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058화 (1,05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58화

피크닉 (21)

사막의 밤은 춥고 외롭고 길다.

생각해 보면 라베스 사막은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이런 외로운 밤을 보냈을 것이다.

우울하고, 어둡고. 싸늘한 사막. 그 누구도 찾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저주받은 사막.

라베하 도시로 잠깐 동안 활기를 얻은 라베스 사막이었지만, 사막을 비추는 도시의 빛이 하나둘씩 꺼져가기 시작하면서, 라베스 사막이 이전의 그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으슬으슬하네.”

“꼭 뭐가 나올 것 같이 느껴지고 말이야. 그렇지 않아? 조지?”

“…….”

“조지 왜 그래?”

“아니. 방금 전에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서 말일세.”

“또 뭔데?”

“…….”

“제기랄.”

“캐넌, 너는 또 왜 그래?”

“제기랄. 비 한번 더럽게 많이 오네.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여기 온 첫날부터 검은 비가 내린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장비나 새 걸로 바꿀 걸 그랬어. 괜히 알렉스 너한테 낚여가지고.”

“초대장 구해달라고 난리 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나한테 떠넘기지 마. 캐넌. 이게 구할 수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인 줄 알아? 너도 알고 있는 것처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풀린 물량이 겨우 50장이야.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

“제길….”

“다들 재난 문자 받았잖아. 그냥 일시적인 현상이야. 아마도 수 시간 내에 곧 그칠 것 같고… 단순히 기후 조절 장치에 문제가 생긴 거니까. 금방 정상화되겠지.”

“티켓 구하려고 쓴 돈이 얼만데…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어?”

“그거야 네가 구해달라고 해서 그런 거잖아!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벌써부터 죽는소리를 하는 캐넌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억울한 마음이 샘솟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놈들한테 자랑하는 게 아니었어.’

파란 길드마스터가 명예추기경을 위해 만들었다는 환상의 도시 라베하.

그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초대장의 개수가 애초에 딱 50장이었다. 수천 명이 일하고 있는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도 단 50장 말이다.

상반기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보너스와 함께 티켓을 수령 받고 기분과 술에 취해 놈들에게 떠들어댄 것이 첫 번째 실수. 자신들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말한 것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원수 같은 새끼들.’

당연히 데려가고 싶다고 해서 데려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티켓을 팔려고 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단순히 티켓을 가지고 있다고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난봉꾼 캐넌과 삼류 도박사 조지, 저놈들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굵직한 대륙 전쟁에 모두 참여했다는 이력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로그만 봐도 친 명예추기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아마 위에서도 티켓 거래를 하는 걸 알면서도 눈을 감아 줬을 확률이 높았겠지.

‘뭐… 실제로 팬이기도 하니까.’

다른 이들처럼 명예추기경의 물품이나 물건들을 경매로 사서 수집하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캐넌과 자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명예추기경의 추종자였다.

그와 함께 호흡하고 싶어 하고, 그가 밟고 있는 땅을 함께 밟고 싶어 하는 자들 중에서도 꽤 잘 풀린 케이스.

실제로 현재 이곳에 있다는 게 가장 큰 증거이리라.

“명예추기경님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디아루리아 님이나 파란 길드원들 몇몇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검은 비나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신세라니….”

“아직 시간은 많아. 캐넌.”

“이대로 라베하가 문을 닫으면 이거 환불은 해주는 건가?”

“애초에 거래하면 안 되는 물건이야. 캐넌. 여기서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실제로 판매하지도 않은 암표를 사고 들어온 건데 환불이 무슨 개소리야? 너 때문에 내 인생 종 치는 꼴 보고 싶어?”

“아니, 그건 알고 있지만… 생각한 거랑 너무 다르니까….”

“들어왔을 때 입 벌리고 여기저기 쳐다본 게 누군데… 제길.”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비가 올 줄 알았나?”

“내일은 그칠 거야. 생각해 봐. 파란 길드마스터가 이 꼴을 그냥 보고 있겠어? 명예추기경님을 위해서 지은 도시에 불길하게 검은 비가 떨어지는데… 단언하건대 하늘에 구멍을 뚫어서라도 비를 멈추게 할 테니까. 우리는 잠자코 기다리자고.”

멍하니 앉아 있던 조지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글쎄.”

“…….”

“…….”

“지금 보니 단순히 기후조절 장치에 오류가 생겨 비가 내리는 게 아닌 모양일세.”

“뭐?”

“저쪽에 이종족 연합의 엘리오스 님과 파란 길드의 조혜진 님께서 하는 이야기를 그만 봐버렸지 뭔가.”

“조혜진 님이 여기 계셔?”

“그 밖에도 다른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네만… 지금은 어디론가 가버린 것 같은데….”

“웃기지 마. 조지. 네가 어떻게 그분들 장벽을 뚫고…. 아!”

말을 멈춘 것은 삼류 도박사 조지. 녀석이 독순술을 배워놨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뒤였다.

언젠가 도박에 도움이 될 거라고, 시도 때도 없이 입 모양을 읽는 연습을 했던 것이 불현듯 생각난 것이다.

당시에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이거. 여기에서 말해도 되는 거야?”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뭐야. 지금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일단 밖으로 나가지.”

“캐넌 따라와.”

‘단순히 기후 조절 장치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라 이거야?’

그게 아니라면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다. 여기 모여 있는 일류 모험가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목적일 테니까.

공식적인 발표가 기후 조절 장치의 문제라면 윗선에서도 이 사실을 퍼뜨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괜히 입 잘못 놀리면….’

조지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이종족 연합의 엘리오스와 파란의 조혜진이 있었다.

자신 역시 그들을 힐끗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는 엘리오스,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파란의 신창.

그들을 지나친 이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검은 비를 헤치며 걸어가고 있는 도박사 조지를 향해 캐넌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뭐야. 조지.”

“아무래도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야.”

“그러니까 그 일이 뭔지 말 좀 하라고.”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대륙의 멸망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가더군. 엘룬 님께서 내린 신탁. 한 여인과 얽힌 이야기. 자네들은 혹시 타고난 운명에 관해 믿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같은 것 말이야. 간단하게 명예추기경님을 예로 들어보지. 대륙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한 운명을 타고났다거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희생하는 운명을 타고났다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명예추기경님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분이시지. 비슷한 예로 파란 길드마스터도 있고… 노을빛의 검신처럼 누군가를 위해서 태어났다거나 하는 이야기 말일세.”

“그러니까 그게.”

조지는 이후로도 담담히 목소리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된 여인.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자신조차 감당하기 힘든 숙명을 타고난 여인.

지금 내리는 이 검은 비와 라베스 사막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들이 그 여인 때문에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아니.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는 아니야. 캐넌.”

“뭐? 알렉스.”

“지금까지 이 대륙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야. 특히나 명예추기경님을 생각하면… 초월적인 존재에게 선택받거나 버림받은 사람이 하나둘 더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아무튼 조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자네들 혹시 사막의 악신 겔라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

“들어본 적은 있지만….”

“라베스 사막에 비가 오는 날은 악신 겔라와 사막 엘프의 토속신 사하가가 만났다가 헤어지는 날이라는 설화 말일세. 예전에 도박에 미친 리자드맨과의 내기에서 얻은 서적에서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네.”

“…….”

“겔라가 강림하는 날 검은 비가 내리리라.”

“…….”

“그 검은 비는 대륙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한 줌의 재로 변하게 할 것이며 머지않아 온 대륙을 검게 물들이리라.”

“그럼 그 여인 안에 있는 게….”

“악신 겔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검은 비를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 말만은 캐넌도 입을 다문 채로 조지의 뒤를 밟고 있다. 녀석 역시 알고 있는 것이리라.

‘조지… 또 저러는 건가.’

셋 중에 가장 철없고, 모은 돈을 모조리 도박으로 날릴 정도로 미친 녀석이기는 하지만, 녀석은 가끔 저럴 때가 있다.

세상만사를 초월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본능이 시키는 것처럼 움직일 때, 그럴 때 녀석은 평소처럼 멍한 표정이 아니라 술에서 깬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도 한다.

녀석은 그게 도박사의 감이라고 말하지만….

‘그 도박사의 감 때문에…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지.’

최소한 들어서 손해 보는 일은 없다.

어디론가 계속해서 달리기 시작하자 점점 어두워지는 사막이 눈에 보인다.

검은 비가 점점 더 쏟아지는 듯한 느낌. 라베하에서도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지만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마치 검은 태풍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검은 비를 머금은 사막의 모래는 마치 늪처럼 발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녀석이 어째서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깊고 어두워진다. 마치 깜깜한 동굴 속에서 빛을 찾아 길을 나서듯, 더욱더 어두운 공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마침내 어두움의 끝에 다다랐을 때.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공간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같은 세상이 맞는 건가.’

단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뻗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세상이 뒤바뀐 듯한 느낌.

어두운 공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곳에는 검은 비도 모래도 없다.

마치 파동 한 점 없는 고요한 호수 한가운데 있는 것만 같다.

어두운 하늘, 어두운 대지. 그 끝에 존재하는 것은 조용히 서 있는 여인.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매혹적인 눈을 가지고 있는 여인.

창백한 피부와 핏기없는 입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죽어 있는 것처럼 살아 있다.

깊고 깊은 눈동자는 그 어떤 것도 비추지 못할 것처럼 어둡다. 그녀는 마치 바깥에서 내리고 있는 검은 비처럼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티끌 하나 없는 검은색. 그래. 저건 검은색이다.

명예추기경의 빛과 대비되는 어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리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 이 대륙에서 가장 깨끗한 어둠.

만약 저 여인이 잿빛 얼음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등을 돌려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캐넌도, 조지도, 할 말을 잃은 채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캐넌…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알렉스….”

“어쩌자고… 우리가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거지? 어이, 조지. 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그건 나도 모르네. 그저….”

“그저?”

“발길이 가는 대로 달렸을 뿐이지.”

“이… 미친 자식….”

오늘 이후로 다시는 조지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 * *

‘근데 이 새끼들은 또 뭐야. 너네는 누군데 왜 여기에 있어?’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저들은….]

‘겔라 님? 쟤들은….’

[초대받지 않은 이들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저도 몰라요. 누나. 혹시 이런 애들 부른 적 있어?’

* * *

“기연아… 기연아!!”

* * *

‘누나 이상한 애들 와 있다고. 시바….’

3