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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48화 (1,04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48화

피크닉 (11)

안 쫓아가고 뭐 해?

“저….”

너 이 새끼 안 쫓아가고 뭐 하냐고.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엘리오스 님.”

당장 쫓아가야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새끼. 어떻게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자너.’

이 시대 순정남이라는 칭호도 아까운 상황이었다.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여기서 뭐 어쩌자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웃음기가 빠진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이너스 5점짜리예요. 쟤는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얘가 영 패기가 없어요.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건지 제가 맞혀볼까요? 대륙의 멸망 떡밥도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 그것 때문에 쫓아가지 못하는 게 아닐걸요. 엄밀히 말해서 오늘 기연이랑 헤어진다고 해서 다신 못 보는 거 아니잖아요. 이미 신상도 전부 알고 있는 마당에. 내일이라도 찾아올 수 있는 거잖아.]

아암. 그렇지. 그렇지.

[저거 본인 입으로 데이트라고 발언해서 그런 거예요. 마지못해 인정하기는 했지만 지 입으로 말했으니… 지금 여기서 자리를 비운다면 이기연한테 실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해. 애초에 융통성도 없고 앞뒤 꽉 막힌 성격이니까.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은 져야 한다 이거죠. 딱 그려지죠?]

그래. 내가 봐도 그런 것 같기는 해. 아니, 누가 봐도 그럴 거야.

처음부터 그런 자리가 아니라 간단히 이야기하는 자리였다면 잠깐 실례한다고 말한 다음에 자리를 빠져나가도 되지만 이미 지 입으로 이거 데이트라고 못 박았잖아. 그러니까 매너를 지켜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걸 거야.

본래 엘프들은 고지식한 경향이 있지만 녀석의 경우에는 그게 조금 더 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종족 연합 내에서도 보수파를 자처할 만큼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성향이 이런 부분에서도 두드러진다.

물론 녀석이 마음 편하게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보기에도 당황하고 있는 듯한 얼굴, 당장에라도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데이트 상대에게 결례를 범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혜진을 따라가는 것이 맞을지, 아니면 이 오해를 나중에 푸는 것이 맞을지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늦었겠다.’

그리고 이미 실례라면 이미 범하고 있자너.

“당신 참 별로네요.”

“…….”

“데이트 도중에 다른 사람 생각하는 거, 저한테 무례한 것 아닌가요?”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대화 도중에 갑자기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보질 않나. 당장에라도 나가고 싶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 눈치 보고. 대충 봐도 답이 나오잖아요. 솔직히 반 정도는 때려 맞혀본 거지만 정말이라고 하시니 더 실망스럽네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만 일어나요.”

“네?”

“이만 일어나자고요. 엘리오스 님도 저랑 같이 있기 싫은 것 같고. 저도 엘리오스 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에는 조금 불편하니까.”

“…….”

“당연하지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오늘 일에 감사하실 필요도 없고요. 정 신경이 쓰이고 빚을 두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골드로 보내주시겠어요? 생각해 보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네. 이게 제일 깔끔하겠네.”

“…….”

“이종족 연합의 수장이 아끼는 여동생을 도와줬으니 100골드 정도면 수지가 맞는 장사려나? 굳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되고… 보상은 우편이나 다른 사람을 시켜서 보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당연지사. 매우 화가 났다는 스탠드를 취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멸하는 표정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슬픔이다. 숨기고 싶지만 숨길 수 없는 슬픔, 누군가에게 배신당해 상처 입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슬픔이었다.

최대한 숨기고 싶지만 막으려고 해도 도무지 막아지지 않는 비련의 여주인공 분위기.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

“이기연 님.”

“놔요.”

“…….”

“난 누구 대용품이 아니에요.”

‘명대사 좋았다. 진짜.’

힘으로 내가 녀석을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는지 예의 없이 손목까지 잡은 녀석의 버르장머리 없는 손은 속절없이 명대사 한 번에 떨어져 나간다.

다시 한번 붙잡을 수 있는 명분이 있을 리 만무, 당연히 이 눈망울에 눈물을 한가득 저장해 놓는 것이 옳다.

이 눈물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궁금하라고.’

궁금하라고. 이 사람이 보인 눈물이 무슨 의미일지, 이 사람에게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지.

원래 모든 호감은 호기심에서 나온다자너.

연애의 대상으로서의 이기연에 대한 궁금증을 들이미는 것은 어렵지만 인간 이기연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놓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연 씨… 잠깐만….”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구질구질해? 마무리 깔끔하지 못하게.’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이제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못 박아 줬어야 했으니까.

‘괜찮았어.’

근데….

‘혜진이는 상처받았으려나?’

아닐걸… 그냥 놀란 것 같은데….

‘애초에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했으니까.’

아마 없었을 확률도 높고….

엘리오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급전개 때문에 놀라 몸이 반응했다는 것이 잘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실제로도 슬퍼 보이기보다는 그냥 뭔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마냥 흠칫 놀라 도망친 게 전부였으니까.

‘아직 베니고어 넷에는 안 올라왔고… 지금 어디 있지?’

허겁지겁 도망친 그녀가 자리한 곳은 라베하 오아시스.

-아. 알프스… 갑자기 죄송합니다. 네… 깜빡… 일이 생각나서….

아무래도 사전에 알프스와 만남이 예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약속 장소에서 도망쳤으니 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었겠지.

뭔가 숙소로 들어가기는 아쉽고, 주점에는 들어가고 싶은데 다른 주점들은 이미 박기리 삼남매나, 차희라와 붉은 용병이 점거하고 있지.

한참 술을 마시는 분위기다 보니 다른 길드원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밤 산책을 혼자 나왔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낮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한적한 오아시스. 몇몇 사람들이 거닐고 있는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조혜진과 안면이 있거나 친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제법 구석진 곳에 앉아 있으니 딱히 마주칠 염려도 하지 않는 것 같았고 왠지 분위기가 좋은 곳이라 적당한 곳에 앉아 한 캔 까기 좋은 타이밍.

파란색 후드를 걸친 그녀도 내 생각과 다르지 않은지 한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서는 인형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혼자 오셨습니까?

-네? 아!

-아! 초면이 아니군요. 그러니까… 조혜진 님….

“누나 시바. 뭐야. 이지후 이번에는 안 하기로 했잖아.”

[잠깐만요. 혜진이가 힘들어 보이잖아. 그래서 잠깐 위로해 주려고.]

“이거 계약 위반이야. 누나. 이지후 당장 치워. 이거 맞아? 누나. 지금 아빠를 찾아라. 이벤트 하고 있다며. 그거 제대로 모니터링하고 확실하게 준비해 놓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야?”

[어차피 밤에는 금지였어요. 그거 룰 위반이라고요. 아마 디아루기아가 잘 잡고 있을걸?]

“지금 걔네 어디 있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눈 피하면서 아직도 퀘스트 중일걸?”

[아니, 그럼 혜진이를 그냥 내버려 둬요? 안 그래도 지 좋다는 남자가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미인이랑 데이트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얘 가만 놔두면 자존감 내려가요. 안 그래도 이런 부분에서는 자존감이 없다시피 했는데. 이런 만남이라도 있어야 자존감 유지해 주죠.]

‘뭔 소리야. 시바.’

멍한 얼굴로 조혜진을 바라보는 이지후의 모습은 예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설정상 예전의 철부지 이지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캐슬락 대형길드의 독자인 이지후는 이기연과 새로운 삶을 함께하려고 했었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게 해결될 수는 없는 법.

이지후의 가족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녀석 역시 궁지로 몰리게 된다.

지혜 누나의 말을 빌리자면 타락한 대공이나 폭군으로의 각성을 마치려고 하는 과도기.

복수에 눈이 먼 녀석은 점점 광증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자신을 보필해주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된 녀석은 결국 이기연까지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여 자식의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괴물이 된 것이다.

사실은 이기연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복수행에 걸림돌이나 약점이 되는 걸 원치 않아서 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것은 숨은 설정.

풋내기 도련님이었던 이전의 풋풋한 외관 대신 삶에 찌들어 타락해 버린 이지후의 얼굴에는 긴 자상이 남아 있었다.

‘암살자한테 당했다고 했었지 아마.’

이야기상 변한 이지후는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괴물이다.

당연히 설정 놀음에 충실한 이지후가 조혜진과 만난 것은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누나. 지금 혜진이한테 상처 주려고 하는 거야?”

[상처는 무슨 상처? 아. 혜진이는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에요.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을지도 모르지만 점점 조혜진에게 마음에 문을 열게 된다고요. 조혜진과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의 광증이 사라지고. 잠깐이지만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누나. 지금 기연이 버려?”

[…….]

“나 버리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기연아. 혹시 질투하는 거야?]

‘진심 제정신 아니자너.’

“아무튼 그거 하지 마.”

[오빠나 준비 잘해요.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뭐 설마 진짜로 그러겠어. 그냥 혹시 모르니까. 멘탈 케어 정도만 해주려고 해요.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엘리오스 어떻게 생각하냐고 넌지시 물어보고. 세상 사는 이야기 좀 하려고 해요. 오빠는 빨리 자는 게 좋을걸요.]

“…….”

[로노베한테 말해놨어요. 스토리도 대강 설명해 놨고.]

‘그래. 나 그런 거 좋기는 하더라.’

이 누나 내가 좋아하는 설정은 또 기가 막히게 가져와.

시즌2에서 새로 등록된 설정은 이지후뿐만이 아니다. 당연히 이기연에게 새로 부여된 설정도 존재한다.

심지어 이번에는 태생적으로 감춰진 설정, 사실 이기연의 몸에는 세상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거대한 힘이 존재한다는 설정이었다.

이지후도, 심지어 이기연 자신도 모르는 이야기.

물론 아직까지는 그 거대한 힘은 발현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기연 그녀가 서서히 세상의 더러움을 알게 되면서, 때 묻지 않은 그녀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강해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점점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건 마음에 들어.’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주신들도 알아차리지 못한 어둠, 오직 엘룬만이 이 사건의 엄중함을 깨닫고 엘리오스를 통해 이 비극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내일 당장 찾아오겠어?”

[지가 안 찾아오면 어쩔 건데요. 대륙이 한번 멸망하는 걸 보면 걔가 가만있을 수 있겠어요? 안 그래도 엘프들 그런 사명감 있잖아요. 엘룬 말이라면 껌뻑 죽고. 솔직히 말해서 커트라인이 조금 높은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혜진이의 단짝이 되고 싶으면 응당 신이랑 세상은 배신할 수 있어야지.]

‘그건 맞아.’

[근데 걔는 혜지니 때문에 엘룬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솔직히 이거 시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엘룬도 못 버리는데 대륙은 어떻게 버리겠어요? 대륙이고 나발이고 혜지니 못 지키면 다시 한번 회차를 시작하겠다는 패기가 있어야 인정을 해주죠.]

‘그것도 맞아.’

[아무튼 내일 아침이나 준비하세요. 아마 꽃단장은 연수가 해줄 테니까요. 내일의 퍼스널 컬러는 파란색. 일찍 일어나야 되요.]

그녀의 말이 맞다는 듯.

“잠깐 괜찮으십니까?”

“제가 찾아오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후우…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부탁드립니다….”

“따라오세요.”

“…….”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오스의 모습 위로 파란색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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