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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57화 (1,05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57화

피크닉 (20)

내가 혹시 미쳐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자꾸만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불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설정상 이기연은 전에도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처음 대륙으로 넘어왔을 때, 엘룬 님의 목소리 역시 이렇게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자신을 포근하게 안아주고 따뜻함을 느끼게 했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 귓가에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마치 사막의 밤처럼 서늘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둡게 느껴졌다.

‘엘룬이시여.’

신전을 떠난 이후에 처음 불러보는 그리운 그 이름, 엘룬.

하지만 그 이름 역시 그것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조금씩 흐릿해질 뿐이었다.

절박하고 초조해진 그녀의 옆에서 누군가가 달콤한 목소리로 다시금 속삭였다.

[거부할 필요 없단다. 나의 아이야.]

“당신은… 당신은 누구신가요? 도대체 어째서….”

[아주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 왔단다. 그래.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그만….”

[두려워하지 말거라. 나는 너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너의 이해자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리라. 순식간에 창백한 얼굴로 변모한 이기연은 허겁지겁 손거울을 꺼내기 시작했다.

‘누군가….’

누군가 도와줬으면.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치 죽음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에 이제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심연의 어둠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듯한 느낌,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둠이 퍼져 나가는 듯한 감각.

그 누가 이런 상황에서 타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한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거지.

지금 이곳으로 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아니, 나를 도와줄 사람이 이 대륙에 있기는 하나?

설정상 이지후는 이기연을 배신했고, 엘리오스 역시 이기연에게 등을 돌렸다.

이제는 잊혀진 인연, 파란의 길드마스터의 연락처도 알 수가 없다.

친우들과 동료들은 떠나갔고, 균열박물관, 우정클랜에서 맺었던 짧은 인연들도 이제는 모두 잊어버렸다.

이 넓은 대륙에 이기연은 혼자 남아 있다. 혼자 말이다. 부자연스럽게 주변을 돌아본다.

아무도 없어.

도움을 청하듯이 손을 뻗어보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다.

“도… 도와… 누군가….”

“네?”

“도와주….”

“뭐야. 이 사람… 술이라도 취한 거예요?”

“끄윽… 꺼억….”

“뭐야… 소름 끼치게….”

짤막한 엑스트라로 등장한 하연수가 마치 이상한 걸 봤다는 눈으로 허겁지겁 발길을 돌린다. 단역으로 등장한 이름 없는 그녀의 시점으로는 이기연을 피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미 얼룩진 화장 때문일까. 아니면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비틀거리는 사람이 이상해 보였기 때문일까.

단순히 운이 없었을 뿐이다. 때마침 마주친 라베하의 관광객이, 타인과 연루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기연을 외면한 것뿐이다.

조금 운이 좋았더라면. 타인에게 온정의 손길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았더라면, 꿋꿋한 이기연은 언제나처럼 꿋꿋하게 어둠을 이겨낼 수 있었으리라.

별것 아닌 아주 작은 사건이었지만 아마도… 그것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아… 나는 혼자구나.’

나는 혼자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말이다.

“나는… 혼자구나. 흐윽….”

“…….”

“나는… 정말로… 이제… 혼자구나… 흐윽… 흐으윽….”

“…….”

“이제…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거구나.”

그 누구도 이기연을 원하지 않는구나.

‘왠지 진짜로 울컥하는 것 같아.’

[그래. 사랑스러운 아이야. 너는 혼자란다. 그 누구도 너를 원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껴주지 않지.]

“…….”

[불쌍한 아이야. 가엾은 아이야. 나의 씨앗아.]

“흐윽… 흐으으윽….”

[네 안에 있는 작은 불씨가 꺼져가고 있구나.]

“…….”

[꺼질 것 같지 않았던 네 안에 있는 희망의 불씨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구나. 그러니 아이야. 내 손을 잡거라. 네 안의 불씨를 지키고 싶다면 나의 손을 잡거라.]

“…….”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이제 쉬려무나.]

“쉬어….”

[그 누구도 너를 원하지 않지만 나는 너를 필요로 한단다. 내 안에 있는 힘, 어둠, 그리고 여전히 꺼지지 않은 작은 불씨까지… 내가 그것을 필요로 한단다. 너의 모든 것들을 내가 필요로 한단다.]

“네….”

[내 품에 와서 안기려무나. 그리하면….]

“그리하면….”

[그리하면 내가 네게 가장 편안한 안식을 선물. 하리라.]

“…….”

[선물. 하리라.]

스하아아아아아아아!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같은 종류의 소리가 수초에 걸쳐 귀를 때린다.

그 모든 소음이 멈춘 것은 한순간, 누군가 손뼉을 짝 하고 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것이 멈췄다.

아니, 실제로도 시간이 멈춰 있었다. 허공에서 멈춰 있는 빗방울이 보였으니까.

수없이 떨어지는 그 빗방울을 통해 이기연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이기연을 꽉 안고 있는 악신 겔라의 모습을.

다시 한번,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이내….

하늘에서….

검은색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아.

‘연출 좀 너무 심하기는 해.’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어. 클래식이라서 나쁘지 않기는 한데. 너무 클래식이자너.’

누나나 나나 언제나 왕도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격언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왕도기는 해.

물론, 일단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엄청나게 효과적이기는 했다.

붉은색 비가 본래 정석이기는 하지만 검정색 비도 불길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에서 이상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것이 들리지 않는가.

“뭐야….”

“뭐야 이건….”

“갑자기… 이게 무슨….”

“누가 지금 장난친 거야?”

“아니면 라베하에서 이벤트 중인 거 아니야?”

“시발… 불길하게… 이거 라베하에서만 이러는 게 맞아?”

“뭐야. 갑자기… 전파도 안 터지고… 어이 누가 상황실로 연결 좀 해봐.”

“기다리다 보면 재난 문자라도 오겠지, 뭐. 대륙에서 우리가 모르는 이상 현상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몇 년 전에는 연합에 있는 변방 왕국에서 초록색 비가 내렸다면서. 끽해야 던전화 때문에 생긴 이상 현상이거나….”

“라베스 사막에 던전이 공략된 지가 언젠데… 아무래도 따로 조사를 해봐야겠어.”

“아! 연락 왔습니다. 선배님들. 지금 조사단 파견했다고 일단 모여 있으랍니다.”

“비상 상황이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제가 보기엔… 그런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붉은전신님께서도 그냥… 별 반응도 없으시고… 그냥 기후 조절 장치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 같던데… 혹시 모르니 일단 모여 있으랍니다.”

“그럼 가지, 뭐.”

라베하에 초대된 이들, 운영위원회에 포함된 이 종족들이 모두 피난 구역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

다들 기후 조절 장치에 이상이 생겼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표정들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유독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한 엘프가 눈에 띄었다.

‘엘리오스.’

녀석은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로 연신 손거울을 두드리고 있었다.

“기연 씨? 기연 씨 들리십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자너.’

“기연 씨. 엘리오스입니다. 기연 씨? 지금 어디십니까? 제가 지금 찾아가겠습니다. 아직 드리지 못한 말이….”

‘기연이한테 상처주면 기냥 대륙 멸망하는 거자너.’

녀석은 엘룬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붉은 실이 무섭기는 해.’

이렇게 순식간에 모든 일이 벌어질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기연을 만난 첫날 신탁을 받았고, 만나자마자 오해가 생겼으며 만난 지 6시간 만에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레 들춰볼 수 있었다.

븕은 실로 맺어진 인연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그게 겨우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오늘부터 1일을 하기로 한 이후 24시간도 안 돼서 헤어지고,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니 어디선가 대륙 멸망의 전초전을 예고하고 있단다.

이 모든 게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엘리오스가 이쪽의 템포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렇지 않아도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관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관념과 차이가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템포가 너무 빨랐어.’

두사람의 절절한 감성이 없었다면 억지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후다닥 처리해 버린 인연.

인간이었어도 따라오지 못할 템포를 엘프인 녀석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불길함에 계속해서 전화를 하며 슬슬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중이겠지.

“엘레나. 혹시 지금… 아니. 내가 그곳으로 가마.”

내 말대로 녀석의 일그러지고 불안한 표정이 보인다.

그것은 엘룬과 대륙을 위한 걱정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겨 버린 이기연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다.

“제발… 어디 있는 겁니까.”

그런 녀석의 앞에 조혜진이 모습을 보인 것은 바로 그때.

문제는 그녀의 곁에 다른 남성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엘리오스 님?”

“혜진 씨.”

“혜진 씨? 누굽니까? 이 사람은….”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후 씨. 이쪽은 엘리오스 님으로 에베리아 왕국의 지도자이며 이종족 연합의….”

“그게 아니라… 혜진 씨. 혹시… 이틀 전에 저와 함께 있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

“짧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명은 간결하고 빠르다.

이기연과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에 대해.

엘룬에게 들은 신탁과, 대륙의 멸망에 대해.

지금 내리는 검은 비의 이기연이라 불리는 여인의 상관관계에 대해.

마냥 흘려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야 조혜진은 신탁을 받아본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혜진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이지후.

‘제정신 아니야. 저 누나 진짜.’

“방금… 이기연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한데 당신은 누구….”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이지후는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라도 일단 달린다.

왜 달리는지 설명도 없고 개연성도 없다. 단지 달리는 감성이 중요할 뿐이다.

얼굴에 생긴 자상은 그를 복수에 미친 괴물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가면에 불과하다.

설정상 오랜 시간 동안 깨지지 않은 그 가면이 드디어 부서져 내리는 순간.

“기연아….”

‘이 누나… 진짜… 진짜 성격 이상해.’

“기연아… 기연아!”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아니, 여름의 끝이라도 맞은 것 같은 절박한 표정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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