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22화
뒷정리 (5)
사실 태클이 들어올 거라는 건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말 몇 마디로 천만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상황.
모두들 자신 나름대로의 사정도 있었을 테고, 또 각각의 기준으로는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을 치르고 왔다고 생각할 테니.
합당한 보상, 혹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 합당한 보상 참 좋은 이야기지.’
원정대원들이 보상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현성이와 희라 누나, 또 하얀이가 결정타를 먹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원정대 단위로 공략을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았겠어.’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정말로 아슬아슬했던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저기 앉아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진 군사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정대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공략.
주요 네임드들뿐만이 아니라 참가했던 모든 인원들의 마력과 체력을 쥐어 짜냈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원정이었다.
그 증거로 몇몇 마법사들의 머리가 흰색으로 일부분 탈색되어 있다. 원정이 끝난 이후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기여도에 따라 협상의 여지를 두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열린 마음으로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
그 와중에 웬 망둥이처럼 생긴 놈이 지껄이는 발언은 짜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명예추기경님께서는 현재의 대륙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해, 이 새끼야.’
“…….”
그 와중에 적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생긴 건 망둥이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녀석의 성향과 기벽에는 이상이 없다.
‘조심스러운 혁명가?’
근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조심스럽지 않았어? 왜 조심스럽지 않았니?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이해할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해하기는 뭘 이해해.’
“실례합니다만 조금만 더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잠시 여신의 거울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발언하도록 하세요. 제가 허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지금 이 그래프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혹시 알고 계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시야에 비친 것은 대륙의 지도였다. 교국, 연방, 연합, 공화국, 이종족 연합, 그 외 중립국 라이오스나 다른 중립국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래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을 리 만무, 가장 높은 것은 교국이었고, 그다음은 공화국, 그다음은 연합과 연방 순이었다.
녀석이 아까 전에 말했던 것처럼 아마도 지역 간의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은 관계가 역전된 그래프. 붉은색으로 적혀 있는 것은 아마 사망률이나 부상률이겠지.
상대적으로 사망률이 적은 교국과 공화국 쪽과는 다르게 연방의 사망률은 무척이나 높다.
검증을 해봐야 저 자료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만… 아마 사실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연합은 몰라도 연방이 제대로 된 국가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수도뿐만이 아니라 소도시, 대도시들의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참 젊다.’
패기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올 만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이렇게 지껄일 만해.
“전자는 각 국가들 간의 불균형이고 후자는 사망률의 집계입니다. 보시다시피 연방과 연합이 높은 사망률을….”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는 꽤 뻔했다.
또 들어줄 만하기도 했다.
“저는 이번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가 대륙의 서사를 기반으로 한 던전화가 된 첫 번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가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교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상현상, 그리고 그 이상현상에 집중하고 있었던 라파엘 파티와 명예추기경님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던전 붕괴 현상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
“만약 교국이 아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이상현상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초동조치 실패로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을 겁니다. 현재 연방과 연합은, 심지어 공화국의 일부 지역과 몇몇 중립국 들은 심각한 인력, 자원, 무력 난을 겪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원정이 가능한 길드는 채 10개 도 되지 않고, 많은 능력 있는 모험가들이 거리로, 용병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바로 소외된 소도시들의 현주소입니다.”
“…….”
“새롭게 이주한 인원들은 패배주의에 젖어 있고, 국가의 그 어떤 정책도 모험가들을 위로해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거리의 치안은 최악의 수준이며 불평등이 새로운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양극화가 점점 심해진다는 것은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물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모험가 지원 정책과 소도시 복지 정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마저도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전쟁과 경쟁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명예추기경님. 27군단 소환사태, 외신전쟁, 대륙 던전화,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 공략으로 인해, 대륙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각각의 성격은 다를지도 몰라도, 큰 위기에 인류는 언제나 힘을 합쳐왔음을 증명했습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연병과 연합의 소도시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굶주리고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 뒤를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닙니까.”
“…….”
“전 대륙이 힘을 합쳐 앞으로 찾아올 새로운 위협에 맞서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이번 소집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소리 참 길게도 하네.’
나한테 호소할 만해.
피티 중간중간에 굶주리고 있는 연방의 아이들과 모험 실패로 고통을 겪고 있는 모험가들의 사진은 무슨 의도로 넣은 건지 모르겠다.
“지금이 바로 그 첫 시작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지원 좀 더 해달라는 거 아니야.’
나름 일리가 있는 소리이기는 했지만…
‘이걸 왜 지금 여기서 지껄이고 난리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통해서 회의를 주최하든지, 아니면 대륙기관을 통해서 전해야지.
지금은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고 기여도로 아이템을 분배하는 자린데 말이야.
본인들 기여도로 원하는 보상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거국적으로 생각해 보자며 개소리를 지껄이는 듯한 느낌.
녀석 나름대로 큰 뜻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 바 아니었지만 의도가 보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명예추기경의 성품을 보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항상 약자들의 편에 서 있는 성자,
‘현성이나 희라 누나였음 이런 개소리는 나오지도 않을 거야.’
빛의 편에 선 자로서는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 모든 걸 몰랐다는 듯한 얼굴을 보이는 것 말이다. 소외된 지역에서 일어나는 참담함을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다는 표정.
하지만 재빨리 진청을 바라보게 된다.
‘한번 해줘.’
한 번만 도와줘. 청이 형. 삐진 건 이해하는데 조금만 도와줘.
‘시바 제발….’
모르는 척하는 얼굴을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었지만… 슬그머니 눈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
‘나 그동안 많이 아팠어. 너도 병문안 한 번 와봐서 알잖아.’
제발요.
‘심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다구. 오죽하면 내가 계속 잠수 타고 있었겠어? 지혜 누나한테 상황 들어서 알지? 나 지금 힘든 거.’
대신 말 좀 해주세요. 용사여. 너 실수한 것도 있잖아. 그리고 공화국도 내가 이번에 신경 많이 써줬는데…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녀석의 꾹 닫힌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개소리로군.”
“네? 방금….”
“개소리라고 말했다.”
“공적인 자리입니다. 진청 군사님. 아무리 그림자의 영웅이시라 한들, 그런 발언은….”
“개소리를 개소리라고 말하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교국과 공화국은 너희들의 부모가 아니다. 최소한의 인도적 조치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동정심에서 나온 인도적 조치에 불과하다. 네놈들이 싸질러놓은 똥을 닦아줄 의무는 없단 말이다. 멍청한 놈.”
‘진카콜라!’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교국과 공화국이 납부하고 있는 기금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나? 공화국의 물적 지원이 한 해에 얼마나 들어가고 있는지 알고서 지껄이는 건지는 모르겠군. 네놈이 이 자리에 나와서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온 것도 네놈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라는 거다.”
‘진 군사님!’
“모험가의 사망률이니, 앞으로 시작될 대륙의 서사이니 뭐니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네놈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일이 아니야.”
“더 큰 재앙이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연방의 소도시에서 이상현상이 일어난다면….”
“새로운 기관을 만들면 되겠군. 대륙 보호 관리위원회의 이름으로 말이다. 위기대응대책반은 어떤가. 이상현상을 추적, 관리하는 집단으로 말이다. 이 예산 역시 다른 쪽에서 부담해야 하지만… 정말로 대륙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맞다면… 필요한 일이겠지.”
“언제 어디서든 타국으로 병력을 보낼 수 있는 독립기관을 두자는 말입니까? 저희들과는 별개로 대륙민들의 권력자들이 이를 두고 보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적인 방안이 아닙니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연방의 부패하고 썩은 권력자들과 네놈들의 차이점을 그다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결과적으로는 보상을 원한다. 이 말이 아닌가.”
‘이 형 컨셉 버렸나 봐.’
이제 존댓말 안 해? 그만큼 녀석이 존재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자 다소 극단적인 진영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일단 교국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들, 연합과 연방은 일단 지켜보자는 느낌이었다.
본인들이 느끼기에도 자신들이 받아갈 파이가 부족하다 여기고 있었는지 은근슬쩍 망둥이를 응원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진카콜라의 등장으로 다소 쑥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녀석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누군가는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한다.
공화국의 길드나 집단들이 이걸 두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공화국 진영에 젊어 보이는 녀석 하나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역시 아이템 분배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없었으면 합니다. 사실상… 많은 부분을 양보해 주셨으니… 단순 기여도로만 분배한다면 파란 길드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했는지 알고 계실 겁니다. 결코 연방과 연합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
“하지만 연방의 스퀴어트 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이후에 한 번 다루는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새끼 네 똘마니 아니냐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진청을 바라보게 된다.
왜 네 똘마니가 네 허락도 없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냐고 묻자.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는 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지금 보니 녀석뿐만이 아니다.
교국에서도 몇 명, 다른 곳에서도 몇 명 정도가 망둥이의 발언에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공감한다기보다는 녀석을 응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힙스터 감성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교국과 공화국에서 연방 망둥이의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으니까.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남에게 손을 뻗는다는 건….
‘대륙에 그런 병신이 어딨어?’
뭔가가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 새끼들….’
“그만… 그만하세요. 진 군사님. 그리고 스퀴어트 님도… 이쯤 해주세요. 아무래도 너무 분위기가 격양된 것 같으니… 나머지는 내일 이어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명예추기경님.”
“네. 부디….”
‘설마 이 나쁜 새끼들….’
“…….”
‘이 새끼들 설마….’
언젠가 대륙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위협이라는 거….
그거….
어쩌면….
‘나 말하는 건가 봐.’
확실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몇몇 놈들이 비밀리에 뜻을 모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새로운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봐….’
혹시.
김현성이 옳았던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던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