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42화
피크닉 (5)
[제목 : 엘프 남성분과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그리 편치 않네요. (댓글 : 1,271)]
[작성자 : ㅍr랑색이 좋아]
[갑작스레 이런 글 남기게 돼서 죄송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푸념할 곳이 없어 다시 한번 글을 올리네요.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 엘프 남성분에게 고백받았다는 글을 남겼던 사람입니다.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결국 그 고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마음이 없기도 했고… 또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대륙던전화 사건으로 인해 세간이 떠들썩하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 이후로 모든 게 끝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을 뵙는 게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분도 저도, 그렇게 모든 걸 잊고 예전처럼 친구 사이로 돌아간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더군요.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도 그분이 계속해서 자신과 함께하자는 의사를 표현해 오셨습니다. 지속적으로 말입니다. 어쩔 때는 웃으며, 어쩔 때는 조금 진지하게 거절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계속해서….]
[그분을 다시 돌아보게 된 계기는 함께 원정길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원정대를 위해 몬스터를 홀로 막아내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되돌아오셨을 때는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원래 의로운 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병상에 누워계신 모습에 제 마음도 조금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분에게 마음이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때의 감정이 단순한 동정심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저 자신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서로 조금씩 알아가자는 표현을 해오셔서 가끔 만나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마시거나 하고는 있지만 이게 맞는 건지, 이래도 되는 것인지… 너무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그분도 쉽게 고백을 해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 감정이 정리되고 확실해질 때 까지 기다려 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이런 애매한 관계를 유지해도 좋을까요… 죄송하고 미안할 뿐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으신가요?]
[아이디미정 : 얘 또 왔네. 죽지도 않고 또 왔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린델마을주민 : 그만 좀 하세요. 진짜. 이분 예전부터 글 쓰는 거 지켜봤었는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네요. 이딴 식으로 주작 글 올리면서 반응 보는 게 취미인 모양인데. 제발 현생 사세요. 현생.]
[흙수저 : 댓글 많이 달린 거 보고 신날 듯. 이 정도면 어그로 끄는 데 성공한 듯?]
[ㅍr랑색이 좋아 : 저도 차라리 주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지금….]
[아이디미정 : 비추나 드셈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그만 좀 하라고. 진짜. 어디서 이상한 소설 읽다가 여기로 소환된 모양인데 현실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셈. 이제는 여기가 님이 살아야 하는 곳이고. 그렇게 계속 머릿속으로 이상한 상상 하다가는 정신병 걸리기 딱 좋은 듯ㅋㅋㅋㅋㅋ]
[ㅍr랑색이 좋아 : 정말 주작 아닙니다. 진지합니다.]
[나나나나난 : 앗! 저번에 글 올리신 분이었군요!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엘프 남성분과 만나고 있다는 댓글을 남겼었는데… 설마하니 아직까지 그런 애매한 상태로 관계를 유지하고 계셨군요.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중요한 것은 작성자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갑작스레 드리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저희는 그때 이후로 결혼하기로 했어요. 이번에 엘프 더 힐로 이사 가기로 했는데….]
[엘프사랑영원히 : 엘프 더 힐! 환영합니다! 언젠가 단지에서 스치겠네요!]
[나나나나난 : 앗! 지나치면 머리 위로 박수 짝!]
[세계수42 : 오, 나도 이사 갈 때 들떴었는데….]
[나나나나난 : 오늘 여기에서 입주민들 다 보내요. ㅋㅋㅋㅋ]
[ㅍr랑색이 좋아 : 그분도 엘프 더 힐 몇 채를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었는데. 그렇게 유명한 곳이었군요.]
[세계수42 : ?]
[아이디미정 : 다시는 이 사람한테 댓글 들어주지 마셈. 파란색이 어쩌구… 저 사람 이 게시판 대표 빌런이니까. 허언증이 또 도졌나. 새로운 떡밥이 나오니까 엘프 더 힐 몇 채를 가지고 있다고 해버리네. 거기 얼만지 알기는 함? 린델 다음으로 땅값이 비싼 곳이 그쪽이에요. 대륙 권력자들이 별채로 많이 가지고 있는 매물이기도 하고요. 이 사람아.]
[ㅍr랑색이 좋아 : 자꾸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허언증도 아니고… 떡밥에 목숨 거는 것도 아닙니다.]
[천연사러버 : 논란 글로 신고했습니다. ^^;;]
‘얘는 도대체 여기 글은 왜 올리는 거야?’
도움도 안 되는구만.
“오빠. 확인해 봤어요?”
“응. 글이 올라와 있기는 한데. 댓글 주제가 갑자기 바뀌어서… 엘프 더 힐인가 뭔가 거기 이야기밖에 없는데?”
“갑자기 엘프 더 힐 이야기가 왜 나와요? 주제랑 전혀 상관도 없는데.”
“아니, 중간에 물타기 당한 것 같아. 온통 그 이야기밖에 없는데? 웬일로 혜진이 글에 댓글이 많이 달렸나 했네. 얘 그때 이후로 거의 커뮤 내에서 왕따 당하고 있는 것 같던데… 뭐 어찌 됐건 우리 혜지니 흔들 만한 댓글은 없어.”
“근데 혜진 씨가 또 왜 저러지? 저 놈팡이 놈이 뭐 이상한 소리라도 한 거 아니에요?”
그래 가능성은 있어. 또 뭔 말로 쟤를 꼬드긴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 엘프 늙은이가 은근히 속이 검으니까.
누가 불렀는지는 몰라도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만 봐도, 저 검은 속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둘러 손거울을 매만져 봤지만 최근에 올라온 게시글은 그것 하나. 커뮤니티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업무가 바쁘지는 않았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여가 시간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모양이다.
“최근에는 고백하고 있지 않다네요. 습관성 고백증후군이 고쳐지기라도 한 건지… 하는 족족 까였으니까 신중해질 만도 하죠. 아마 결정타를 노릴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예요. 최근 분위기도 좋았던 것 같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함께 보낸 시간이 많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겠죠. 왜. 결정적이었잖아요. 안식처에서의 사건이….”
“…….”
“…….”
“그게 이번이다?”
“이번이 아닐 수가 있나요?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저 오아시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기 아마 커플들한테 인기 많을 거야. 대충 둘러봐도 포인트가 많다니까. 분위기 좋은 곳이 너무 많아 곤란할 지경이라구요.”
“제대로 준비했겠네. 어찌 됐건 간에 사막엘프들이 있는 곳이니까. 엘리오스한테 정보가 갔을 가능성도 있어. 혜진이가 엘리오스한테 관심이 없어도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다 보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일단 막아야 된다는 거죠?”
“…….”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엘프 늙은이는 아니지. 친구가 안타까운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자너.
문제는 이쪽 역시 예정된 스케줄이 있다는 것.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소라는 옆에서 “한번 말씀드려 보세요.”라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혜와 내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얀이랑 같이 시간 보낸 지도 너무 오래됐어.’
특히나 이런 곳에서 데이트한 지도 너무 오래됐지. 한소라가 있으니 괜찮았던 거지. 슬슬 폭발할 시기가 오기는 올 텐데.
아니,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하얀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 조혜진과 엘리오스의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행 첫째 날 하얀이를 내버려 두기에는 아무래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일단 따라붙을게요. 오빠는 하얀 씨랑 같이 놀아야 할 것 같고… 아니, 그게 아니면 더블 데이트는 어때요?”
“그거야 하얀이가….”
좋아할지가 문제지.
첫 휴가에서 맞은 첫 번째 나들이인데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놀고 싶겠어?
“…….”
“…….”
“좋, 좋, 좋아요. 더, 더, 더블 데이트래. 소라야. 더블 데이트.”
‘근데 좋아하네.’
그냥 넌지시 운을 띄웠을 뿐이었다. 좋아할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지도 못했고….
“그래? 정말로 괜찮아?”
“네. 오, 오빠. 더블 데이트 좋아요. 아니, 꼭… 꼭 꼭 하고 싶어요.”
먼저 데이트하자고 말해준 것 때문에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로 더블 데이트가 좋은 건가.
자세히 살펴보니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았다. 다른 커플과 함께 논다는 걸 즐기기보다는 그냥 더블 데이트 그 자체가 하고 싶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다른 커플들이 하는 건 전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오빠랑 같이 하고 싶은 일 목록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고, 지구에 있었을 때 평범한 커플들이 하던 루틴 중 일부를 따오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만….
‘괜찮네.’
“그럼… 정하얀 님. 저는 잠깐 볼일 좀 보고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시면 꼭 연락해 주시고요… 필요한 물건은 정하얀 님 가방 안에 넣어놨어요. 여기 화장품이랑… 예비 골드도 조금 넣어놨고….”
“으… 응. 소, 소라는 어디 있을 건데?”
“네?”
“어디에 있을 건데?”
“근처에 있을게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러니까 볼일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시면 돼요.”
그제야 함박웃음을 짓는 정하얀의 얼굴이 보인다. 헤벌쭉 찢어진 입가.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 갈아입은 옷을 연신 매만지고 있었고 손으로 볼을 부여잡거나 콩콩 바닥을 뛰고 있었다.
반면 오랜만에 혼자 있을 기회를 놓친 한소라는 반쯤 체념하는 쪽. 하지만 그리 나빠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하얀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원하고 있는 모양. 스톡홀름 신드롬은 내가 아니라 쟤가 걸린 것 같은데….
“그럼 이제 갈까?”
“네! 오, 오빠….”
그렇게 상황실로 직행한 이지혜, 한소라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실 오히려 더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처음이자너.’
커다란 도시를 전부 둘러보기에는 너무 넓었으니 어디에 뭐가 있고, 무엇을 하기에 좋은지 알 수 있을 리 만무.
엘리오스와 조혜진을 같이 따라다닌다면 사막 엘프를 통해 정보를 전달받은 엘리오스가 기획한 코스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소리가 된다.
‘모르긴 몰라도 좋아할 거야.’
로맨틱의 화신이라잖아. 우리 엘리오스 님께서.
“오늘 오… 오빠 너무 섹시해요.”
“그래? 평소랑 다른 옷을 입어서 그런가. 몸이 편하기는 한데… 좀 적응되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 아. 하얀이도 너무 예뻐.”
“정, 정말요?”
“그럼. 뭘 입어도 항상 예쁜데. 이쪽 전통 의상도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네.”
“저, 저도 그 사막 엘프들처럼 춤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매혹의 춤. 또 너야?’
길바닥 한가운데서 펼쳐진 유혹의 몸짓. 저건 누가 가르쳐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이 나오기야 했다.
정하얀도 기분이 좋은 듯 실실거리면서 깡총깡총 발걸음을 크게 크게 옮기는 중.
목적지는 간단히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브런치 카페였다. 린델에 있을 때 질리도록 가 본 레스토랑보다는 그래도 새로운 걸 경험하고 싶으니까.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미리 자리를 잡고 있는 두 사람이 시야에 비쳤다.
“부길드마스터?”
“어? 혜진 씨?”
“여… 여기는 어떻게….”
“하얀이랑 같이 식사하러 왔죠. 아! 엘리오스 님도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이것도 인연인데 오늘 하루 같이 돌아다니는 게 어떨까요?”
“부길드마스터. 지… 지금 무슨.”
“더, 더, 더블 데이트예요. 더블데이트. 조혜진 님. 더블 데이트 해요.”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버리는 정하얀.
그리고.
“어머. 여기 다들 모여 있었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커플 더 껴서 노는 게 어때요? 혜진 씨.”
“누구… 어? 지혜 씨?”
한소라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이지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이잖아요. 그죠?”
“…….”
“…….”
‘누나는… 또 왜 왔어. 멀리서 지켜본다며.’
“이렇게 멀리까지 여행도 왔잖아요. 즐거운 날인데… 다 같이 놀아요.”
“…….”
도대체.
한소라는 왜 데리고 왔어.
“어?”
하연수는 얻다가 두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