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44화
피크닉 (7)
바보가 아니라면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진중한 얼굴 대신 근심과 걱정이 드리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어째서 내가 더블 데이트를 빌미로 나타났는지, 갑작스레 등장한 이지혜는 왜 저기서 눈물을 쏟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
조혜진의 친구랍시고 나타난 놈들이 자신을 방해하려는 걸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 급발진했어.’
지혜 누나 온도가 너무 뜨겁기는 했다구. 그러니까 얘가 눈치 안 채고 배겨?
레스토랑에서 벗어나 라베하 투어 마차를 타고 도시 안을 거닐고 있는 상황에서도 조혜진은 이지혜를 위로해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행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정하얀과는 다르게 말이다.
“라베하!!”
“라베하!!! 오른쪽을 보세요! 여러분들! 지금 보고 계시는 곳이 라베스의 자랑 명예추기경님의 조각상이랍니다! 이미 도착했을 때 한 번 보셨겠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얼마나 섬세하게 만들어졌는지 눈에 보이시죠?”
“…….”
“희생과 부활의 신전에서 보유하고 있는 생명을 쥐어 짜내 만들어낸 조각상에 비할 수는 없지만 드워프 장인분들께서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들어 주셨어요! 이로써 라베하가 세 번째로 명예추기경님의 조각상을 보유하게 되었답니다!”
“나, 나머지 두 개는 어디에 있나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하나는 라이오스! 나머지 하나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린델의 신전에 있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도시에 조각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증된 세 번째 조각상은 라베하에 있다는 것! 자! 라베하 신전은 모두 잘 보셨죠?”
“네!”
“신전은 어떠셨나요?”
“예, 예, 예뻤어요! 성스럽고… 특히 오빠 조, 조각상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아쉬워하실 분들을 위한 기념품은 무료로 챙겨 드릴게요! 명예추기경님의 목각상이랍니다!”
“정, 정말요?”
“네! 물론이죠! 여러분들의 기쁨이 가이드 메실리의 기쁨이랍니다! 자 그럼! 다음 장소로 가시죠! 다음은 원래부터 라베스에서 무척 유명했던 라베스 사막 바위입니다! 예로부터 저희 유랑민족들이 쉼터로 자주 사용하던 곳이었는데요, 라베스 사막의 영웅 히즈칸 님께서 바위에 터를 잡은 몬스터를 열!파!참!으로 물리치신 것으로 유명한 장소랍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확실히 투어버스가 정석이기는 해.’
일단 전체적으로 찍어볼 수 있잖아.
신전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기는 했다. 베니고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모실 수 있게 만들어진 만큼 부지도 크고 공간도 적절하게 분할되어 있었다.
물론 유랑민족이 모시는 토속신의 자리 또한 마련되어 있었는데, 진짜 볼거리는 여기에 있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느낌이고 새로운 풍경이니까.’
다채로운 색감과 문양으로 깔린 내부, 사막의 양식이 의외로 화려한 만큼 라베스 사막 바위로 향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볼거리들이 많다. 아니, 일단 마차부터….
‘느낌 있자너.’
라베스 사막의 명물인 커다란 도마뱀 바실. 말이나 그리폰이 끄는 마차가 아니라 도마뱀이 끄는 마차로 사막을 거닐 수 있다는 것 역시 특별한 경험이라 할 만하리라.
“우와! 빠르다! 소라야. 오, 오, 오빠. 진짜 빨라요.”
“네. 도마뱀도 귀엽게 생겼고….”
“라베스 사막의 바실은 예로부터 저희 유랑민족들의 이동수단으로 자주 활용되었답니다! 바실이 이렇게 빠르게 사막을 달릴 수 있는 것은 발바닥에 있는 특수한 기관 때문인데요. 모래 위에서….”
“네?”
“더 자세한 정보가 궁금하시다면 라베스 사막 몬스터 박물관에 가 보시는 걸 추천드리고 싶네요. 입장료가 단돈 1골드! 멸종한 몬스터부터, 현재 라베스 사막의 생태계를 유지한 동식물들의 표본을 한꺼번에 볼 수 있거든요. 라베스 사막의 지배자. 그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벌벌 떨었던 데저트 웜의 원형도 그대로 복원되어 있어요! 길이가 무려! 4킬로미터!”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4킬로미터!!!”
‘저 가이드 잘하네.’
그래서 더 가슴 아파.
가이드 메실리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정확히는 반응이 좋은 정하얀과 한소라가 있는 쪽을 보며 열변을 토하고 있다.
한쪽으로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 이지혜와 조혜진 엘리오스가 앉아 있는 좌석이었다.
“흐윽… 흐으윽….”
“제가 너무 심했습니다. 지혜 씨. 그러니 울지 마세요.”
“아니요. 이제… 괜찮은데… 저는 괜찮아요. 혜진 씨. 제가 너무…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 같아서… 저… 제가 계속 이대로 있기에도… 너무 죄송하고….”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지혜 씨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서… 화낸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저… 저 이만 가 볼게요.”
‘달리는 마차 안에서? 갑자기 가 본다고?’
“제가 너무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미 충분히 방해하고 있는데….’
“저… 혜진 씨 얼굴 보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하나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자너.’
데이트고 나발이고 완전히 개 박살 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상황.
엘리오스가 불청객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말 그대로 소외되고 있는 쪽은 엘리오스 쪽이다.
조혜진은 감정적으로 격해진 이지혜를 달래주기 여념이 없었고 이지혜와 함께 등장한 한소라는 정하얀과 여행을 즐겁게 즐기고 있었다.
언제 말을 꺼내야 하는지 도대체 자신이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 알 여부가 없는 불쌍한 엘프는 조용히 자리 한쪽을 차지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눈 안에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보이지도 않는 것일까. 흔들리는 동공은 풍경이 아닌 조혜진과 이지혜를 좇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라베스 바위입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실까요?”
“네! 네!”
“저… 지혜 씨….”
“저는 여기서… 돌아가 볼게요.”
“아니요. 지혜 씨. 잠깐 이야기 좀….”
“사막 바위에는 유랑민족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른 유랑종족들도 모두 함께 사용하는 곳이니 앞서 알려드린 수칙을 잊지 말아주세요!”
“네! 오, 오빠 빨리 내려요!”
“응.”
“소, 소, 소라야 빨리와. 저, 저기 진짜 사막 엘프들이에요. 진짜 사막 엘프들도 있어요!”
‘가이드들도 진짜 사막 엘프야.’
하지만 유랑종족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기는 하니까.
그에 비하면 사막 바위 아래 몰려 있는 유랑종족들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복식도 그렇고, 행태도 그렇다.
사막의 열을 식혀주는 바위 아래에서 거대한 천막을 치고 둘러앉은 유랑종족들. 리자드맨, 사막 엘프 외에도 다른 소수종족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새로운 일행이 다가와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듯한 느낌.
아마 그게 이곳의 법칙일 것이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 쉼터.
“명예추기경님을 뵙습니다.”
“아. 저를 아시나 보군요.”
“대륙을 거니는 입장에서 어떻게 명예추기경님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족장님.”
“환대랄 것도 없습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곳이니… 이 황폐한 사막을 구원해 주셨으니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쉼터로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여, 여기 앉으면 되나요? 족장님?”
새로운 경험이고 새로운 사람이랑 만나는 거니까. 이것도 여행의 묘미 아니겠냐구.
때마침 이야기할 것도 많다. 늙은 리자드맨은 지혜롭다는 속설도 있으니 나름 대화도 잘 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화가 길어질 때 즈음에 데이트를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는 이지혜의 작전이 먹혔는지 둘의 감정도 정상 궤도로 올라온 상황.
엘리오스는 둘째 치고라도 대화 자체가 꽤 흥미로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유랑생활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유랑종족들이 많았다느니 때마침 라베하가 생겨나서 많은 유랑종족들이 이주할 수 있었다느니, 자신을 비롯한 이들은 이런 생활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약간 의아했던 것은 이게 엘리오스의 데이트 코스였다는 것.
물론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랑종족들과 함께 숨 쉬고 호흡하는 것은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무희들과 함께 춤을 추고, 과일주를 마시고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리자드맨들의 꼬리 싸움을 구경하고, 사막 바위를 떠나는 집단들, 다시 라베스 바위로 합류하는 집단들과 인사를 하고, 서로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고.
엄밀히 말해 내 타입은 아니었지만 휴식이고, 휴가고, 여행이라고 생각하니 편하니 즐겁기는 했다.
의외로 이들이 쓰는 의자가 푹신푹신하다는 것도, 얘네들 요깃거리가 맛있다는 것도 알게 됐으니까.
지혜 누나도 조금 의아하기는 했었나 보다. 물론 조혜진은 즐거워 보이기는 했지만….
‘결정타를 먹이기에는 부족해.’
이런 데서 생겨나는 건 우정이지 사랑이 아니자너.
일단 캐릭터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고, 같이 호흡하는 유랑종족들이 많으니까. 정작 두 커플이 호흡할 시간이 없자너.
검은 속의 엘리오스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종족 간의 벽을 허문 남녀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
“…….”
유랑종족들 사이에 함께하고 있는, 심지어 리자드맨과 함께 있는 인간 남성도 시야에 비친다.
“명예추기경님이로군요.”
“반갑습니다. 한데….”
“하하하. 네. 어쩌다 보니 리자드맨 여성분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모험가로서 대륙에 소환되었습니다만… 나름대로 좋은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운 나쁘게 라베스 사막 보물 지도에 낚여서 원정에 참여해 거의 죽기 직전에 리자드맨 부족에게 발견되었지 뭡니까.”
“…….”
“그 이후에는 어찌어찌하다가 결국 짝과 함께하기로 해 함께 생활하는 중입니다. 하하하하… 이거 이래저래 운도 좋군요. 명예추기경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다니….”
“…….”
“네. 그런 질문들 많이 받습니다. 종족 간의 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생활, 문화, 모든 것이 다릅니다. 다른 국적의 이성을 만나도 차이점이 많은데. 종족이 다르면 오죽하겠습니까. 힘들긴 합니다만 이마저도 결국 서로 이해하게 되더군요. 아마 저 같은 경우에는 이게 체질이었나 봅니다.”
“…….”
“몇몇 소수 종족들은 타 종족과의 만남이 금지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유랑종족들의 경우에는 저와 같은 케이스를 쉽게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직접 유랑생활을 하는 인간은 특이하지만요.”
“그렇군요.”
“저희 부족에는 저 말고도 다른 종족들이 많습니다. 아마 다른 부족 역시 상황은 비슷할 겁니다. 아마 유랑종족들에게서 떠도는 말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서로 이해하고 돕고 사랑하라. 사막의 토속 신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
“아. 아깝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솔직히 이전에 했던 생활들이 그립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그런 것 따위는 정말 사소한 문제입니다.”
뭐 이런 환경에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한 달도 안 돼서 죄다 미국 갈 테니까.
환경이 척박한 만큼 저런 말을 해줄 만도 하지. 아마 그런 의미에서 유행처럼 번진 격언일 것이다.
근데….
‘저 표정 보면 노린 건 아닌 것 같은네.’
엘리오스 역시 조금은 감명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모닥불 하나 피워 놓은 이후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어린 날 캠프파이어 감성이라도 되찾은 것일까.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정확히는….
6시간 30분 만에 녀석은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엘리오스 님?”
“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말입니다.”
단순히 말뿐이 아닌,
“누군가를 에베리아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
“낯선 곳에서… 그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함께 공유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언가 진심을 담은 듯한 표정이었다.
‘진심 담지 마.’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혜진 너 부끄러워하지 마.’
네 이야기라고 확정 짓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