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29화
뒷정리 (12)
‘그래. 이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그래야지 좀 나도 힘이 나고 그렇지.
“죄송합니다. 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하실 줄은… 이 누추한 곳에….”
“누추한 곳이라니요. 여기 누추한 곳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오실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레고리 님.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답니다. 오히려 제가 방문한 것이 실례가 된 것은 아닌지….”
“절대로 아닙니다! 절대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아마 모두에게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되는 건가요?”
이제 그만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듯 장난스럽게 말을 잇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 일단… 일단 안쪽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네.”
물론 녀석이 어째서 나를 이곳에 세워뒀는지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앉아 있을 곳이 없자너.’
아마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쉼터 정도는 있겠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온 귀빈을 맞이할 공간이 있을 리 만무.
본격적으로 뒷정리가 시작되기 시작된 시점이 3일 전이고, 길드마스터까지 작업에 동원될 정도라면 귀빈실을 만들어 놓을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던전 안에 귀빈실이 뭐가 필요하겠어.’
연방의 적폐들이야 애초에 이곳에 오기를 꺼릴 테고,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은 이들은 모조리 작업에 투입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레고리를 비롯한 권력자들이 노동자들과 한솥밥을 먹고 있는 현 상황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꾸려진 캠프를 보니 정치적 의도 따위는 없는 모양.
‘그냥 가난한 거네.’
시간도, 인력도, 물적 자원도 부족하다 보니 제대로 된 캠프를 만들 수 있을 리 만무.
최대한 빠르게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휴식처나 숙소도 만들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식당이나 숙소가 보이기는 했지만 간신히 천막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고작.
마법사들이 환기 마법이나 클린 마법을 욀 여유도 없었는지 화장실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는 오물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간부 전용 숙소가 있기는 하네.’
아마 이곳밖에는 들일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식당이나 쉼터 같은 곳들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든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듯이 여러 가지 말을 건네고 있는 녀석, 아니나 다를까 간부 숙소에서 젊은 놈들 몇 명이 빠져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급하게 숙소 안을 정리하고 나오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누… 누추하지만….”
“그리 누추하지도 않은데요?”
‘아니. 누추하기는 해.’
쓰레기들을 전부 치운 상태지만 정리가 그렇게 순식간에 완료될 리 만무.
그럴듯한 테이블 하나에 흰색 천이 덮여 있는 게 더 웃기다. 침구류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색하게 가려져 있었고, 뜬금없이 화분이 놓여 있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귀빈실에 턱수염 산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어 보였다.
명예추기경은 약자의 편이었으니까.
또 노동자의 편이기도 하지.
기본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 것은 턱수염 산적의 책임이니까.
혹여나 명예추기경이 분노해 경을 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기본적인 심정이 깔려 있을 수가 있어.
근데 너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네가 기름때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거 보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
“변명의 말씀을 드리자면… 크흠… 작업을 너무 갑작스럽게 진행하는 바람에 캠프의 설치가 더뎌지고 있습니다. 물자와 인력이 들어오는 대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예정입니다. 식당이나… 화장실… 숙소, 쉼터 같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곳을 중점적으로….”
“…….”
“아마 정확한 일시는 열흘 후가 될 것 같습니다. 협의한 업체가 준비가 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대로 된 보급식량은 삼 일 후부터 시작하기로… 업체와 미팅을 마쳤습니다.”
‘제대로 된 보급 식량이 오긴 오겠어?’
“그리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레고리 님. 현재 연방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협력업체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도… 또 협력업체에 나가야 할 비용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말이에요. 연방에 이 정도 인원이 사용할 물자를 보내줄 수 있는 길드가… 있을 리가 없겠죠. 연방민들도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는 마당에… 또 최근에는 기근이었으니….”
“…….”
“오히려 제 잘못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대책없고… 갑작스럽게 일을 맡긴 것은 아닌지… 조금 더 확실한 계획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레고리 님을 비롯한 연방님들에게 괜한 부담감을 안긴 것은 아닌지… 후우….”
“그렇지 않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얼마나… 감사한지… 차마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이미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명예추기경님의 잘못이 없으니 제발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교국이나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이름으로 지원을 드리고 싶지만…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그레고리 님께서 더욱더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이미 연방이 과도한 특혜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연방민들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연방민들이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과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
“모두가 힘든 시기가 될 거예요. 연방민들에게도, 이곳에서 힘써주시는 노동자분들도 말입니다.”
“…….”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레고리 님.”
“아닙니다. 이미… 이미 충분히… 아마 명예추기경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그럼 일어나서 한번 둘러보도록 할까요?”
“네! 모시겠습니다.”
이후에 보일 풍경이야 뻔했다.
“현재 지하 1층부터 수색하고 있는 도중입니다. 정비사업을 위한 기반을 닦는 작업도 동시에 겸하고 있어서… 속도가 처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있습니다. 물론 그 무엇보다 중요하신 게 안전이기 때문에… 마법사들과 유사시를 대비해 움직일 병력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보호마법 같은 경우에는….”
“24시간 주문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휴식시간에도 주문이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첫 번째도 안전, 두 번째도 안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던전 정비 계획이 이미 완료되어 있는 상태에서 작업하시고 계신 건가요?”
“아직 정확한 설계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빠르게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닦고 있습니다. 물자가 움직일 수 있는 도로를 닦는다거나 건물의 잔해들을 치우는 일들 말입니다. 물론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은 따로 모아두고 있습니다. 일부 신전이나 조각상 같은 경우에는 종교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물건들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복원 사업 쪽도….”
“사실 그 부분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연방에 실력 있는 복원사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네. 대륙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연방의 복원사들 같은 경우에는 드워프들도 인정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은근슬쩍 홍보도 하네.’
“교황청의 신학자들 역시 무척 만족하더군요. 특히 제이나 추기경님께서….”
“아아. 제이나 추기경님께서 말입니까?”
“예.”
말 그대로 녀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주고 있었다.
특히 관리가 필요했던 곳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처리하는 쪽, 굴착기 같은 종류의 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높은 스펙을 지닌 모험가 인력이나 마법사가 필요한 쪽이었다.
아마 그레고리 역시 이쪽에 투입되어 작업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작업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잠깐 다녀오셔도 됩니다.”
“큼…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커다란 바위를 두고 사투를 펼치고 있는 작업원들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두 손으로 바위를 쥐고 옮기는 모습.
이런 이벤트에 명예추기경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은가. 고사리만 한 손도 도움을 주려면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법.
솔직히 다른 이들이 느끼기에는 그냥 짐덩어리가 거치적거린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높은 자리에 이른 사람이 노동의 땀을 흘리는 모습은 아름답게 비치는 법이다.
어쩌다 보니 어느새 함께 땀을 흘리게 되는 그림.
“아이고… 명예 추기경님. 위험합니다요!”
“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시지요.”
“하지만…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실례되는 말이지만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큼… 큼….”
“…….”
“…….”
나이 지긋한 선임 작업원 할아버지의 독설도 웃으며 넘기면서… 뭔가 영차영차 함께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김창렬은 열심히 영상을 찍고 있는 중, 홍보 영상으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것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다.
얼굴에 흙먼지 좀 묻혀주면 딱 그렇지.
‘사실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뭔가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좋은 소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상황이 딱 들어맞다 보니 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게 된 상황.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팔이 너무 아픈데….’
슬그머니 스미스 대령에게 눈치를 줬지만 아직 보좌관으로 처음 온 이 녀석에게는 변명거리를 만들어 노동지옥에서 빠져나오게 도와달라는 신호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다음 일정이 있습니다. 이만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귓속말을 해주면서 슬그머니 몸을 빼주는 게 국룰이 아니었던가.
‘시바. 덥고 습해. 여기 냉방 마법은 안 걸어놨나. 아니, 걸어놓은 게 이 정도야?’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아니요. 조금 더 돕고 싶은데.”
말리는 게 그레고리라면 쉴 수 없다. 혹시나 스미스 대령 이 새끼가 날 맥이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 찰나. 뜻밖에 이쪽을 구해준 것은 몰래 온 손님들이었다.
‘왜 안 오나 했다.’
피 빨러 온 모기들.
지금까지는 들러본 적도 없으면서 굳이 찾아온 연방의 상원의원들.
“명예추기경님. 연방에서 온 상원의원님들께서 인사를 드리고 싶으시다고….”
“아… 네. 손님이….”
“추가로 정비 사업에 대해 논의할 사항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마워요. 스미스 대령.”
심지어 이 자리에는….
‘너넨 또 왜 왔어.’
스퀴어트 무리도 섞여 있었다.
‘적폐 다 됐네. 이 새끼들도.’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 얼굴.
본래 계획이라면 초신성들과 함께 몰려와 명예추기경님도 계셨군요, 하고 넉살 좋게 말을 건넸겠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다.
자신들 말고도 피 빨러 온 모기들이 함께 와 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누가 봐도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은 가관.
보좌관이나 시동들을 대동하고 의자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연방 상원의원들의 모습과 스퀴어트 녀석들의 모습이 꽤나 잘 어울린다.
미묘하게 거리감이 있고, 실제로도 어정쩡하게 두 집단이 떨어져 있지만 내가 등장하자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마저 똑같다.
그레고리는 혼자서 헛기침을 하고 있었고….
“명예추기경님. 방문한다고 말씀을 해주시지 않고….”
뻔뻔하게 입을 여는 의원과는 다르게 스퀴어트는 염치란 것은 있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중.
여기서 입을 열면 자신 역시 같은 사람 취급받을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일단은 등을 돌려 턱수염 산적을 올려본 이후 순진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레고리 님.”
“예? 명예추기경님.”
“이번 정비 사업에서 여기… 이분들은 어떤 역할을 맡으셨나요?”
‘기영이는 몰라요.’
“네?”
‘아무것도 몰라요.’
기영이는 정말로 몰라서 물어본다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