력 요청도 하지 못했었어요… 다들 무척 민감해서….”

“가장 최근 회의에서 나온 방안이 각 길드에서 협력 인력을 두 명씩 차출해서 라파엘 파티로 파견하는 거였어요. 물론 이것도 자리 때문에 말이 많았고요.”

“붉은용병은?”

“원래 거기는 길드마스터가 사실상 은퇴한 상태잖아요. 길드마스터 대리로 최영기 씨가 오기는 했는데… 그 양반도 이런 데는 젬병이고… 우리 연주 언니도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나 봐요. 왜, 뻔히 나올 만한 그 대사 있잖아요. 그거 미연에 방지 하려고요.”

“무슨 대사?”

“정말 너무한 처사입니다. 물론 명예추기경님의 생각은 뜻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린델의 삼대길드가 이런 식으로 나눠 먹기 하는 것을 지켜보자고 원정에 참여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정말 너무한 처사입니다. 물론 명예추기경님의 뜻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린델의 삼대길드가 이런 식으로 나눠 먹기 하는 것을 지켜보자고 원정에 참여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의가 시작된 직후, 누나가 말한 것을 그대로 외치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물론 세 길드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마땅히 받을 몫을 받아간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

“…….”

“이번 일을 계기로 아직까지 대륙에 위험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연방과 연합, 이종족연합의 중소규모 길드들은 인력, 장비 부족으로 사망률이 치솟고 있습니다. 대륙의 무력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더욱더 안전한 대륙을 위해서라도 그 어느 때보다도 배려심이 필요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새끼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명예추기경님께서는 현재의 대륙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해, 이 새끼야.’

이빨이 으득으득 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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