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54화
피크닉 (17)
‘얼마나 재미있을까.’
진짜 환장할 만해.
‘안 그래도 싸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애들인데.’
처음 겪어보는 모험, 아드레날린이 가득한 던전행, 새로운 퀘스트와 목표, 품질 좋은 아이템과 성장하고 있다는 기분.
이게 진짜 휴가고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안 그래도 텐션이 높은 아이들이 더욱더 커다란 목소리로 파이팅이라 외치며 손을 모으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겔라가 가지고 온 아이템을 하나씩 들춰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분배를 시작한 디아루리아.
물론 업그레이드할 만한 장비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 짓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이후 사하가의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름 점잖다고 생각했던 쓰로누스와 케루빔, 심지어 막스마저 극도로 흥분한 기색을 숨기기 어려워하는 모습.
마치 산책 나가기 전의 강아지처럼 꼬리를 쉴 새 없이 흔드는 것같이 보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본래 인지하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아직 애들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흐윽… 흑….
-그렇게… 슬픈 사연이 있었구나.
-우리가 꼭 사하가의 유산을 이곳으로 가지고 오는 거야! 겔라 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전부 해결해 드릴 테니까.
-라베스 사막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이제는 잊혀진 설화라고 생각하니 더 가슴이 아프네요. 그렇죠, 언니?
-뭐, 중요한 건 모두 다 우리 아빠 덕분이라 이거지? 아무튼 모두 잘 들어.
‘디아루리아가 제일 신났어. 누나가 되어가지고 제일 신난 것 같아.’
-이미 모두들 파란 길드의 뱃지 조각을 받아서 예상하고 있겠지만 아빠가 이런 임무를 내려주셨다는 건… 이번 휴가가 단순한 휴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해. 어쩌면 이 라베하라는 도시와 라베스 사막이라는 커다란 무대는….
-네?
-우리들의 입단테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모두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겔라 님과 사하가 님, 잊혀진 대륙 신을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의 소용돌이. 그동안의 우리가 맡기에는 너무나 난이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냐고.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고작해야 심부름을 다녀오는 게 전부였잖아? 대륙에 관련된 서사는커녕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몬스터들 잡아 오는 게 전부였지.
-그, 그렇죠….
-저번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이건 시험이야. 그래. 결코 피할 수 없는 시험. 당당한 한 사람의 모험가로 인정받기 위한 시험 말이야.
‘그건 아니기는 한데….’
“그래. 디아루리아. 너는 할 수 있단다. 엄마가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근데 여기에도 과몰입 하시는 분이 한 분 더 계셔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아까부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디아루기아.
내가 함께 있는 건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인지, 여신의 거울과 합체라도 할 기세로 가까이서 디아루리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군요. 그랬던 거군요! 이게 전부 다 시험이었던 겁니까?”
“네… 뭐. 그렇게 봐도 됩니다.”
“제가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한 거였군요. 사실 디아루리아에게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무래도 인간과 드래곤은 성인식의 시기가 다르니까요. 본래대로라면 약 100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아시다시피 디아루리아는 인간의 시간에 더욱더 익숙했던 터라… 모르긴 몰라도 이질감을 많이 느끼고 있었을 겁니다.”
“…….”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빠른 것도, 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것도,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다른 지식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도… 아마 그런 영향 때문이 아닌지 걱정했었죠. 때마침 동생들이 생겨나 긍정적인 영향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려는 모습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나도 그거 알아.’
실제로 디아루리아가 동면에서 깨어난 이후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건 아니었지만 당시 파란 길드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다니고 있었을 때, 그나마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김미영 팀장의 자식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이 먼저인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먼저인지,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던 시점.
디아루기아의 말대로 막스가 없었더라면 더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특히.
‘얘들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더 밝아지기도 했지.’
그 말 그대로였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를 해주고 싶었었는데… 아주 좋아 보이네요.”
“네. 뭐… 좋아 보이죠. 특히나 동생들이랑 잘 지내니까. 첫째로서 책임감과 자부심도 느끼고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게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게 결정적이었겠죠. 다들 한 가지씩 특이한 점이 있으니까요. 막스는 프로그램이었고, 외신 아이들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요.”
“네.”
“사실 외신 4남매와 막스, 그리고 디아루리아 같은 경우에는 덩치는 남들보다 조금 작을지언정, 생각하는 것과 능력은 성인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괜한 어른 흉내 내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계속해서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올려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이번 기회였고요.”
“그렇군요….”
“…….”
“솔직히 사과드려야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륙 운영이니 뭐니, 큰일에만 집중하느라 가정을 소홀히 하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싱긋 웃으며 미소를 띠는 게 양심이 찔리기는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얘들을 위해 기획하고 있던 게 있었는데 그게 지금이 된 것뿐이다.
“그런데. 세라에게는….”
“걔 이야기는 하지 마요. 충분히 예뻐해 주고 있으니까.”
“한마디 정도 해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
“…….”
“그냥 말이 잘 안 나오더라고.”
“당신 심정도 이해는 가지만 약간이나마 태도를 고치는 게 좋을 겁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은근히 눈치가 빠르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세라 역시 자신이 차별받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 겁니다.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엄밀히 말해서 지금의… 세라가….”
“…….”
“그때의 세라핌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끔 보면 저 아이가 불쌍하더군요.”
“아니. 얘들 중에서 최근에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낸 게 쟨데 뭔 말을 그렇게 해요? 안 그래도 요즘에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압박하지 마요. 더 스트레스받는다니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고. 디아루기아 님도 저랑 같이 미국 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본질은 같아요. 보셨잖아요.”
“…….”
“아무튼 디아루기아 님도 준비하세요.”
“뭘 말입니까?”
“얘들 모험이요. 사하가 유적지는 여기서 좀 멀어서. 디아루기아 님이 데려다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나갈 준비 좀 할게요. 얘들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웠네.”
“네. 고생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허겁지겁 방 안을 빠져나간 디아루기아.
다시 한번 망원경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자 유독 침울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세라핌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을 말아야지.’
모두가 떠들썩한 와중에도 괜스레 구석진 곳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
함께 웃고 떠들고 있기는 하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방금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겠지.
‘내가 생각을 말아야지 진짜.’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힘냈더구나. 세라핌(0/1)]
이라고 말을 건넨 뒤에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
겔라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네. 겔라 님.]
[혹시나 사하가 님께서 답변을 주셨는지요.]
[아! 아직 제대로 된 연락은 못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이미 저희 쪽 의사는 확실하게 전달한 상태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렌 님께서 협상 중이시니까요. 그리고… 아마 나오게 될 겁니다.]
[혹여나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한 번 자신의 피조물들을 버렸던 분이시니… 다시 한번 등을 지기가 쉽지 않으시겠죠. 실제로도 사하가 님께서는 사막 엘프들을 등진 이후 무척 힘들어하셨습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더 쉬워요. 아직까지 겔라 님을 보러 여기까지 출장을 오는 양반인데 뭔 그런 걱정을 하고 그러세요. 그냥 계획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그럼 알아서 잘 풀릴 거예요.]
[네. 그럼 이기영 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짧은 대화가 마무리되고 난 이후에는 아니나 다를까 계속해서 손거울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충 자리에서 일어난 이후에는 곧바로 연락을 받는다.
-기연 씨?
“아. 네. 엘리오스 님.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너무 죄송해요. 잠깐 숙소에 일이 생겨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천천히 나오셔도 됩니다. 카페에서 기다리면 되니까요.
“첫 데이트부터 늦어서 죄송해요. 원래는 이렇지 않은데….”
-아닙니다. 정말로 괜찮으니….
“정말 죄송해요. 잠깐 준비해야 되니까. 먼, 먼저 끊을게요. 대신 오늘은 제가 전부 살게요!”
-네?
대답도 없이 끊어버리고.
“저 왔어요. 이기연 님.”
“연수 씨. 매번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즐거운 일이니까. 또 언니 부탁이기도 하고요.”
방으로 들어온 하연수를 맞이한다.
‘정신 없자너. 정신 없는 하루자너.’
이제 곧 무대 위로 올라가는 가수마냥 메이크업 받으면서 잠깐 졸고.
“이기연 님. 거의 다 되셨어요. 한번 보실래요? 근데 어쩜 이렇게 피부가 좋아요? 잡티 하나 없네. 하긴… 그러고 보면 항상 잡티는 없었죠. 혹시 슬라임 젤, 그거 쓰시나요? 파란 길드 마스터께서 선물하셨다고 하는 거. 그게 비결인가요? 요즘은 구할 수도 없다던데.”
“…….”
이후에는 거울을 보고 마지막 점검.
“저 지금 나가고 있어요. 엘리오스 님.”
-네.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천천히 나오십시오.
“네!”
왠지 모르게 떨려오는 목소리, 관심이 가는 여성과 첫 데이트를 앞두고 있다기에는 너무나도 수심이 깊은 울림.
어째서 엘리오스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오늘 이별 통보 하려고 하는 거자너.’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기로 시작한 첫날, 녀석은 무책임하게도 어제 있었던 일이 모두 오해였으며 이기연의 착각으로 일어난 헤프닝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을 것이다.
아직 조혜진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뚝심 있는 선택이었지만….
‘이기연의 여린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리네.’
“엘리오스 님!”
“기연 씨… 오셨습니까?”
“네.”
운명의 여인 속에 잠들어 있는 겔라의 파편이 깨어나려고 하는지도 모른 채로 녀석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식사는 하셨습니까?”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세요. 당연히 안 먹었죠. 엘리오스 님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후훗.”
“하… 하….”
“저 오늘 정말 기대하고 있거든요. 일부러 내일까지 휴가도 냈고… 오늘은 마음껏 놀 수 있어요.”
“…….”
“그럼 갈까요? 서로를 조금 더 알아가야죠. 그리고 이거.”
“이건….”
“붉은 실 반지예요. 저도 하고 있고요. 짠. 커플링이네요.”
이쪽을 반기고 있었다.
장담하건대….
절대로 이별 통보를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