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35화
뒷정리 (18)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하하….’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순간이었지만 돌파구가 눈앞에 보인다.
“처, 처, 처, 처음… 뵙겠습니다.”
“하… 하하하하!”
‘마법사 하나.’
시야에 비치는 것은 겨우 마법사 하나.
커다란 지팡이와 하얀색 로브로 몸을 가리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마법사 하나였다.
당연히, 당연히 저 마법사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상징적인 존재.
대마법사, 마법의 신이라는 이명 외에는 다른 별명이 어울리지 않은 초월적인 마법사.
현대의 마법 지식으로는 그녀의 마법을 정의할 수 없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륙의 마법 수준을 몇 세기나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마법사였다.
자신 역시 그녀를 잘 알고 있다. 대륙에서 사는 모험가라면 그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이상할 것이다.
아니, 모험가뿐만이 아니다. 아마 대륙민 모두가 그녀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하얀.
혼자 온 건가?
김현성은? 조혜진은 같이 오지 않은 건가?
다른 인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감찰단이나 린델의 삼대길드로 명망 높은 검은백조의 암살자, 붉은용병의 전위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의문이 해소된 것은 한순간이다.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건가?’
마법사가 단독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나 전투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혼자 움직일 수가 없다.
마법사라는 것은 그런 직군이다. 절대적으로 전위의 도움이 필요한 직군. 아니,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직군.
물론 정하얀, 그녀 역시 다른 마법사들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정도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에 대한 데이터도 없었을뿐더러, 마법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녀라면 분명히 근접전 대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이 오기 전까지 몇 가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면 단독으로 이쪽을 맞이하려고 한 것도 이해가 간다.
급하게 병력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순간이동이 가능한 그녀를 선봉으로 앞세운 거라면….
‘데이터가 없는 거야.’
스퀴어트라는 인물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할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명예추기경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는 베니고어의 성물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예전과는 달라.’
예전이었다면 그녀에게 허무하게 당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베니고어의 창.’
신기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아이템. 아니, 신기 그 자체. 자신조차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힘을 품고 있는 성물.
‘이런 걸 두고 마법사한테 당한다고?’
“나, 나, 나쁜 사람이라고 했었으니까.”
“…….”
“죽, 죽, 죽이지만 않으면… 그렇지. 소라야?”
‘소라가 도대체 어디 있어?’
그녀 말고는 보이지 않는다.
“아… 소라는 같이 안 왔지….”
보통의 마법사가 메모라이즈 할 수 있는 마법의 개수는 하나.
전설 등급의 마법사가 메모라이즈 하거나 한꺼번에 외울 수 있는 주문의 개수는 둘에서 최대 셋 정도.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정하얀이라면 아마 다섯 가지 정도의 주문을 메모라이즈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니, 어쩌면 최대 7개의 주문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대비해야 할 주문의 개수는 최소 7가지. 그 이후에 최대한 빠르게 캐스팅을 한다면 두 가지 정도 캐스팅 할 수 있겠지.
‘아니.’
공간이동마법과 보호마법은 필수로 외워 놨을 테니 사실상 대비해야 할 주문은 7가지가 최대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녀와의 거리는 약 900미터 정도. 빠르면 3초 안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
실내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생각해 보면 대형살상마법을 사용하는 것 역시 불가능.
한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게 주문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통로를 꽉 채우는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실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 느껴진다.
화아아아아아악!
모든 걸 불태울 것만 같은 지옥의 겁화가 빨려 들어오듯 쇄도하는 것을 보니 자연스레 몸이 굳어졌지만 손에 쥔 창을 꽉 잡은 이후에 들어 올렸다.
‘과연….’
하지만….
‘할 수 있다.’
베니고어의 창은 자체적으로 사용자에게 고위급의 신성보호막을 상시 유지시켜 준다.
‘첫 번째는 이걸로 돌파해야 돼.’
저 거대한 불덩이는 이후에 들이닥칠 주문을 위해 시야를 차단하는 용도로 던졌을 확률이 높다.
몸을 최대한 웅크린 이후에 화염 속을 돌파하자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두 번째.’
이후에는 푸른 색깔을 지닌 마력이 들이닥치고 있었으니까. 마치 채찍처럼 보이는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온다.
일반적인 마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베니고어의 창의 신성력이라면 잘라낼 수 있다.
한 걸음을 더 내디디고 창을 휘두르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와 푸른 마력을 베어 가른다.
‘세 번째.’
“할 수 있어.”
‘네 번째.’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다섯 번째.’
“제기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여섯 번째!”
눈에 보이지 않는 주문,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마력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이미 몸이 넝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어!!”
창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두른다. 순식간에 뻗어 나간 빛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마치 한 단계 벽을 뛰어넘은 듯한 느낌.
지금 자신은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중이다. 명백하게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이게 초월자들이 보는 풍경이 아닐까.
회색빛의 용사 라파엘,
아니,
신창이라고 불리는 조혜진.
아니,
붉은 전신이라 불리는 차희라, 노을빛의 검신 김현성이 보고 있는 풍경이지 않을까.
“하하… 하하하하.”
웃음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죽어가는 육체는 다시 재생되고 있었고 온몸에 활력이 넘쳐난다.
태산조차 가를 수 있는 힘이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자신 역시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동안은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자격을 얻었고 기존의 기득권들과 마찬가지로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생쇼를 하고 있네 진짜.
“일곱 번째!!!”
두 손에 창을 꽉 쥐고 마지막 마법을 창으로 갈랐을 때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터져 나온 목소리.
“으아아아아아아아!!”
구겨진 대마법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 발자국만 더.’
아니나 다를까, 주문을 전부 소진했는지 캐스팅을 외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재빠르게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디며 창을 뻗는 순간.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이빨을 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뒤에서 검붉은색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문이… 하나 더 있었나?’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그런 게 아니야.”
통로 전체가 마력에 삼켜져 있다.
위를 올려다보자 검붉은 마력이 뭉쳐 딱딱한 거미 다리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멈춰서 주변을 바라보자 어느새 몸이 어두운 공간 안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살… 살려줘요. 제발… 흐으윽… 제발… 잘못했습니다. 제가….”
“…….”
‘여기는 어디야.’
공간이동으로 이동된 건가? 아니면 내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나. 환상마법에 당한 걸까? 도대체 이게….
마법, 마력 그 자체로 만들어진 것만 같은 이 공간은 도대체 뭐지.
“아아아아악! 제발… 제발….”
대마법사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저 멀리서 익숙한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넌?’
절멸의 레이넌….
문제는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 에게 끌려가는 중이다. 수녀복을 입은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넌을 질질 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녀석의 상태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팔다리 근육이 모조리 끊어져 있는 것 같았고 멀쩡한 것은 머리통밖에 없어 보였다.
복부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물이 삐져나와 있었고 입으로는 미친 사람처럼 계속해서 살려달라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구하는 것이 옳다.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대륙에 소환된 모험가가 말하기에는 부끄러웠지만… 아마 그 누가 보더라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끼이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수녀복을 입은 인형이 녀석을 갈고리 위에 매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마치 고깃덩이들을 진열하는 것처럼 무감각한 눈으로 말이다.
절멸의 레이넌뿐만이 아니라 함께 움직인 이들이… 무규칙적으로 올라서 있는 거대한 갈고리 위에서 신음을 내지르며 꿈틀거리는 광경은….
“아아아아아아악!”
“도망쳐… 도망쳐! 스퀴어트! 도망쳐….”
“로빈우드?”
“도망치라고!!”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아아… 아아아아!”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도망쳐!”
창백한 얼굴로 순식간에 멀어지는 녀석.
그 뒤에 커다란 모자를 푹 눌러쓴 마법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 나쁜 사람들이… 어디 숨었나요….”
“…….”
“나, 나, 나쁜 사람들이 어디 숨어 있나요? 우리 오빠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한… 나, 나쁜… 나쁜 놈들이 어디 숨어 있을까? 흐윽… 끄으으윽….”
“제기랄… 여긴 어디야. 어디야!”
“나쁜 사람들… 어, 어디 있어? 소라야?”
“스퀴어트! 스퀴어트! 뭣 좀 해봐! 스퀴어트! 구해줘! 구해달라고! 흐으윽… 구해줘….”
‘여기는… 뭐야… 지옥… 지옥인 건가.’
“…….”
“…….”
하늘에서 내려온 검붉은 다리가
몸을 꿰뚫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쁜 사람. 여기 있다. 훌쩍.”
“아아아… 콜록.”
“도망간다… 도망간다… 나쁜 사람이 도망간다! 쫓아가자. 쫓아가자 소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