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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49화 (1,04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49화

피크닉 (12)

“어제 비가 내렸었나 보네요.”

“네. 새벽부터 쏟아지더군요.”

“어쩐지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다 싶었어요. 참 별일이네요. 라베스 사막은 원래 비가 내리지 않기로 유명한 지역이잖아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가 내렸던 게… 약 500년 전이라고 들었으니… 저희를 기준으로 해도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아! 혹시 그거 아세요? 엘리오스 님? 라베스 사막에 비가 내리는 날은….”

“…….”

“사막 엘프들의 토속신 사하가와 악신 겔라가 만났다가 헤어지는 날이라는 거. 악신 겔라가 흘린 눈물이 비가 돼서 라베스 사막에 떨어진다는 거….”

“…….”

“사하가는 말이에요. 꽤 로맨틱한 신이더라고요. 사하가 신께서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많은 이유가 있지만… 몇몇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그가 자신의 아들딸들을 등졌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모종의 거래를 통해 이 대륙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그건….”

“악신 겔라와 만나기 위해서요. 악신 겔라는 이곳 어딘가에 잠들어 있데요. 원래대로라면 처형을 당해야 할 악신 겔라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가 사하가의 청원 때문이고… 사막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겔라를 만나러 사하가가 가끔 대륙에 방문하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둘이 가끔 만남을 허락받고… 헤어질 때마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는 설화가 있어요.”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군요. 사하가 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자식들을 사랑하십니다. 사막 엘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원래 신학이라는 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잖아요. 유명한 이야기죠. 사하가 님께서 사막 엘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누가 그분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겠어요? 사막 엘프에게 주어진 선천재능들을 생각해 보면 사하가 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을 만들 때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셨을지….”

“사막 엘프들을 그 누구보다도 아끼는 분이십니다.”

“모습을 드러내신 적은 없지만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심지어 목소리조차 들려주시지 않았잖아요.”

“…….”

“만약 제가 말씀드린 해석이 사실이라면요. 저는 사하가 님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겔라 님을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등지셨잖아요.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고작 몇 분의 만남이지만 그 정도로 사하가 님께서는 겔라 님을 사랑하셨던 거죠. 자신이 아끼는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아들딸들과, 사랑하는 대지마저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 정도로 겔라 님을 사랑하셨던 거예요.”

“신학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예전에 모시던 신이 있었다고.”

“혹시 어떤 분을 모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

“…….”

“엘룬 님이요.”

“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왜요? 인간은 엘룬 님을 모시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저는 엘룬 님의 신도였어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실지는 몰라도 이곳으로 소환되자마자… 엘룬 님의 목소리를 들었거든요.”

“그분의 목소리를….”

“튜토리얼 던전에서 빠져나간 이후에… 여러 오퍼들을 거절하고… 중립도시로 곧바로 이주했고… 그분의 신도로 들어가서 생활했었어요. 중립도시에도 드물기는 하지만 엘룬 님의 신전이 있잖아요. 물론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엘프들이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예상이 가는군요… 혹시….”

“차별당했냐고요?”

“…….”

“타인과 다른 것들을 배척하는 건 인간들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이종족들 역시 마찬가지죠. 몇몇 고위 신관들의 눈에는 인간인 제가 엘룬 님의 신도라는 것이 못마땅했나 봐요. 상황은 전부 설명드리지는 못하지만… 요지는 제 발로 나왔다는 거죠. 심지어 그 뒤로는 마법사로 생활을 했답니다.”

“혹시 어떤 신전인지, 그들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연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이걸…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적어도 엘룬 님의 신전 안에서는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 지금에 와서 그들을 처벌을 내린다고 한 들…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어요? 제 얼굴에 침 뱉기죠.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좋은 사람들 이었지. 그냥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던 거죠. 인간들도 그렇잖아요?”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본래 위에서 있으면 보이지 않는게 있게 마련이랍니다. 아! 비가 오네요? 정말로 신기해요. 원래 이렇게 자주 왔었나?”

“그렇군요. 잠깐 쉬어가시겠습니까?”

“뭐하러 그래요? 좋잖아요. 축제 같지 않아요? 비가 오는데 거리로 나와 춤추는 사람들, 환호성을 지르는 리자드맨들, 심지어는 몬스터들까지. 이제는 비가 오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한 일도 아닐 텐데 너무 즐거워 보이지 않나요?”

“네. 정말로 즐거워 보입니다. 이 비가 라베하의 열기를 식혀주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비가 내리지 않아도 충분히 축복받은 땅이지만 말입니다.”

“읏차.”

“이, 이기연 님?”

“왜요? 잠깐 붙어서 걸어가는 것도 싫어요?”

“너무… 가깝습니다.”

“우산이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사과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제가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들어주셔야죠.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요?”

“…….”

“…….”

“그나저나… 지금 어디로 향하는 겁니까?”

“글쎄요. 그냥 정처 없이 걷는 중이에요. 딱히 목적지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근데 엘리오스 님.”

“네. 이기연 님.”

“왜 다시 찾아오셨나요? 제가 분명히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어째서 다시 찾아오셨나요?”

“말씀드리기 힘듭니다만….”

“그게 무슨 대답이에요?”

“꿈을….”

“네?”

“꿈을 꿨습니다. 기연 씨와 관련된 꿈을 말입니다.”

“재미있네요. 첫 만남부터 이상하게 얽혔었는데, 갑자기 두 번째 만남 때는 꿈에서 봤기 때문에 찾아왔다니… 본인이 조금 이상한 거, 인지하고 계신 거죠? 그래서 어떤 꿈이었는데요?”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그게 뭐야. 지금 놀리는 거예요?”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단지… 저는 기연 씨가 걱정돼서… 그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결코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왜요. 혹시 내가 죽는 꿈이라도 꾸셨나 봐.”

“…….”

“…….”

“어떻게….”

“알았냐고요?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사실은 저도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

“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꿈이었어요. 정말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마치 텅 빈 우주에 혼자 떨어진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꿈. 아무리 소리쳐도 그 누구도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하더라고요.”

“…….”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계속해서 소리쳤지만 어느새 제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점점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죠. 거기서 혼자 훌쩍이고 있었어요.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여기로 와줬으면 좋겠다고. 사실 떠올린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거든요. 근데 누구 목소리가 들렸는지 알아요?”

“…….”

“엘리오스 님이에요. 틀림없이 엘리오스 님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렇습니까?”

“아주 어둠운 곳이었는데… 엘리오스 님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부터 서서히 빛이 보이는 거 있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꿈은 거기서 끝났어요. 빛은 계속해서 깜빡이고 있었고, 저는 불안에 떨면서 그 빛을 바라보고요. 그 와중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결국 어떻게 됐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행복하더라고요. 그게 오늘 엘리오스 님을 용서해 드린 이유예요. 아! 아직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지만….”

“…….”

“그럼 이제 엘리오스 님의 차례죠? 그래서 어떤 꿈을 꾸셨나요?”

“저는….”

“…….”

“비슷한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뭐야. 재미없게. 그렇게 나오기에요?”

“자세한 상황을 전부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아마 비슷한 내용이었을 겁니다. 분명히 말입니다. 저는… 꿈에서 저는 기연 씨를 찾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폐허가 된 도시 안에서 말입니다. 결국 기연 씨를 찾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마찬가지로… 결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

“…….”

“이건… 좀 놀랍네요.”

“…….”

“워낙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대륙에서는 그렇게 신기한 일도 아니지만… 어쩌면 예지몽 같은 거려나… 아니면… 아니면 말이에요.”

“네?”

“제가… 이런 말씀 드렸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마세요?”

“어떻게 기연 씨를 그렇게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운명이라는 거 믿으세요?”

“…….”

“…….”

“운명이요.”

“운명….”

“제 고향에서는 몇몇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고 해요.”

“그게. 정확히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어날 때부터 서로가 붉은 실로 묶여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게다가 이 붉은 실은 절대 끊어지지 않아 불구대천의 원수도 짝으로 만들어버린다지 뭐예요? 시답지 않은 미신이에요. 근데 저는 이거 믿거든요. 아니, 믿게 됐어요. 솔직히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네?”

“저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요? 혹시 엘리오스 님은… 아무것도 느끼고 계시지 못하고 있는 건가요?”

조용히, 아주 조용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엘리오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그의 눈에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비쳐온다.

“느끼고… 계시지 않나요?”

계속해서 내리던 비가 멈춘 것도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비구름이 걷히고 거짓말처럼 태양빛이 구름에 구멍을 만들어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는 말이 없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가 그쳤네요.”

“…….”

“저. 정말로 좋아해요. 비가 갠 뒤에. 파란색 하늘을 바라보는 거.”

“…….”

“사실. 저는 비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이 사람들한테는 축복 같은 일이지만… 저는 우울해져요. 그래서 비가 갠 뒤에 맑은 하늘을 좋아하나 봐요.”

“기연 씨.”

“슬픈 일 뒤에는 꼭 행복한 일이 찾아올 거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잖아요?”

“…….”

“언젠가… 내 삶에도 이런 날이 찾아오면 좋을 텐데.”

“…….”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좋을 텐데….”

조용히 떨어뜨린 눈물 몇 방울. 에베리아의 국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흐느끼고 있는 여인을 살포시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엘리오스 님….”

“…….”

‘6시간 컷이네. 이 지조도 없는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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