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32화
뒷정리 (15)
“이… 이 은혜도 모르는… 콜록….”
“…….”
“명예추기경님께서… 얼마나… 콜록….”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몸은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 그레고리가 허물어지자마자 근처에 있었던 그레고리의 길드원 중 하나가 검을 들고 달려드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잠깐 멍하게 그레고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사이, 어디에선가 날아온 화살이 놈의 관자놀이에 틀어박혔다.
단말마의 비명을 흘리고 쓰러진 검사. 여기저기에서 무기를 뽑는 소리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 그레고리 측과 아군 측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으아아아아!!”
“전부 죽여! 빨리! 빨리!! 죽여! 제길… 빨리! 처리해!”
“이 개자식들이! 어떻게! 감히!”
“그레고리 님! 그레고리 니임!! 으아아아아!!”
“사제들을 불러! 위쪽에 도움을 요청해!”
“통신병부터 처리해라! 마력차단 주문! 빠르게!”
“아아아악!”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제기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
정말로 어쩔 수 없었어.
‘이게 연방을 위한 길이야.’
이래야 바꿀 수 있어.
‘언제까지 교국의 애완견처럼 살 수 없잖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커다란 그림을 생각하면 자신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범죄라고 말하겠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레고리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명예추기경이 저 신화 등급의 창을 명예추기경에게 바치겠다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행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저 그레고리가 조금만 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어도 녀석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과거 베니고어가 사용하던 교국의 유산,
대륙의 커다란 서사를 관통하는 역사 그 자체의 산물.
저 창은 대륙의 흐름을 세계의 흐름을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물건이라 할 만했다.
단순한 물건이라면 그레고리의 말처럼 공을 세운 것으로 만족하겠지만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보물이요. 연방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수단을 지금의 교국에 가져다 바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저 창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큰일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 것뿐이다.
‘무식한 놈.’
말 그대로 그레고리는 앞만 볼 줄 아는 녀석이었다.
지금의 연방을 만든 무능력자 중 한 명, 스스로 개이기를 자처하면서 연방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대륙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던 버러지.
녀석이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연방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커다란 그림을 볼 줄 모르고 작은 공에만 집착한다. 무엇이 더 옳은지 알았더라면 지금의 녀석이 누워 있지는 않았겠지.
범죄가 아니라 교국의 개이기를 자처한 매국노를 처단한 것이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아아아악!”
“커헉!”
“살려….”
“이… 배신자… 들… 범죄자….”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가운데. 천천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굳이 싸움에 참여하지 않더라고 이미 전황은 뒤집힌 상황, 상대는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많이 지쳐 있었고, 제대로 된 준비도 하지 못했다.
기습은 한순간에 벌어졌고 녀석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전투가 끝나가고 있다.
철퍽철퍽 하는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핏물이 고인 바닥을 거니는 것이 신성하게 느껴진다.
벽에 자리 잡은 채로 자신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고양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손을 뻗는 순간.
“이거구나.”
이런 감각이구나.
온몸에 폭발하는 듯한 힘이 느껴졌다.
“하하… 이거구나.”
이게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구나. 이게 대륙의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구나.
마치 초월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지 않은가. 인간과 초월자를 나누는 격이 있다면 이 창을 손에 든 것으로 그 벽을 뛰어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은 지금 다른 이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보다 더 높은 격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자신과 이 성물의 만남은 마치 이야기 속의 한 장면과도 같지 않은가.
이 대륙에 자신의 역할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신 역시 흔히 지나가는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지 않은가.
허공에 창을 한 번 휘두른다.
단순히 한 번 휘둘렀을 뿐이었지만 마치 공간이라도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자 피에 젖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스퀴어트….”
“…….”
“이제… 어떻게 하지?”
“동요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옳은 일을 한 겁니다.”
“…….”
“옳은 일이었습니다. 저들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은 유감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멸의 레이넌.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삐뚤어진 대륙을 본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얻은 겁니다. 지금에서야 그것을 얻은 거예요.”
“명예추기경에게 무구를 전달하지 않을 작정인가 보군. 숨길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당연한 소리다. 이미 이 지경이 된 뒤야. 다행히 위쪽에는 아직 소식이 흘러가지 않은 것 같고…. 아마도 결계의 영향이겠지. 그레고리… 이 멍청한 놈… 결국 제 무덤을 제가 판 격이로군. 후우….”
“그래서 다음 계획은 뭐지? 스퀴어트.”
“그저 모두가 기억해 주시면 됩니다. 이곳에서는 단순한 사고가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오기 전에 이미 그레고리 무리는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고, 뒤늦게 전투에 합류했지만 모두를 구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찝찝해지겠군.”
“하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이대로 가면 모두 끝이니… 주변에 여신의 거울이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절멸의 레이넌 당신은 입구로 가서 들어오는 전투 인원들을 통제해 주시고, 난사의 로빈우드 당신은 뒤처리를 부탁드립니다. 레인저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녀석이라면 믿을 수 있다. 다른 레인저들이 읽지 못하게 할 정도로 흔적을 망치고 그레고리와 그의 길드원들이 몬스터에게 당한 것처럼 위장하는 일 정도는 쉬운 일이겠지.
‘시간 싸움이야.’
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후욱… 후욱… 이… 더러운 자식들….”
“…….”
“이… 이 은혜도 모르는 놈들! 이 더러운 위선자 새끼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레고리였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엉망이 된 모습, 호흡은 거칠어져 있었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처럼 보였다.
“네놈들이 어떻게… 명예추기경님을… 배반하고… 콜록… 어떻게….”
“차라리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레고리.”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냔….”
“…….”
“…….”
“모두 물러서십시오. 최소한 그의 마지막은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지금의 연방을 만든 썩은 세력이었지만 그 역시 연방에 기여한 것이 많은 위인이니. 이 창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습니다.”
“네노옴!!”
‘약해졌구나. 그레고리.’
아니, 강해진 것은 자신이다. 온몸에 힘이 넘쳐 주체할 수 없을 지경, 눈앞에 있는 거한은 한때 연방을 주름잡았던 강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무식하게 돌진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범의 아가리 속으로 몸을 들이미는 초식동물처럼 보일 지경.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다. 자신은 초월자였고 녀석은 죽어가는 인간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건틀릿과 창이 부딪치자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는 건틀릿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에게는 유감이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 없겠군요.”
“이… 못난 자식… 명예추기경님께서… 우리를… 콜록….”
“그놈의 명예추기경. 명예추기경. 그것밖에 할 말이 없는 겁니까? 당신도 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괴물의 모습을… 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건 명예추기경님이… 콜록… 아니었어. 그가 이곳에 얼마나… 우리는….”
“당신 같은 자들이 연방을 망친 겁니다. 그레고리. 향상심 없고, 그저 그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기 바쁜 이들이 지금의 대륙을 만들었다는 건 생각하지 않으신 겁니까? 모두가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세요. 이게 정상적인 상황처럼 보이십니까?”
“대륙이 그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멍청한 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모두가… 그날의 모습을 머릿속에 지우고… 있는 것은…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그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곳에 그분이 필요하고… 결국 그분께서… 우리들을 밝은 길로 이끌어 주실 거라는 걸…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다시 한번 명예추기경님을… 내려 주신 것은… 그런… 명예추기경님께서 다시금… 대륙에 내려오신 것은….”
“완전히 세뇌되어 버렸군.”
“스퀴어트….”
“…….”
“…….”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쿨럭… 않아.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소외받은… 이들을 위해….”
“…….”
“그분이야말로… 대륙의….”
“미쳤어. 그레고리. 생각한 것보다 더 미쳐 있어.”
이미 녀석은 죽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깃든 무언가가 굉장히 기분 나쁘게 다가온다.
“아직… 대륙은… 그분을… 필요로… 그분이야말로… 우리 소환자들을… 바른길로… 이끌어 주실….”
“…….”
“콜록…. 콜록… 은혜를… 갚아야… 그분께 받은 은혜를… 창을 그분께 향하게 해서는….”
“…….”
“명예추기경님께 진 빚을….”
“멍청한 놈.”
“으아… 으아아아아아아아!!”
다 죽어가던 녀석이 갑작스레 한 발자국을 내디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살짝 밀려 나갔지만 대세에는 영향이 없다.
몸을 옆으로 돌린 이후에 창대로 녀석을 후려치자. 창이 박혀 있던 벽면으로 그레고리가 처박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콰과아아아아앙!! 소리와 함께 벽면이 부서지며 그레고리가 그대로 벽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제길.”
“…….”
“제길!”
무너진 벽 뒤에 보인 것은 밑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한 지하.
그레고리가 저 밑으로 떨어진 것을 깨닫는 것이 당연했다.
* * *
쨍그랑.
“괜찮으십니까. 명예추기경님.”
“…….”
“잠깐… 유리를 치워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
“무언가 불편한 일이라도….”
“…….”
“아니요. 그냥…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군사님. 놀라셨을 다른 분들께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