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37화
뒷정리 (20)(삽화)
조용히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살았나…?’
살았다. 살았어.
몸에 이상은 없다. 어두운 공간 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꿈인가… 꿈인 건가… 정신을 잃기 전에 내가 봤던 게… 정말로 꿈이었나.
저도 모르게 팔을 움직이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후에야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일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얀색 살인귀, 유령들과 함께 검붉은 공간을 거닐던 수녀.
명예추기경과의 대화, 당장 눈앞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그를 도발했던 것. 그리고 그의 마지막 목소리까지.
‘그러니까….’
꿈 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느릿했다. 솔직히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제대로 이해되는 것이 없었다.
구역질 나는 냄새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탓에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절한 지 얼마나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 뇌가 뒤늦게 깨어난 탓도 있을 것이다.
갑작스레 이 모든 게 현실로 다가온 것은 저 멀리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베니고어시여….”
‘제길….’
제길….
이단심문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이단심문실이다.
‘종교재판을… 받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스퀴어트 님.’
다시 한번 녀석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는 듯했다.
“제길… 제길!”
제기랄…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가 베니고어의 창을 회수한 모양인지,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승산이… 승산은 있나?’
하얀색의 살인귀를 피한 것은 좋았지만….
만약에 정말로 종교재판이 열린다면 자신이 살아남을 일말의 희망이 있을까?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베니고어의 성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적을 지우기는 했지만 그레고리 파티를 습격했던 정황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고, 검은백조의 유능한 레인저들이라면 최소 두 달 이내에 일말의 흔적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함께한 동료들이 언제 입을 열지 모르는 상황. 그들을 믿지만….
‘아니야.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아무튼 간에 명예추기경, 이기영 그가 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종교재판은 패배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는 뻔할 뻔 자.
교단의 이단심문관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알 사람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성수에 익사한 이토 소우타의 이야기는 늦게 들어온 자신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가 아니었던가.
당시에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였을 뿐이었지만 이 지경이 되자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자신 역시 그런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참혹한 꼴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지.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됐을까.
‘최소한… 최소한의 발버둥이라도 쳐 볼 수 있다면… 마지막 발버둥이라도 쳐 볼 수 있다면….’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스퀴어트 님.”
“…….”
조심스러운 인사. 딸칵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방안이 환해진 탓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렸다.
서서히 눈이 본래의 기능을 되찾으며 시야에 들어온 인형을 좇는다.
‘명예추기경.’
단정한 사제복을 입은 모습.
그날 이후로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얼굴.
“명예추기경님?”
“갑자기 뒤에 님 자가 붙었네요. 조금 더 편하게 해주셔도 괜찮은데… 저번이랑은 사뭇 다르네? 별별 개소리를 다 지껄이더만.”
마치 성자와도 같은 그 모습에 역시나 착각한 것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비릿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확인한 이후에는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명백하게 자신을 비웃는 듯한 얼굴, 조금은 화가 난 듯한 표정은 소름이 돋는다.
정하얀과 선희영에게서 느꼈던 감정과 같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지금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는 이전의 보았던 명예추기경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게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능한가.’
혹시나 명예추기경은 이중인격자 같은 것이 아닐까.
머릿속이 냉수를 맞은 듯 차가워진 것은 당연지사.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으응? 으으으응? 죄송할 필요 없어요. 우리 스퀴어트 님이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대충 느껴지거든요. 우리 하얀이한테서 살아남고 싶어서 저를 도발한 것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인 것도… 전부 다 이해해요. 합법적으로 종교재판을 받기로 한 그 마음도 존중해 드리고 싶고요. 내가 찾아온 건 당신이랑 협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랍니다. 그냥… 그냥 꼬라지 좀 보러 왔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틀렸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어서.”
“네? 그게… 무슨….”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분명히 내가 실패했다고 말했었지. 아마. 그렇죠? 스퀴어트 님.”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기영이 조용히 손거울을 들어 올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한 이후에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성 씨?
-네? 기영 씨.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현성 씨. 사실 제가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뭐?’
-네?
-그러니까. 사실은 제가 아주 아주 나쁜 사람이라면 어땠을 것 같냐고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갑자기 여기서…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왜 여기서….
갑자기 김현성이랑 통화를 하는 거야. 도대체 뭘 보여주고 싶은 거야.
-아니, 만약에. 지금까지 모두를 속이고 있는 거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검붉은 놀이터에 있었을 당시, 자신이 악에 받친 듯 소리 질렀던 말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얀 살인마를 피하기 위해서 명예추기경을 도발하듯이 지껄였던 말 중에… 분명히 명예추기경이 아니라 인간 이기영이 실패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설마….’
믿을 수 없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건가? 진짜 자기를 아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가.’
말이 되는 것 같지 않지만… 그것밖에는….
‘구태여 여기까지 와서… 이기영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가?’
아마도 그게 녀석의 역린일 것이다. 유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반응하는 것을 보면 녀석에게는 이게 트라우마일 것이다.
구태여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와서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고 싶어 하는 거라면 그게 놈의 역린이 맞다.
-…….
-…….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만약에.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
-…….
-괜찮습니다. 아마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요?
-기영 씨는 기영 씨니까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가면을 쓰고 있든지, 벗고 있든지 간에 기영 씨는 기영 씨입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여신의 손거울을 접은 녀석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네가 틀린 것 같은데? 푸흐하핫.”
‘미친… 미친놈.’
“네가 틀렸는데? 응? 누가 실패했어? 누가 실패한 것 같아?”
‘파란 길드마스터는… 거의… 세뇌된 거 아니야?’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게 녀석의 역린이고 트라우마라는 것을, 녀석의 가면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 역시….
‘이길 수 있어.’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역린을 재판장에서 잘 터뜨린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녀석을 도발한 이후, 최소한 대륙법정으로 무대를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선택지는 많다. 너무나 여러 가지라 구태여 한 가지를 고를 수 없을 정도로 빈틈이….
“아. 그리고 네가 미국 가는 날짜 잡혔더라. 오늘 9시.”
“뭐라….”
“당연히 사형이야. 죄목은 그레고리 살인미수혐의. 성물강탈혐의. 악마소환혐의. 수십 가지 더 붙어 있기는 한데… 일일이 열거해 주기도 입 아프고….”
“뭐라고?”
“응. 죄목은 그레고리 살인미수혐의야. 왜 살인미수혐의냐고? 걔 살아 있더라고. 아마 오늘 증인이 될 예정이고….”
“웃… 웃기지 마! 제기랄! 네 마음대로… 그렇게!”
“왜 그레고리를 죽이려고 한 것도 성물을 강탈한 것도 맞잖아.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형감이야.”
“제대로 된 재판을!”
“너무나도 증거가 명백해서 구태여 재판이 필요가 없더라고. 사실 그레고리는 나도 별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난사의 로빈우드인가 뭔가가 그레고리 추적에 큰 도움을 주는 바람에 말이지. 회복하는데 몇 달 잡아야 될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잘된 일이지.”
“뭐… 뭐….”
“남의 인생 평가하기 전에 네 인생이나 제대로 챙기란 이야기야. 남한테 충고하고 가면이니 뭐니 진짜니 뭐니 떠들어 대기 전에 너부터 제대로 하라고. 진짜 널 아끼고 사랑하는 인간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히죽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마치… 마치 악마처럼 보인다. 녀석이 가리킨 화면에는 지금까지 함께한 길드원들과 동료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악마… 악마입니다. 스퀴어트가 먼저…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그레고리를….
절멸의 레이넌.
-저희들은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악마의 힘이 저희의 몸을 조종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난사의 로빈우드.
-그가 베니고어 님의 성물에 팔을 뻗자. 혼탁한 기운이 일어나면서… 마치 베니고어 님의 성스러운 빛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악마의 힘이….
튜토리얼부터 함께한 나의 동료들.
-전부… 전부 다 그자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몇몇의 인연까지.
“웃기지 마! 웃기지 마!!! 제기랄! 이 개자식! 이 사기꾼 자식! 그래! 네… 네가… 넌… 너는….”
“푸흐… 푸흐하하헤하핫! 또 무슨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안 통한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너도 대충 눈치챘잖아. 내가 여기 온 건 너랑 씨름하려고 온 게 아니라 그냥 짜증을 풀려고 왔다는 거… 아! 참고로 쟤네는 20년 형 정도로 마무리 지을 예정이야.”
“이딴 게… 이딴 게!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냐고? 응. 당연히 그렇지. 스퀴어트야. 스퀴어트야. 너를 아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자신만만하게 지껄였던 것과는 다르게 진짜 너의 모습을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
“미친놈! 미친 새끼! 이 또라이 새끼.”
제정신이 아니다. 이 녀석과 엮인 것은 실수… 실수다.
“이제 곧 9시가 다가오나 부다.”
“뭐? 지… 지금….”
“최대한 고통스럽게 해달라고 청탁도 넣어줬으니까.”
“…….”
“힘내요. 스퀴어트 님.”
“…….”
“…….”
“아아아아아악!”
“…….”
“아아아아아으아아아아악! 살려… 살려줘….”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으아아아아아아악!!!!”
*다음 페이지에 김현성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한복 김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