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28화
뒷정리 (11)
물론 그전에도 녀석이 잃을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도시의 영주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일반 모험가의 기준에서는 충분히 가진 게 많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언제나 가치는 상대적인 법이니까.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아마 성향이….
‘조심스러운 혁명가였지? 아마.’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희영이 가지고 있었던 성향의 이상적인 봉사자, 김현성이 가지고 있었던 선의의 중재자와는 다르게 저런 종류의 성향의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다.
사회제도나 경제 제도, 기존의 가치나 관습을 타파하는 게 혁명의 사전적인 정의라지만 겨우 그것만 가지고 녀석이 빛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언제나 기존의 제도와 관습이 나쁘다는 법은 없다. 그 혁명이 꼭 옳은 방향이라는 것도, 정의로우리라는 법도 없다.
큰 가치를 위해서 깃발을 들어 올리는 경우도 많지만… 일부는 ‘아, 이거 거지 같네’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당연히 스퀴어트의 경우가 후자일 것이다. 녀석의 혁명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발했을 확률이 높다.
대의를 내걸고 있었지만 녀석이 바꾸고 싶은 것은 기존의 가치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거지.
변방에 있는 변두리에 갇혀 있는 자신들이 대륙의 패권싸움에 밀려 있다는 환경,
모든 관심과 집중이 명예추기경과 교국에 쏠려 있는 환경,
현재의 대륙을 돌아가게 하고 있는 모든 제도들과 관념에 대한 아쉬움이 조심스러운 혁명가가 조심스럽지 않은 행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잠깐, 명예추기경님.”
굳이 바깥으로 나가는 이쪽을 붙잡은 녀석의 표정에는 초조함이 깃들어 있다.
어느새 잃을 게 많은 인간의 눈을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벼랑 끝으로 내몰리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최소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저는 스퀴어트 님을 믿고 있습니다.”
“네?”
“여러 가지로 챙겨드리고 지원해 드리고 싶은 것도 많지만… 실적이 필요하다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 이네요. 제가 여러분들께 함부로 아이템을 지급할 명분이 없을뿐더러… 만약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비공식적인 지원은 결국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무엇보다 모험가의 성장은 아이템만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모험가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던 제가 드리기에는 우스운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들을 곁에서 지켜본 제 입장에서는… 당장 눈앞에 있는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차근차근히… 네…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걸음을 내딛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러니….”
“후우…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스퀴어트 님.”
“…….”
차분히 말해야지.
냉정하게 말하지도, 네가 날 속이고 있는 것을 안다는 어투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다소 무감각하게 아무런 뜻 없이 말했다는 것이 어울린다.
이후에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아마 눈빛에는 선의가 담겨 있을 것이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는 대륙에 있는 모두를 사랑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으니까.
스퀴어트는 나쁜 새끼였지만 나는 그런 녀석이라고 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네?”
“저는… 바보가 아니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스퀴어트 님.”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퀴어트 님께서 제게 받은 것으로 무엇을 하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저는 그것이 아니라….”
“제가 스퀴어트 님에게 지원을 드리고 싶었던 이유는… 스퀴어트 님이 이곳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랍니다. 색욕과 영면의 군주를 견제하고, 자칫 중앙집권체제로 흘러갈 수도 있는 대륙에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서 말이에요.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요. 베니고어 님께서 스퀴어트 님을 내린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겼거든요.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답니다.”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는 놈의 심경이 복잡한 것 같다.
애초에 명예추기경을 이용하자고 생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의에 숨어 자신의 야망을 숨기는 것이 이득이라는 생각을 하기야 했겠지만 녀석의 성향상 이쪽을 무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녀석 나름대로 도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결국에는 먹혀들었다.
명예추기경은 예상한 것보다 자신에게 더 호의적이었고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과대평가했다고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을 수도 있었던 순간이리라.
‘이건 명장면이야.’
명예추기경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스퀴어트가 정의로운 인물이었든, 스퀴어트의 목적이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였든 간에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직 하나.
‘대륙.’
대륙 이외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리라.
이는 한 차원 높은 사고방식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관심보다는 조금 더 높은 차원에서 대륙을 바라보고 있는 방식.
스퀴어트 같은 놈들은 이해할 수 없다. 대륙을 바꾸겠다는 가치를 방패로 세운 채 녀석은 주사위를 던진 녀석이 이미 초월자에 이른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마음을 어떻게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완전무결한 성인.
대륙의 생명체들을 위함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것도 무가치하게 바라보고 있는 성자.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모습.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스퀴어트는 마치 내가 베니고어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그럼 믿고 있겠습니다. 스퀴어트 님.”
녀석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다시 한번 믿는다고 말해주자.
“네.”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나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버림받는다는 걸 깨닫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써 외면하고 싶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럴 줄 알고 벌써 턱수염 산적네랑 미팅 일정 잡아놨어.’
그냥 너 스트레스 주고 싶어서.
잃을 게 없는 인간보다 잃을 게 많은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이 더 쉽자너.
“창렬 씨.”
“예. 부길드마스터.”
“오늘 스케줄 뭐 있었죠?”
“길드마스터와의 다과회가 있습니다. 피크닉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길드마스터가 직접 요청하셔서… 아마 테마와 장소에 관한 걸 가져오실 것 같습니다. 길드마스터께서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직접….”
‘그놈의 피크닉 계획을 무슨 지금까지 짜고 있는 거야.’
“테마는 또… 혹시 들은 거 있어요?”
“아마 캠프의 양식이나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점검하고 계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대륙 내에 있는 유랑민들이 직접 사용하는 텐트를 몇 가지 가져오신 것은 확인했지만 그 외에는….”
“아. 남부 소수민족….”
“고대 엘프 귀족들과 야전 생활을 하는 다른 이종족들의 양식도 살펴보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이 외에는 저도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할 필요는 없는데….”
“이후, 저녁에는 정하얀 님, 한소라 님, 세라핌 님과 함께 식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붉은 용병 길드에 방문하기로 하셨고….”
“다음 날에는….”
“안식처에서 행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음… 현성이 스케줄은 옮기는 게 좋겠네요. 피크닉은 당장 갈 것도 아니고… 하얀이랑 식사하는 건 한 번 미룬 적이 있었으니까. 그… 턱수염 산적… 그분… 이랑 지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작업 준비 중이지 않나요? 내가 수도로 찾아가는 게 좋으려나.”
“미리 전달해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원래 이런 건 몰래 가야 돼. 그래야 감동이 더 커지거든.
경쾌하게 몸을 옮기려고 하는 타이밍에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까 힘들다고 했더니 그새 마차를 불러온 모양이다.
“스미스 대령도 타요.”
“네… 알겠습니다.”
“스미스 대령 연방에서 인기 많잖아. 얼굴마담으로 데리구 다니면 딱이죠. 그렇지?”
편안하게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핀다.
워프 게이트로 향하는 도중 스퀴어트 쪽을 바라보자 쓸데없는 대책회의를 하는 광경이 눈에 보였다.
제법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명예추기경의 마차가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급속도로 냉각되는 장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수도로 향한 것 같습니다.
-그레고리 쪽으로 향하지는… 않겠지.
턱수염 산적 이름이 그레고리였구나.
-후우… 제길…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만약 명예추기경이 그레고리 쪽에도….
님자는 어디다 빼 먹었어?
-그렇게 쉽게 저희를 버리지는 못할 겁니다.
아니. 쉽게 버릴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방금 전에 일어난 상황이 너무… 명예추기경이 실망한 것같아 보이지 않았습니까? 상대는… 파란의 일반 길드원이었는데….
-명예추치경의 호윈데. 그냥 일반 길드원일 리가 있겠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뒷세계 쪽에서 김창렬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더라. 박리안이라는 여자와 함께 명예추기경의 호위를 맡기 위해 특수 훈련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
-죽인 사람 숫자만 천 자리 숫자가 넘어간다고 하더라고.
그랬어?
-그… 박리안은….
-스미스 대령이 함께 왔으니 같이 안 왔을 수도 있고… 상상하기는 싫지만 아마 이 방에 같이 들어와 있었겠지… 아무튼 저쪽 기준이 높은 거야. 연방을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우리는 지금부터 시작이고… 여튼 레이넌이 당한 것도 어쩔 수 없었어.
-제기랄! 애초에 연방이 이 지경이 되지만 않았어도… 만약 연방에 조금이나마 더 나은 지원이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별것도 아닌 놈들이….
-진정해. 레이넌.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니까.
-스미스 대령 그 개자식도… 앞으로만 번지르르하지. 그런 놈이 무슨 연방의 영웅이라고. 제기랄. 언제부터 명예추기경의 발바닥이나 핥고 있는 놈이 연방의 영웅이 됐나? 응? 그놈은 개야. 명예추기경의 개.
스미스 대령… 연방에서… 인기 별로 없었구나.
-후우… 방금 소식이 들어왔다.
-뭐?
-아무래도 명예추기경이 던전으로 간 게 맞는 모양이야… 모르긴 몰라도… 그레고리를 만나러 간 게 확실하겠지.
나도 모르는 소식을 녀석들이 먼저 알고 있는 기적.
“도착했나요?”
“네.”
마차의 문이 열리자 얼굴과 몸에 잔뜩 흙덩이를 묻히며 나를 반기는 산적 수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는지 제대로 몸을 닦을 시간도 없이 이쪽을 맞이한 것이다.
한 도시와 한 길드를 통솔하는 길드마스터답지 않게, 최전선에서 노동을 펼친 모양. 그만큼 인력이 부족하다는 걸 테니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땀 냄새와 함께 기분 나쁜 냄새가 코끝을 스치기는 했지만….
‘열심히 노동 중이었자너.’
“명… 명예추기경님. 이 누추한 곳에서 어찌….”
슬그머니 한 발자국 다가서자 저도 모르게 화들짝 한 발자국 물러서는 녀석.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현재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깨달은 움직임이었다.
혹여나 더러운 것이 묻을까 좋지 않은 냄새가 날까 자신이 먼저 뒷걸음질을 친 것이 분명하리라.
‘노동으로 흘린 땀은 신성하잖아.’
이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살짝 포옹해 주고. 손을 꽉 잡아준다.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명예추기경님….”
이 쉑 마음에 드네.
이 소식 역시 스퀴어트에게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벽을 향해 함께 의자를 집어 던지는 놈의 모습이 망원경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