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46화
피크닉 (9)
“후우….”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엘리오스 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민이라도 있으신 것처럼… 일단… 한 잔 더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장을 입은 리자드맨이 익숙한 몸짓으로 잔을 넘긴 이후, 벽에 진열되어 있는 와인 잔을 손수건으로 닦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유랑종족이었던 사막 리자드맨이 이런 종류의 바의 마스터라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숙련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상념이 많아지는군.’
그 말 그대로였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너무 많아져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여러 풍경들을 지켜보게 된다.
아마 내가 그동안 세상을 좁게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서일지도.
자기중심적이었다고 표현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엘레나에게도 항상 듣던 소리였다.
오라버니는 항상 세상을 너무나도 좁게 보신다고. 조금 더 넓게 보셔야 한다고.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 한다고. 에베리아는 섬이 아니라고… 이종족 연합에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실제로도 자신은 보수파였다. 언제나 좁은 시야로만 넓은 대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맞는 줄로만, 그게 맞는 길인 것처럼 판단하고 있었다.
하이엘프인 엘레나가 왕국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녀가 인간의 집단에 가입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녀가 인간들의 도시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세계수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역시 외부인들을 믿지 못했으며 대륙에 다가온 커다란 변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론 내·외부의 압력과 필요성에 의해, 엘레나의 설득에 이종족의 문을 여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만약 자신 혼자 연합을 이끌었더라면 이종족 연합은… 어쩌면 대륙에 녹아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엘프 왕국은 문을 굳게 닫았을 것이고, 자유도시 린델에 이 종족들이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는 모습도 볼 수 없었겠지.
이종족 노예들의 어두운 이면을 끝내 밝히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을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이종족 연합에서도 특별한 지원 방법을 찾기 어려웠던 이종족들에게 이런 쉼터를 선물해 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술 작품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도시. 라베하.
사막 엘프와 리자드맨들을 그들의 생활양식과 전통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듯한 예술의 도시.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존중한 것이 느껴지는 작품.
라베스 사막의 안정화, 커다란 오아시스는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축복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엘리오스 님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네?”
“이 도시 말입니다. 이종족 연합의 대표이신 엘리오스 님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이런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저희들에게는 축복 같은 장소라고 할 수 있으니….”
“그건… 제 공이 아닙니다.”
“어떻게 엘리오스 님의 공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 엘레나 님께서도 엘리오스 님께서도 저희 이종족들을 위해 얼마나 많이 힘써주고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교국과의 협정 때도….”
“그 결단은 제가 내린 것이 아닙니다. 마스터.”
“…….”
“물론 협정을 체결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반대표를 던지던 입장이었으니까요. 지금에서야 생각하면 참 멍청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인간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자신들밖에 모르고… 이종족들보다 자신들이 더욱 우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만….”
“지금은 어떠십니까.”
“다른 종류의 인간들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들보다 더 고결한 영혼을 가진 인간들이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다른 말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질문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보수파로서 인간을 항상 경계하던 자신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
‘조혜진.’
강하고 우직하고 선한 인간, 고결한 영혼을 지닌 사람. 커다란 세계수처럼 절대로 꺾이지 않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영혼.
인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인간도 있구나 같은 생각이 전부였지만, 그녀의 삶을,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그녀가 주변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보고서는 마음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조혜진이라는 인간은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자신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커져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을 정도로 그녀가 자리 잡았다.
그녀를 생각하지 않는 하루가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가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인간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 역시 어쩌면 조혜진, 그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죠. 엘리오스 님. 저희 이종족들 역시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그 특성이 조금 더 다양한 것 같습니다. 사막 엘프들도 저희 리자드맨들도 인간이라면 이를 갈았었는데… 역사에 새겨진 그들과 지금의 그들이 정말로 같은 종족인지 의심이 다 들지 뭡니까.”
“…….”
“그래서 요즘에는… 그들을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사실 공화국에서 일할 때부터 생긴 습관이지만 말입니다. 요즘 들어서는 더… 심해진 것 같더군요.”
“공화국에 계셨군요.”
“네. 리자드맨치고는 흔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아무래도 엘프들보다는 리자드맨들을 불편하게 느끼는 게 사실이니까요. 뒷골목에서 작은 바를 운영했습니다만 아주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때부터… 인간들을 지켜보는 것이 취미가 된 것 같습니다.”
“…….”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으니까.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이종족이라면 누구든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마주한 인간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지켜보거나… 마주한 인간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버릇.
물론 저 리자드맨 마스터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순수한 의미로써 인간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다는 이야기겠지.
아니나 다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잔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마스터가 눈에 띄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자 구석진 자리에서 마구잡이로 술을 들이켜고 있는 붉은용병의 단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수한 자들이다.’
“거. 즐겁구만.”
“이런 좋은 날에 노래가 빠지면 쓰나!”
“내가 이야기했었나? 이번 라베스 사막 원정 때 말이야.”
“여기 술 좀 더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주인장.”
‘정말로 순수한 자들이다.’
강함에 대한 순수한 동경. 싸우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
자칫 잘못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쉬운 이들이었지만 저들은 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그린스킨이라는 자들처럼 순수하게 투쟁을 즐기는 이들이다.
또 근처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마스터. 여기 한 잔 더 줘요. 오늘은 술이 쓰네.”
‘파란의 김예리?’
“이게 인생인가 봐요?”
‘…….’
“후우… 잔돈은 넣어둬요. 마스터. 팁이니까.”
“저희는 팁을 받지 않….”
“아무 말 하지 말고 넣어둬요. 좋은 술을 마시게 해준 답례이니까. 후훗.”
가끔 잔혹한 영혼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 잔혹함은 성정에서 드러나는 잔혹함이 아니다.
그녀는 아픔이 많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아픔과 함께 잔혹함 역시 씻겨 내려가고 있다.
맑고 티 없는 영혼이 느껴진다. 그녀는 술이 쓰다는 말과 함께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디아루리아야. 디아루리아. 우리 아빠가 누군지 몰라? 막스야. 너도 한마디 해.”
“여, 여기는 어른들만 들어갈 수 있어요. 누나.”
“누님.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이나 어머님들이 여기 왔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케루빔. 너. 누나가 말하는데 어딜… 술을 마시겠다는 게 아니라 구경을 하겠다는 거야. 여기에서 아빠 냄새가… 났었는데… 너희들 아빠 보고 싶지 않아? 여기에 있었다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린아이들.
‘디아루리아 님?’
그리고….
‘막스와 아기 천사들.’
진땀을 뻘뻘 흘리는 종업원과 떼를 쓰듯 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는 아이들이 몰려 있는 모습은 이질적이다.
물론 그 이질적인 모습이 사라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디아루리아 님!”
익숙한 인형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디아루기아 님이 찾으세요. 빨리 되돌아가셔야죠. 막스. 그리고 케루, 쓰로, 도미, 세라. 너희들도 얼른 돌아가야지. 여기는 들어오는 곳이 아니에요! 버릇없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칫….”
“얼른!”
“도망가 얘들아! 이따 흩어져서 그곳에서 만나!”
“언니 하지만! 엘레나 님이!”
“누님!”
“도망가! 이건 명령이야! 도망가! 이건 명령이야!”
순식간에 흩어지며 문을 빠져나간 아이들, 빈 공간에 홀로 남아 있는 것은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봐왔던 얼굴이었다.
“엘레나?”
“오… 라버님?”
“…….”
“이곳은 어쩐 일이….”
막 인사를 하려고 했던 바로 그때였다.
“아….”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 그녀의 몸에 서서히 빛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감싸고 머리 색과 눈이 바뀌기 시작한다.
공중으로 몸이 떠오름과 동시에 사방에서 환한 빛이 그녀의 주변을 돌며 별무리를 만든다.
‘엘레나?’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저 증상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엘룬… 엘룬 님께서….’
황급히 무릎을 꿇은 채 신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순식간에 엘레나의 몸을 빌린 엘룬은 조용하고 신성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조용하고 따뜻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의 아들아.]
“엘룬이시여….”
[나의 아들아….]
“…….”
[너의 짝이 나타나리라.]
“네?”
[네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리라. 네가 평생을 사랑하고 잊지 못할 너의 짝이 나타나리라.]
“…….”
[네 앞에 너의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리라. 그 아이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거라. 대륙에 평화와 사랑을 불러올 그 아이를 아껴주거라. 너에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줄 그 아이를 위해 살아가거라. 그리하지 않으면… 그리하지 않으면… 대륙에 파멸이 찾아올 것이니….]
“엘룬….”
[대륙에… 파멸이… 찾아올 것이니… 진정한 의미로서의 대륙의 파멸이… 찾아올… 것이니.]
순식간에 사그라진 빛. 허물어지는 엘레나를 두 손으로 받은 뒤에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어머나. 괜찮으세요?”
고혹적인 미소를 가지고 있는 한 여인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제가… 제가 도와드릴까요? 이를 어째….”
“…….”
“아… 저는 이기연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엘리오스 님.”
“제 이름은 어떻게….”
“대륙에서 엘리오스 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아무튼… 엘레나 님이 쉴 곳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마치 심장이 멎을 것처럼 아름답고 치명적인 영혼을 말이다.
“하으읏… 뭐 하세요. 좀… 도와주시지 않구… 엘레나 님 좀 옮겨주시겠어요?”
“…….”
무척이나… 아름답고… 순수하며… 치명적인… 영혼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