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45화
피크닉 (8)
이제 막 해가 저물고 있는 시점. 타오르는 모닥불과 같이 불이 꺼진 감성도 함께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밤이었다.
조혜진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모닥불 탓일까, 아니면 노을 진 풍경 때문일까.
조금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은 평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그게 조혜진이 저 놈팡이에게 넘어갔다는 증거는 아닐 것이다. 혜진이가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면전에서 대놓고 저런 말을 듣고 부끄럽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특히나 녀석의 허우대가 멀쩡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 악마의 속삭임이 더욱 달콤하게 들려올 가능성이 높다.
“저….”
타닥타닥거리는 소리마저 로맨틱한 음악으로 들려왔던 것일까. 그녀는 잠깐 동안 할 말을 잃은 듯이 붉은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매하게 시선을 고정시킨 것만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엘리오스는 담담히 다음 말을 꺼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것은 미리 준비된 대사가 아닌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대사. 녀석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진중했고, 영혼을 담듯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싣는 듯했다.
“함께할 수 있다면 장소가 어디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
“이해시키기보다는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김칫국 오지게 마시네. 진짜.’
“제 선택으로 인해 제가 모든 걸 잃어버릴지언정, 이전보다 더욱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종족 연합이고 엘프 왕국이고 전부 다 때려치우고 린델에서 살림 차리겠다고?’
혜진이가 그런 걸 좋아할 것 같아? 저 책임감 넘치는 혜지니가?
습관성 고백증후군의 재발은 아닌 것 같기는 하다. 단순히 고백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자신의 속에 있는 마음을 담담히 풀어내는 시간, 그간 너무나 자기 입장만 생각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마 조혜진의 입장에서도 엘리오스의 만남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을 것이다.
‘에베리아 왕국의 안주인이 되는 거자너.’
얘는 얘 나름대로 커리어도 있고, 파란 길드라는 집단 내에서 위치와 비전이 있는데, 갑자기 에베리아 왕국으로 가야 한다니 얼마나 황당하겠어.
그것도 몇백 년씩 살아가는 타 종족들이랑 같이 살아야 한다는데.
엘리오스와의 연애는 기본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도 많지.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만남을 가지다 보면 대륙의 이목도 집중이 될 테고… 자연스럽게 린델에서도 멀어지게 될 거야.
단언하건대 둘은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 그 정도의 이야기를 나눌 단계가 아니기는 했지만 정말로 만나게 되면 어떤 문제들이 들이닥칠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조혜진이 얼마나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만 같은 엘리오스의 진솔한 마음은 어쩌면 혜지니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기여하고 있었다.
“두 분께서 저를 안 좋게 생각하시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
“갑작스레 혜진 씨 앞에 나타나서 주변 상황이나 여건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혜진 씨를 아끼는 친구로서 얼마나 많은 것을 걱정하고 계셨을지…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솔직하게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혜진 씨에게 먼저 말입니다. 제가… 제가 너무 배려심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야.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네가 싫은 게 아니야. 그냥 너 자체가 싫은 거야.’
그냥 엘리오스라는 생명체 자체가 싫은 거라고.
딱히 정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냥 싫자너.’
기생오라비 같은 생김새도, 나이 많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혜지니를 뺏어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인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언제 어디서나 혜진이를 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걸 보고 싶은데. 솔직히 네가 그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왕국이고 이종족 연합이고 다 때려치운다고 하지만 그게 진짜일지 어떻게 알아.
사귈 때 초반이야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움직이지. 남녀가 만나다 보면 관계가 역전되는 것도 흔한 이야긴데, 못 이기는 척 엘프 왕국으로 되돌아가면 어쩌냐고. 혜지니 눈에 눈물 차오른다.
“그저 제 가슴 안에 있는 답답함을 해소시키는 것에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답답함이요?’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표현하지 않으면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제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상사병이야? 뭐야. 너 오바하는 거 아니야?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야?’
“그게 부담이 되는 줄 알면서도… 그게… 그게… 혜진 씨에게 얼마나 힘든 일일 줄 알고 있으면서도… 제 마음속에 있는 답답함을 해소시키는 게 먼저였었습니다. 솔직히… 솔직히 혜진 씨의 상황을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그만큼… 그만큼 혜진 씨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얘 진짜인가 봐….’
내가 다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유랑종족들마저 시선을 돌렸을까.
사랑 앞에서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 엘리오스.
갤러리들이나 함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일방통행 직진형 고백.
정하얀이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지만 한소라의 얼굴은 명백히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일반적인 감성을 지닌 사람의 반응일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ㄱr끔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정도로 가슴 따뜻해지는 감성.
문제는 ㅍr란색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녀석의 진솔한 마음에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런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의 긍지를 더럽히지 마 같은 대사를 친 전적도 있으니 진심 어린 녀석의 발언을 좋게 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오늘… 오늘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만….”
“…….”
‘이미 표현하고 있잖아.’
“제가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혜진 씨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한 것….”
‘알긴 아네.’
“알긴 아네요.”
‘누나. 그냥 그걸 말해버리면 어떻게 해.’
“지혜 씨. 그만하세요.”
“…….”
“…….”
“오늘은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으면 좋겠군요.”
“엘… 엘리오스 님, 잠깐!”
“다음에 만날 때는… 꼭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입니다.”
조혜진이 잠깐 녀석을 부르기는 했지만 녀석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색한 상황에 숨을 참고 있었던 유랑종족들 역시 드디어 참아왔던 숨을 내쉬는 중.
조혜진도 멍하니 엘리오스가 사라진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분….”
“…….”
“저를 걱정해 주시고 아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너무 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나는 죄 없어. 솔직히 누나가 다 했어.’
“저는 왜요?”
“부길드마스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더블… 아니….”
“…….”
“저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누군가 제 연애에 대해 이래라저래라해야 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단 말입니다.”
“저는… 혜… 혜진 씨가 걱정돼서….”
“저도 제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습니다. 지혜 씨. 엘리오스 님은 간혹 저도 당황시킬 정도로 말을 이상하게 하시기는 하지만… 나쁜 분은 아닙니다. 저도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으니… 적당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흐윽….”
“이번만큼은 눈물을 흘리셔도… 애초에 왜 제 연애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제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결코 첫 연애라서 신중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 뭐래.’
“이미 말씀드렸었지만 저도 연애 경험이 꽤 많습니다. 그저… 지금은 이런 인스턴트식 연애에 질려서… 조금 더 신중한 만남을 취하고 싶을 뿐이란 말입니다. 짧은 만남이 아닌 믿을 수 있는 분과 좋은 만남을 유지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이나 제 마음을 되짚어 보면서 고민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오늘은 데이트 같은 것도… 아니었고….”
갑작스레 펼쳐진 안방극장에 궁금증을 느낀 것일까. 조용히 지켜보던 한소라가 입을 열었다.
“상대는 데이트… 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조혜진 님. 그, 그럼 조혜진 님 마음은 어떤데요? 지금이요.”
“…….”
“엘리오스 님에게 마음이 있으세요?”
“…….”
“…….”
“…….”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좋아.’
“제가 어떤 마음인 건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엘리오스 님은 나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무척 아까운 분이시고… 강직하고… 여린 분이십니다. 엄밀히 말하면… 잘… 잘생기기도 하셨고… 물론 외모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여러 가지로 저와 어울리지 않은 분이란 겁니다. 제게 호의를 보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솔직히….”
“…….”
“솔직히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어떨 때는 그분이 좋기도 하지만… 아니, 솔직히 그분과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지만 이런 애매한 마음으로 엘리오스 님의 마음에 응하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서….”
“…….”
“엘리오스 님께서는 저에 대해 무척 과대평가하고 계시고 있지만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엘리오스 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거….”
‘아니야. 너 엘리오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맞아.’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평범하게 생각했을 거야.
뭐 만나보고 아니면 말고, 조금 안 맞는다 싶으면 쳐내고… 아니면 쟤 하나 어장으로 잡아 놓은 이후에 질질 끌면서 다른 사람이랑 저울질하면서… 적당히, 적당히 즐겼을 거라고.
새로운 사람이랑 만나는 건 재미있잖아. 자극이 되기도 하고.
보통 사람은 걔 마음에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고 고민하면서 몇 날 며칠 고민 안 해. 그냥 즐겨보고 웃어넘기지.
아마 엘리오스가 조혜진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동생인 엘레나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생명체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조혜진의 영혼이 얼마나 순수한지 알 수 있었겠지.
“아무튼… 아무튼 간에… 이건 여러분들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입니다. 관심과 걱정은… 감사하지만… 이제 그만…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지혜 씨나 부길드마스터와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릴 것 같으니 이제 이 문제는 덮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문제입니다. 그러니… 끼어들지 말아주십시오.”
괜스레 숙연해진 장내.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가 좀 강경하네요. 오빠.]
[나도 그렇게 느껴지네. 누나. 솔직히 우리가 너무 신경 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죠? 엄밀히 말하면 혜진이 개인사인데… 너무 참견하는 것도 안 좋잖아요. 우리가 그동안 얘를 너무 어린애로만 생각했나 봐. 나름대로 생각도 있고… 알아서 잘하겠죠. 엘리오스 그놈도 오늘 나름 진솔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냥 지켜봐요. 혜진이가 어련히 잘하겠어요?]
[응. 그냥 지켜보자.]
[마지막 테스트 하나만 더 해보고요. 오빠.]
[마지막 테스트 하나만 더 해보고. 누나.]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은 엘프 순정남 엘리오스.
녀석이 가지고 있는 절개가 어느 정도 인지, 확인 작업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