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25화
뒷정리 (8)
“둘 수는 있지만… 어째서….”
“딱딱한 분위기는 좋지 않으니 말입니다. 여러 가지로… 아마 이편이 조금 더 대화하기 편하실 겁니다. 여러 가지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
“…….”
“회의에 연장선이 되는 자리보다는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의 자리가 좋을 것 같네요.”
“그렇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니까.
연방의 스퀴어트가 명예추기경과 독대해 원정 후처리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보다는 둘이 함께 체스를 두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고 알려지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다소 주목도가 내려간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리라. 언론도 마찬가지고 파란길드의 길드원 같은 경우에도 그렇다.
‘비공식적인 자리가 더 좋자너.’
회의로그를 굳이 안 남겨도 되고 말이야. 애초에 녀석이 원하는 것도 그쪽일 테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눈이 몇 개 붙어 있기는 하지만 뭐.’
로또를 맞은 연방에 콩고물을 얻으려고 하는 이들 때문에 회의가 끝난 회의실이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스퀴어트가 내게 접근하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 리 만무, 불편한 기색을 비치는 이들이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딱히 제지하지 않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야 다과회 같은 느낌의 자리라면 은근슬쩍 비벼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체스를 두자고 하자는 걸 들었으니 끼어들 명분도 없다. 명예추기경이 연방의 스퀴어트를 배려해 주려고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리 만무. 끼어드는 건 실례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했다.
또 연방의 망둥이 새끼가 명예추기경님을 등쳐먹으려고 하는군.
같은 생각을 하며 망둥이에 대한 적대감을 올리고 있겠지 뭐.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네. 다음에 개인적으로 찾아 봬도 되겠습니까? 명예추기경님.”
“물론이죠.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함께 차라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아! 그럴 게 아니라 조만간 열릴 다과회에 초대 드리는 게 좋겠네요.”
“하하하. 정말이십니까? 명예추기경님의 다과회에 초대되다니…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가문의 영광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일찍 초대 드렸어야 했나 봐요.”
“하하하하하. 뒤늦게라도 초대됐으니 다행이군요. 제 딸들이 무척 기뻐할 겁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사교계에 데뷔시키려던 참이었는데….”
“보잘것없는 다과회에서….”
“보잘것없다니요! 벌써부터 아이들 입이 찢어지는 그림이 훤히 보입니다.”
“하하하.”
그 와중에 막 자리를 뜨고 있는 이들과 좋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은 당연한 수순,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명예추기경님. 진심으로 대륙을 위하는 명예추기경님의 따뜻한 마음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대충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져주고.
“앗. 군사님!”
“명예추기경님.”
“공화국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조금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
“처리할 업무가 있어… 죄송합니다.”
“벌써 돌아가신다니….”
“언젠가 시간을 내 파란 길드로 방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꼭 그리해 주신다고 약조해 주시는 겁니다.”
“예.”
쇼윈도 느낌으로 친한 척 좀 해주고 나면 회의는 끝.
함께 체스를 두기로 한 스퀴어트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녀석과 자리를 옮긴 것은 시간이 꽤 지난 이후.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녀석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 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고 있었다.
“그럼….”
“예. 명예추기경님.”
“제 방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그리하겠습니다.”
중간에 길드 직원들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고.
“손님이 오셨습니다. 당분간 아무도 들이지 말아주세요.”
“네. 부 길드 마스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할 준비를 마친다. 물론 그 와중에도 파란 부 길드 마스터, 명예추기경으로서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굳이 길드의 직원들을 불러 이것저것 시키는 모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명예추기경의 모습.
체스판을 꺼내고… 말을 놓고… 자연스럽게 차를 내리고 다과를 꺼낸다.
너무나도 익숙해 보이는 일상. 녀석이 의외라는 표정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방 안,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운 가구와 물건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명예추기경은 이 모든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스스로 차를 내리는 모습은 굉장히 서민적이었고 욕심과 물욕 따위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명예추기경이 원했다기보다는 파란 길드에서 그의 품위 유지를 위해 신경 써줬다는 말이 어울리는 장면이리라.
“어떤 차를 좋아하십니까?”
“차는… 그다지… 즐겨 마시는 편이 아닙니다만….”
‘넌 안 되겠다.’
“그러면 제가 추천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네. 감사히 들도록 하겠습니다.”
커다란 테이블에 체스판이 꺼내져 있고. 사이드 테이블에는 차와 다과가 놓여 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체스 말을 옮기자,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체스 말을 옮기기 시작. 작정하고 체스를 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체스는 뒷전일 테고… 녀석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러 온 것이니… 지금쯤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일단….”
“네.”
“연방을 위해 힘써주신 모든 것에… 연방을 대표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 감사의 인사가 먼저지. 근데 그림이 조금 이상하다. 너는 연방의 대표가 아니자너.’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스퀴어트 님에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방의 소도시들이 힘든 상황에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 실상을 확인한 것은 처음 이었으니까요. 자리에 맞지 않는 발표라 생각해 많은 분들이 불편해하셨지만… 저는 어째서 스퀴어트 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그래서… 이렇게 독대를 청한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미 네가 말한 것 이상을 해줬어.’
“그건….”
‘네가 주장한 연방의 가난과 당장 어려운 이들에 대한 대책은 던전의 사업권을 물려주는 조건으로 해결해 줬고… 네가 말하는 균등한 분배는 전설 아이템을 선물함으로써 대충 메워졌잖아.’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부담 없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착한 것도 이 정도면 병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 진짜 멍청하자너.’
사람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전설등급의 아이템 한정은 골드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물론 매물이 많이 풀린지라 이전보다는 가치가 떨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던전의 정비사업도 정비사업이었지만 연방에 풀린 아이템은….
‘연방 내부 원정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지금까지 던전이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없어서 일어났던 문제들이 동시에 해결되는 셈이다.
눈덩이가 굴리는 것처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가 나를 찾은 이유는 뻔할 것이다.
‘더 원하는 게 있는 거지 뭐.’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관심이 있는 것은 누굴 밀어주느냐에 대한 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스퀴어트 님은 소도시 오하이오에….”
“네. 부족하지만 오하이오에 소도시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륙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렇군요.”
위치가 나쁘지는 않지만 애매한 곳이다. 중앙으로 진출하려면 진출할 수 있지만 바로 옆에 대도시를 끼고 있으니 꿈을 펼치기에는 오하이오가 작게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중앙 정계에 진출해 연방을 본격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연줄이 있어야 할 것이고 명성 높은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건 50점짜리야.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지.’
자신의 공을 턱수염 산적이 가로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다. 피티를 발표한 것은 녀석이었지만 공은 중앙과 그 주변에 있는 대도시들이 나누어 먹을 테니까.
‘아니면 그거야?’
신화등급의 아이템 한정은 가져가야겠어?
정말로 대륙이 걱정돼서….
대륙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어서…
누군가는 색기영을 견제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커다란 뜻을 품고 나랑 도박하러 온 거야?
‘네가 생각하는 혁명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 나랑 독대하고 있는 거 맞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조용히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변두리의 지배자가 명예추기경과 독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녀석이 모르고 있을 리 만무.
사랑스럽고 성스러운 명예추기경은 멍청할 정도로 호인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절벽 끝에 내몰린 심정일 것이다.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여러 가지 떡밥을 던져놓기야 했다.
무골호인에 바보 같은 모습.
대륙을 위하는 성자의 모습.
바보 같을 정도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 그 어디에도 색기영의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녀석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원정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한 명예추기경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설명하는 것. 명예추기경이 명예추기경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하게 하는 것.
파란도 아니고 붉은용병도 아니고, 검은백조도, 대륙보호관리위원회도, 교국도 아닌 전혀 새로운 집단을… 스퀴어트라는 새로운 인물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 교국의 성자 스스로 자신의 적을 키우게 하는 것.
내 예상이 맞았다는 듯.
녀석은 입을 열었다.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네?”
“혹시… 이기영 님께서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녀석의 등 뒤로 그림자 하나가 솟아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김예리.’
어두운 진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일까.
‘3교대로 감시하고 있었나 부네.’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녀가 단검을 뽑아 든 것은 순식간,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은 우리 꼬맹이답지 않다.
놈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단검이 녀석의 목으로 떨어진다. 물론 놈의 목구멍에 구멍이 뚫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김예리.”
“…….”
“무슨 짓이냐고… 물었어요.”
계약을 위반했으니 사형집행하고 있는 거자너. 그렇지?
의자에서 넘어진 채로 자신의 목을 매만지고 있는 망둥이는 꿈이라도 꾼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녀석의 목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녀석 역시 그걸 깨닫고 있다. 방금 전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걸 말이다.
다시 한번 슬픈 진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타이밍. 책망하는 듯한 내 눈빛에 김예리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리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생각이 있으면 현성이한테 말하진 않을 거야.’
“이기영 님께서는….”
그 이후로는 신나게 색욕과 영면의 군주에 대해서 지껄이는 스퀴어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물론 녀석이 말을 끝마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콰앙! 하면서 거칠게 열린 방문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거구. 잔뜩 흥분한 모습, 붉어질 대로 붉어진 눈, 항상 바보 같이 웃고 있던 모습과는 다르게 마치 악귀와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가 보인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얼굴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우리 돼지새끼.
김예리가 불러온 것은 김현성이 아니라 박덕구였다.
“네놈이구나.”
“덕구야. 잠깐….”
“이 은혜도 모르는 잡놈이… 이… 이…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어떻게… 우리 형님한테… 우리 형님한테…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니깐!”
‘쟤 왜 저래? 왜 저래?’
“이 금수보다 못한 개자식!”
‘너 뭐야? 너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이… 이 후레자식노오오옴!!”
퍼어억. 콰드득. 콰아아아앙!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주먹이 망둥이의 안면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