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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55화 (1,05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55화

피크닉 (18)

‘오늘 이별 통보하면 진짜 사이코패스지.’

볼품없는 붉은 실 반지를 내밀며 기뻐하는 순수한 기연이의 모습, 심지어 손을 살짝 잡으며 기대오기까지 한다.

문제는 이 새끼의 손이 철옹성이었다는 것. 어떻게든 깍지를 껴보려고 손을 움직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은 거부하겠다는 듯이 기존의 포지션을 유지하는 녀석의 손이 느껴진다.

‘이럴 거면 어제 깍지는 왜 꼈어? 지가 잡아놓고.’

나도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녀석도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1일이 되어 있는 기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인지, 눈이 피곤해 보인다.

조혜진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리고 순수한 이기연의 마음에 총알구멍을 만들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의 상태를 보고 있노라면 이기연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을 거라 단단히 마음먹고 온 것처럼 보였다.

‘악마 같은 새끼.’

냉혹해도 이보다 더 냉혹할 수 없다. 너무나도 차가운 얼음장 같은 계획.

심지어 오늘 데이트를 진행하려고 한 것부터가 잔인하다. 최대한 행복한 하루를 선사해 자신의 죄책감을 덜겠다는 계획처럼 보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자기위로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죄책감에서 멀어지기 위한 자기연민과 합리화가 어느 정도인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상황.

지금 당장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수심이 드리운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느껴졌다.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어째서….”

“그냥요.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이셔서요. 혹시… 오늘 제가 지각한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늦으신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면 뭣 때문에 그러시나요? 혹시… 붉은 실 반지가 너무 유치한가요? 제가 너무… 신났었나… 봐요….”

“아닙니다. 그것 때문도 아닙니다.”

“그럼….”

“장담컨대 기연 씨가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일단….”

“네. 일단 빨리 자리부터 옮기죠.”

그제야 조금이나마 표정을 푸는 녀석, 의외로 눈치가 빠른 이기연 때문에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도드라진다.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인 만큼 최고의 하루를 선물해 주겠다는 듯이 연기 아닌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기연은 녀석의 감정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단지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계속해서 캐묻는다면 나쁜 상상이 현실이 될까 봐. 엘리오스의 입에서 이제는 그만하자는 말이 나올까 봐… 두려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마음이 엇갈리기 시작하자너.’

물론 그게 데이트의 방해 요소가 되지는 않았다.

겉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미소를 띤 채 걷고, 좋은 이야기들을 속삭이며 오늘의 계획에 대해 즐거운 듯이 떠들었으니까.

“오늘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라베스 사막 몬스터 박물관으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

“한때 모험가로 활동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서… 어쩌면 궁금해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궁금해요! 당연히 궁금한걸요! 기억해 주고 계셨군요.”

“물론입니다.”

“모험가 길드의 접수원으로 일했던 적도 있었다고 했었잖아요? 당시에는 여신의 거울도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이라… 던전로그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하기도 했었거든요. 일류 모험가들의 모험 이야기나 오금이 저릴 것 같이 묘사되어 있는 몬스터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퀘스트 같은 것들 말이에요.”

“…….”

“말씀드렸다시피 제법 진지하게 모험가 생활을 했었으니까요. 제 실력으로는 희귀 등급 정도가 한계였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만….”

“만약에 사제로 등록했더라면 조금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엘룬 님의 힘을 사사로이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아니에요. 이제 전부 지난 일이니까요. 그보다 빨리 가 봐요. 어서요.”

“네.”

엘리오스의 팔을 이끌고 들어간 라베하의 몬스터 박물관. 들어서자마자 처음으로 든 생각은 그거였다.

‘여기 잘해놨네. 입장료 많이 받을 만해.’

“우와….”

“괜찮군요.”

“괜찮은 정도가 아닌걸요. 마치 사막 한복판에 있는 것 같아서… 뛰어난 박제 마법사가 있는지 몬스터들도 생동감이 넘치네요. 저기. 저기요. 악명 높은 사막 전갈 아닌가요? 영웅 등급에 이른 마법사가 아니면 외갑에 대미지를 주기 힘들다고 알고 있는데… 꼬리도 무려 세 개고요.”

“특유의 호전적인 성격이 있다고 적혀 있군요. 지금 전시되어 있는 녀석은 무리의 대장이었던 모양입니다. 실제 사막 전갈들은 이것보다 크기가 작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실제로… 보신 적이 있으신가 봐요?”

“비교적 최근으로 한… 40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푸흡.”

“네? 제가 혹시….”

“아니요… 푸흡…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요. 비교적 최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갑자기 40년 전 이야기가 나오니까. 저는 4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었거든요. 새삼스럽게 종족이 다른 걸 실감했지 뭐예요?”

“하… 하하… 네. 그랬었죠.”

“뭐. 사실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요. 마음만 잘 통하면 되지.”

“…….”

“엘리오스 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었거든요. 서로 만나고 인연을 맺는 건 영혼과 영혼의 이어짐이라고, 누가 먼저 떠나든, 서로 자리한 곳이 다르든 간에 아무 상관 없다고, 혼과 혼이 이어져 있으면 쭉 함께니까….”

“…….”

“…….”

“좋은 말이로군요. 저도 동감합니다.”

‘동감은 하겠지. 이게 네 이야기가 아니라서 문제지.’

“아무튼 계속 구경할까요?”

“네.”

‘이거 생각보다 빡셌던 것 같은데.’

“어마어마하게 크군요. 경지에 오른 모험가들은… 정말로 이런 걸 사냥할 수 있는 건가요?”

“아마 붉은용병에서도 힘들어했을 겁니다. 전설 등급의 이른 네임드 몬스터는 단순히 스펙이 높다고 해서 사냥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여기 적혀 있네요. 물리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아 특수한 방법을 썼어야 했다. 라베스 사막 끝쪽에 있는 유황불을 구해서….”

“네. 아마 이 몬스터가 유일하게 들어가지 않는 지역이 동쪽 끝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에서 힌트를 얻은 모양입니다.”

‘진짜 엄청 크네.’

땅덩어리가 넓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의 크기도 정말로 크다는 생각이 든다.

‘붉은용병에서도 힘깨나 들었겠어.’

보통 전위들은 몸집이 커다란 몬스터를 선호하지는 않으니까. 후위들이야 맞힐 곳이 많아 좋아했겠지만 이 정도 외갑을 갖추고 있는 몬스터라면 마냥 좋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녹색의 선인장 같은 외갑을 가지고 있는 도마뱀, 사막의 유랑종족이나 다른 몬스터들을 유인해 사냥하는 습성이 있는 몬스터였다.

‘저것도 신기하게 생겼네.’

모래언덕을 잘 달리기 위해 다리 쪽에 특이한 기관이 달려 있는 녀석들부터,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수분을 공급할 수 있게 만들어진 몬스터까지.

“이건 아직까지 라베스 사막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네요?”

“네. 유랑종족들은 다른 곳에서 물을 구할 수 없으니까요. 이 사막 물거미가 유일한 수분공급 수단일 겁니다. 대부분의 유랑종족들은 이 사막 물거미를 잡는 용사들을 최고로 대우해 준다고 하더군요.”

“그럴 만도 하네요. 이곳은 식량보다는 물이 먼저일 테니… 그나마 리자드맨들 같은 경우에는 잘 견딜 수 있기는 하지만 사막 엘프들은 그게 아니잖아요. 다른 소수종족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물론 녀석들의 생김새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저거 쓸 만하겠는데?’

오랜만에 보는 몬스터의 소재들이었다.

‘이렇게 각 보고 구경해 본 게 얼마 만이야.’

몬스터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전체적인 모습부터, 특수한 기관도 잘 분류가 되어 있다.

사실 이제는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연금술사로서의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지라, 은근슬쩍 흥미가 동하기 시작.

어느 시점부터는 엘리오스를 의식하지 못한 채로 집중했을 정도였다. 아마 이건….

‘현성이 생각이었나?’

내가 흘러가는 말로, 몬스터의 소재를 보고 싶다느니 어떻다느니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나.

일부 연금술사들이 교보재로 삼아도 괜찮을 정도로 좋게 분류가 되어 있다. 아마 박물관의 디스플레이를 준비할 때, 연금술사들의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교국은 아니고 공화국에서 몇 명이 왔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게 쉼터가 많이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심지어 부지가 넓은 곳은 앉아서 둘러볼 수 있도록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착각이라면 민망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배려했다는 느낌이 팍팍 든다.

‘생각해 보면 여기뿐만이 아니네.’

투어버스도 그렇고, 동선이 편하자너. 관심 가질 것도 많고….

“식사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 처음은 여기서 해결하는 게 좋겠네요. 저거 어때요?”

“저건….”

“라베스 사막 원정 당시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체험형 레스토랑.”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이래 봬도 야전 생활도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 나 또 이런 거 좋아하기는 해. 실제로 개고생하는 건 싫고, 이렇게 찍먹으로 체험해 보는 거.

모닥불 뒤집는 것이 특기 목록에 있는 이기연은 익숙하게 돗자리를 깔고 모래언덕에 앉는다.

글램핑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리 열악한 환경은 아니다.

뭔가 제법 구색은 갖추거나 레스토랑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기본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녹슬거나 찌그러진 장비가 없다.

“이러니까 정말로 원정이라도 온 것 같지 않나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사진 좀 찍어주실래요?”

“아… 네.”

“정중앙에 놓고 발끝 맞춰서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같이 찍어봐요.”

‘얘 진짜 사진 찍는 센스 없네. 혜진이 답답해하는 소리 벌써 들려오자너.’

“좋네요. 옛날 생각도 나고… 여기를 단순한 박물관으로 부르는 게 조금 그렇지 않나요. 마법으로 안쪽 공간을 늘렸는지 이런저런 컨텐츠들이 많네요. 무슨 테마파크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라베하를 건설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인 수준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윽고 메뉴가 나온 이후에는 모닥불을 뒤집으며 익숙하게 야전 생활에 익숙하다는 모션을 취해주기 시작한다.

제법 익숙하게 이것저것 부산스럽게 준비하고, 나름 뿌듯하다는 듯이 미소도 지어주고 말이다.

자연과 친근한 종족이 엘프라지만 왕국의 지도자로서 자라왔던 엘리오스는 이런 게 익숙하지만은 않은 모양, 뭔가 하려고 하고는 있지만 성에 차는 모습은 아니었다.

본인도 민망한 모양인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분위기가 좋아진 듯한 느낌. 어느덧 이 새끼도 가짜 미소가 아닌 진짜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인정해.’

넌 진짜 인정해야 돼.

‘인정하라구.’

“즐겁네요. 후훗.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익숙하지 않으시군요.”

“하하….”

너 지금 행복하자너.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기연 씨는….”

“저는 이미 먹었는걸요.”

이 새끼 입가에는 미소가 아니라 행복이 걸려 있었다.

물론,

물론 그 행복이 아주 잠깐뿐이라는 것을 이기연은 인지하고 있다.

이 만남의 끝이 이별뿐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이 행복한 꿈에서 깨지 않기를.

계속해서 이 꿈이 이어지길 기도하며….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슬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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